여리고에서의 삭개오의 사건과 므나에 대한 비유가 조용히 끝을 맺으며 주님께서는 안식일을 평온하게 보내셨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부터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어 온 예루살렘을 '호산나'의 환호성으로 들끓게 하시더니 어느새 성전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기념케 하시며 당부하시고는 모진 고통속에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1. 인자의 영광과 눈물(눅19:28-21:38)
인자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신다. 진정한 왕권을 행사하는 영광스런 입성이다. 그러한 명예로운 왕으로서의 입성에 귀하고 멋있는 백마를 타시지 않고 왜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 또한 어떤 수모와 고통에도 감정의 동요가 없으신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 곧바로 성전을 보시며 진한 눈물을 흘리셨다. 무엇이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시게 했는가.
1) 겸손한 왕의 눈물
예수가 탄 것은 왕의 준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였다. 인자로 오신 그의 왕국은 과시나 세상정 영광이 아니라 철저히 겸손과 섬김의 표상이다. 이것은 예언의 성취이다(슥9:9). 나귀 새끼는 천하고 멸시받는 동물로서 그것을 택하심은 인자의 겸허성을 나타낸다. 그는 즉석의 떠들썩한 환호성에 응답하신 후 폐부로부터 흐르는 눈물을 보이셨다. 말은 없었으나 그것은 인생들에 대한 그의 깊은 동정이다. 예루살렘이 높고 거룩한 사명을 감당치 못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을 슬퍼하시고 연민하시는 것이다.
2) 영광과 눈물의 승화
인간의 고뇌에 대한 우리 주님의 뜨거운 연민의 정은 그의 몸을 다 내어 주도록 지극한 것이다. 지금도 그가 거룩한 친구로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눈물을 흘리는 인자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호산나'하고 옷을 깔며 외치는 자들이 며칠뒤에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자들임을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바리새인의 간섭에 제자들이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찬양할 것이라면서 굴욕을 온유로 받아내셨다. 실로 인자로 오신 그분의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시다.
2. 인자의 수난(눅22,23장)
주님의 때가 이르는 바로 전날 만찬석상에서 자기의 고난을 받을 것을 예증적으로 보이셨다. 떡을 떼어 주며 이것은 내 살이라, 또 포도주는 너희를 위한 나의 피라고 하시며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왜 주님은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몸을 말했으며 그것의 참뜻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사랑하며 지도했던 제자의 손에 겨우 은전 삼십에 매도되는가? 왜 가시면류관보다 더 아픈 제자의 가시를 택했는가.
1) 화목제물이신 인자
떡과 포도주 이것들의 뜯겨짐과 부어짐은 고통받는 생활의 수고로 일그러진 피곤, 가난, 수치와 어두움 그리고 죽음의 형상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미리 예증적으로 보여 주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부탁하신다.
슬픔과 사랑이 섞인 그분의 부탁과 희생 그리고 용서와 감내, 인자는 가룟 유다에게 영혼을 뚫는 칼을 허용하신다. 사랑하는 제자 중에서의 배신, 사단은 언제든지 가장 가까운 자, 가장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무섭게 역사하는 것을 알고 모든 신자는 경계해야 한다.
2) 핏방울과 포용의 기도
돈은 선한 면에서든 악한 면에서든 인간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돈을 맡았던 유다는 돈을 만지며 탐욕이 늘어났다. 부도덕과 범죄적인 행동을 증오하도록 강력하게 훈련받은 예수의 제자가 빠진 이 엄청난 악행의 굴레, 인자는 지성소에 가장 가까운 겟세마네의 은밀한 장소를 찾아 그의 이 비참하도록 당한 배신의 쓰라림과 내일의 고난을 아버지께 아뢰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드리는 처절한 모습에서 우리는 인자의 고뇌와 포용과 그의 사랑의 희생을 본다.
3. 인자의 승리(눅24장)
전날에 어떤 참혹한 일이 있었든지, 얼마나 그를 증오하고 경멸하며 살해했든지, 아무도 기억조차 하기 꺼림칙하고 칙칙한 그 시점에 주님은 무덤 속에 계시지 않았다. 안식일 다음날 새벽 그는 부활하셨다. 왜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안식일에 그리고 첫 목격자가 그 동안 훈련시켰던 제자들이 아닌 여인들이었을까?
