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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 독일 작곡가. 함부르크 출생

힐링&바이블센터 2008. 2. 7. 12:45
Johannes Brahms

Johannes Brahms [1833∼1897]


독일 작곡가. 함부르크 출생.
19세기 후반의 원숙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의 한 사람이며, 고전주의적 조형감을 중시한 독일음악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이기도 하다.


Gesang der Parzen, Op.89
브람스 - 운명의 여신의 노래
Variations on Mendelssohn's Wedding March
Rundfunkchor Berlin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Claudio Abbado, Cond

거리의 악사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함부르크 필하모닉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된 요한 야콥 브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음악의 기초를 배웠고, F.W. 코셀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어, 10세 때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여 E. 마르크스젠·I. 자이프리트 등으로부터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다.

가계를 돕기 위하여 고학을 하였는데, 20세 때인 1853년 봄에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E. 레메니(독일명 호프만)와 독일 각지를 연주여행하였을 때, 헝가리의 명바이올리니스트 J. 요아힘과 음악계의 유력자인 F. 리스트와 사귀게 됨으로써 최초의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특히 요아힘은 한때의 절교를 빼놓으면 평생의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같은 해 9월에 뒤셀도르프에서 R. 슈만 부부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슈만은 [음악신보]지에 젊은 브람스의 재능을 소개하였다.

53년 말에는 브람스의 자작곡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피아노소나타 제1번). 56년에 은사인 슈만이 죽자 슈만의 아내 클라라에 대한 사모의 정과 우정은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57년 데트몰트궁정의 피아니스트 겸 합창지휘자로서 처음으로 공직을 맡았다. 이 시기에 소프라노가수 A. 지볼트와 약혼하지만 얼마 후 파혼한다. 59년에 사직하고 함부르크로 돌아온 브람스는 여성 합창단을 조직, 나중에 단원인 파버를 위하여 [자장가]를 작곡하였다. 62년 동경하던 빈을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이듬해부터 빈이 활동거점이 되어 63∼64년 합창단 징그아카데미 지휘자를 지냈다. 65년에 어머니가 죽자 어머니의 죽음을 추도하는 작품에 착수, 68년 대곡 [독일 진혼곡]을 완성하여,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71년에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승리를 기념, 비스마르크에게 경의를 표하고 황제에게 합창곡 [승리의 노래]을 바침으로써 애국적인 일면을 보였다. 72년에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빈에 영주할 뜻을 굳히고, 72∼75년 악우협회(樂友協會) 연주회 지휘자로 활동하며 17, 18세기 음악을 적극적으로 발굴, 소개하였다. 빈에서는 많은 음악가·지식인과 사귀었는데, 그러는 동안에 바그너파 대 브람스파라는 대립 양상을 띠게 되었다. 브람스 자신은 그러한 파당적 대립과 관계가 없었고, 개인적으로 W.R. 바그너의 예술을 높이 평가했다.

76년 여름, 21년 걸린 [교향곡 제1번 다단조]를 완성하였다. 77∼79년 페르차하에 머물렀을 때는 [교향곡 제2번 라장조] [바이올린협주곡 라장조] 등 많은 곡을 썼다. 78년에는 A. 드보르자크의 재능을 인정하고 적극 후원하였다. 79년 브레슬라우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답례로 [대학축전 서곡]을 보냈다. 81년 무렵부터 마이닝겐궁정악단 지휘자 H.G.F. 뷜로와 교우하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에 가장 뛰어난 합주 능력을 자랑하던 마이닝겐궁정악단이 브람스의 곡을 시연해 줌으로써 이후 서로 관계가 깊어졌다. 이때의 성과로 [피아노협주곡 제2번 내림나장조, 1881] [교향곡 제4번 마단조, 1885] 등이 있다.

89년에는 고향 함부르크의 명예시민 칭호를 받았고, 독일·오스트리아 두 황제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90년 일단 은퇴를 생각하고 다음해 유서를 작성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 또는 미완성작품의 초고를 많이 버렸다. 96년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의 죽음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그도 간암에 걸려 마지막 작품인 오르간을 위한 [11개의 합창전주곡]을 남기고, 이듬해인 97년 64세로 죽었다.

작품

브람스의 음악은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반영하여 항상 침잠된 우울(멜랑콜리)을 담고 있다. 작풍은 매우 낭만적인 반면에 객관적·절대음악적 태도로 일관되며, 특히 기악작품에서는 소나타형식·변주곡·파사칼리아 등 전통 형식과 기법에 신선한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J.S. 바흐·L. 베토벤·F.P. 슈베르트·슈만 등의 영향, 가곡에서 볼 수 있는 깊은 문학적 감각, 민요나 왈츠, 헝가리음악 등에 대한 높은 관심도 무시할 수 없다.

브람스의 창작 활동은 ① 초기(1851∼55):피아노 대곡이 중심이며 격렬한 감정의 표출이 특징 ② 양식적 과도기(∼1860년대 중엽) ③ 양식적 완성기(∼1890):관현악·합창곡·실내악 등의 대곡과 많은 가곡으로 대표되는 시기 ④ 말년(∼1897):명상적인 실내악과 피아노 소품 등으로 대표되는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창작 장르는 오페라와 같은 극음악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에 걸쳐 있다. 또한 브람스는 음악사와 음악이론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바흐를 비롯한 바로크와 고전파 대가의 작품을 연구하여 귀중한 자필악보를 수집하였고, 몇몇 학문적인 전집판 악보를 교정(校訂)하기도 했다.

연표
AD 1833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
1839 포스의 사립학교에 입학
1840 F.W. 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움
1843 피아니스트로서 데뷔
1845 E. 마르크스젠으로부터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움
1853 바이올린 연주자 E. 레메니와 연주여행을 떠남. 평생의 친구 J. 요아힘을 만남. 바이마르의 F. 리스트를 방문. 뒤셀도르프의 슈만부부를 방문. R.A. 슈만, 《음악신보》에 브람스를 천재라고 소개. 슈만의 후원으로 작품의 출판계약을 맺고, 작곡가·연주가로서의 지명도를 얻음. 피아노 소나타 제1번 출판. 이후 귀향
1854 슈만 자살 미수, 정신병원으로 옮김
1855 슈만 부인 클라라에게 경제적·정신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연주여행 출발. 작곡활동 정체. 클라라에 대한 애정 깊어짐
1857 데트몰트궁정의 피아니스트 겸 합창지휘자가 됨
1859 A. 지볼트와의 약혼 깨어짐
1860 <신독일악파에 대한 선언문>에 서명. 반(反)리스트의 입장을 취함
1861 피아노곡 《헨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피아노 4중주곡 제1번, 제2번
1862 빈에서 데뷔
1863 빈 징그아카데미의 지휘자로 취임
1868 《독일 진혼곡》 초연. 음악계가 <브람스파>와 <바그너파>로 양분되어 이후 대립이 계속됨
1869 슈만의 3녀 율리에로부터 실연. 피아노곡 《헝가리 무곡집》 출판. 4중창곡 《사랑의 노래 왈츠》
1871 합창곡 《승리의 노래》
1872 빈에 영주. 악우협회의 연주회 지휘자로 취임
1876 교향곡 제1번
1878 이탈리아 여행. 바이올린 협주곡
1880 《대학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
1881 피아노 협주곡 제2번
1883 바그너 죽음으로 음악계의 정치적 판도에 변화. 가수 슈피스와 만남으로 창작활동 변용. 교항곡 제3번
1885 교향곡 제4번. 반대파로부터 혹평을 받음
1887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
1889 함부르크의 명예시민이 됨
1891 전년부터 창작력이 떨어짐을 느끼고 유서를 작성. 클라리넷 5중주곡·3중주곡
1896 《4개의 엄숙한 노래》. 클라라 사망
1897 간암으로 사망

Johannes Brahms, 1833∼1897

낭만주의시대의 중기 이후에 절대음악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요하네스 브람스는 1833년 5월 7일 독일의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브람스'의 아버지 요한 야콥 브람스는 함부르크 시립극장의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일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요하네스는 어려서부터 그의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10살 때 정식으로 코셀이라는 선생에게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서 12살 때부터 마르크스젠(E. Marxsen)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사사하였다.