1) 선구적인 신앙 열정의 보상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그 주님이 주일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사역의 절정을 이루셨고 교회의 기초를 세우셨다. 당연히 부활을 기대하고 주님을 만나러 가야 할 사도들(남성)이 주저하는 판에 선구자적인 여인들이 주저함 없이 새벽에 갔다. 아끼고 예비해 두었던 귀중한 향품을 가지고 갔다. 열정적인 신앙 앞에서는 고난도, 두려움도, 장애물도 맥을 못쓴다. 여인들이 염려하던 돌문(장애물)은 이미 제거되었다. 그들의 신앙은 천사를 보는 영안을 뜨임받았고 부활의 소식을 최초로 접하고 전하라는 영광을 얻었다.
2) 복음의 진수 확정
죽음은 패비일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시야의 은신처에서 크고 비밀한 승리를 창출하셨다. 이 역사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훌륭한 인류에의 선물이다. '길이요 진리,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지속적으로 믿고 따르는 참신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이다. 이 은총을 입은 자는 세상의 지위가 바뀌어진다. 살아 있는 복음의 씨앗을 인자가 안겨 주셨고 그 씨앗을 받은 성도는 영원의 차원을 살아가는 승리의 증인이 된다.
인자는 겸손하고 겸허하게 고난을 감당하시고 그의 모든 사역을 남김없이 '다 이루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 우리는 그 인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어리석음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제자들은 그렇게도 미리 '고난받고 죽었다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날 아침에 여인들이 먼저 목격하고 전해주는 것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의아해 하는 우를 범했다. 우리는 확실하게 승리하신 주님을 확실히 믿고 증거해야 한다.
1. 삭개오
1) 시대적 배경
당시의 로마 제국은 식민지 국가에 대한 원활한 세금 징수를 위하여 그 나라 백성들을 세리로 고용하였었는데, 여기에 유대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로마의 식민 정책에 대해 강한 적대감과 특별히 세금 징수에는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에 고용된 유대인 세리들에 대한 반감도 당연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창기와 같은 죄인들로 취급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리한 세리들과 함께하시고 게다가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를 구원하심으로써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신 것이었다.
2) 성품
그들의 침략자인 로마의 앞잡이로 세금을 거둔 사실에서 그의 기회주의적 성격이 엿보이며, 세리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많은 돈을 모은 것으로 보아 재물욕도 강한 인물로 보인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까지 올라갈 정도로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일단 예수님을 알아보고난 후에는 즉시 순종하고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것으로 보아 강한 결단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3) 교훈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희 회개한 삭개오는 이제 지금가지의 자신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자신의 부정한 재산까지도 돌려 주기로 자발적으로 결심하였다. 우리는 삭개오의 이러한 회개는 한 사람의 삶까지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까지 구원하심으로써 예수님의 구원의 범위는 한계가 없음도 보여 주셨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누구든지 진정으로 회개하고 우리 주님께 나아오는자는 모두 다 받아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2.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파괴 예언과 그 성취
1) 역사적 배경
A.D.66년 당시의 로마 황제였던 네로는 전 제국에 황제숭배 정책을 강화하였고 이에 대하여, 여호와 유일 신앙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은 크게 반발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네로의 정책에 반발하여 열심당을 조직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네로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를 파견하여 유대 전쟁을 일으켰다. 이 유대 전쟁은 A.D.66-70년까지 4년간 계속되었는데, 70년에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다. 한편 성전의 파괴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네로의 죽음으로 로마로 돌아가서 황제가 된후 대신 파견된 그의 아들 디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2) 의의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은 세상 종말에 관한 예언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A.D. 70년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예언에 관한 사실이 모두다 성취됨을 보여 준다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언제나 주님의 말씀과 성도의 자세를 가슴 깊이 새겨서 언제나 마지막을 예비하는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잊지 않아야 하겠다.
3. 예수 부활의 역사성
1) 성경적 증거
예수 자신의 예언 : 예수님께서는 공생에 기간 동안 자신이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사실 것이라는 사실을 수차례 예언하셨다(마12:38-40 ; 마16:21 ; 마17:9,23 ; 눅9:22 ; 요2:19-21).
빈무덤 : 성경은 분명히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당한 사실, 그리고 장례된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동시에 그 무덤 안에 있던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사실에 대해서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마27:57-66 ; 막15:42-47 ; 눅23:50-24:11). 사복음서를 비롯하여 신약 성경 전체는 바로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근본 전제로 하여 기록되었다. 만일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많은 성경의 기자들이 각자의 인격과 신앙 양심상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들의 책에 예수 부활을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초대교회 당시의 증거
초대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끔직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로마 제국 전역에 전파되었다. 예수 부활이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3) 속사도와 교부들의 증언
주를 목격한 사도들이 하나둘 세 살을 떠나고 이를 계승한 1,2세기의 속사도들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이단들의 출현에 맞서 이들 이단들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변증은 확고한 예수 부활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속사도들로부터 전수된 확고한 부활 신앙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전수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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