그 후 그의 나이 15살이 되던 1848년에 독주회를 통하여 브람스는 피아니스트로서 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이 당시 그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관계로 조숙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던 '브람스'는 생계를 돕기 위해 술집 같은 곳에서 오락음악을 연주하기도 하였지만, 1849년 두 번째 독주회 이후부터 편곡과 작곡으로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낭만주의 시대의 많은 문학작품과도 접하게 되었다.

브람스의 음악에서 첫 번째의 큰 전환기는 1853년에 있었던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 연주여행을 하면서 맞게 되었다. 그는 이 연주여행 도중 5월에 하노버에서 요셉 요하임(Joseph Joachim)과 친분을 갖게 되었고, 같은 해 9월에 뒤셀도르프에서 요아힘의 소개로,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과 그의 부인인 클라라(Clara Schumann)를 알게 되었다. 슈만 부부는 이후부터 브람스의 든든한 후원자들이 되었다. 슈만은 1853년 10월에 발간된 "음악신보"에서 "새로운 길"이라는 글을 통해 브람스의 뛰어난 음악성을 세상에 소개하였으며, 그의 부인 클라라는 그 후로 브람스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회를 통하여 소개하였다. 그리고 브람스는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Op. 1과 Op. 5를 작곡하고 출판까지 하였다. 1854년 초에 슈만이 자살을 기도한 후로 브람스는 클라라를 보살피며 1857년까지 뒤셀도르프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이어서 함부르크로 돌아가서 함부르크와 데트몰트를 오가며 데트몰트 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브람스가 두 번째로 가진 커다란 음악적 전환기는 그가 1862년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연주여행을 떠나면서부터이다. 같은 해에 그는 함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초빙되기도 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863년에는 빈 징아카데미의 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1868년까지 5년간 브람스는 빈과 함부르크를 오가며 창작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작곡한 작품으로 "독일 진혼곡"(Ein deutsches Requiem, Op. 45)이 있는데, 이 작품은 수년간에 걸쳐 브람스가 완성하였으며, 1868년 4월 이 작품이 빈에서 초연된 후 그의 명성은 드높아졌다. "독일 진혼곡"의 성공 이후 빈에 정착하게 된 '브람스'는 1872년부터 1875년까지 빈 악우회의 음악감독을 역임한 바 있으며, "헝가리 무곡"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정열적인 창작활동을 하며 작곡가로서 그리고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브람스의 작품활동 기간 가운데 전성기로 볼 수 있는 시기는 그가 빈에서 살고 있던 1876년부터 1890년경이며 이 시기에 그는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스위스 등 유럽 전역을 다니며 연주하였다. 연주여행과 더불어 그는 4개의 교향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Op. 78, 피아노 협주곡 내림나장조 그리고 현악오중주 Op. 88 등을 작곡하였다. 브람스의 음악이 전성기에 이르자 1870년대 중반부터 그의 음악세계를 따르는 음악가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게 되었고, 이들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추종자들과 음악적인 사고에서 대립하는 상황까지도 다다르게 되었다. 바그너의 음악을 따르던 음악가들로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등이었으며 특히 이들 가운데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은 브람스의 음악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브람스의 음악이 인간적이고 전통적이었다고 본다면 브루크너의 음악은 종교적인 성향이 다분한 작품을 보이고 있었다. 슈만이나 브람스가 추구하던 절대음악적인 입장을 옹호하고 나섰던 에두아르드 한스릭(Eduard Hanslick)과 같은 비평가는 형식미를 갖춘 절대음악을 주장하며 내용미로서 표제음악을 내세운 리스트, 바그너, 브루크너 등의 음악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바그너나 브루크너의 음악세계를 옹호하고 나선 학자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우구스트 암브로스(August Ambros)가 대표적이었다. 이 같이 당시의 브람스의 음악은 음악사의 흐름에 있어서 음악적 사고의 지주가 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1891년 이후부터 1896년경까지 새로운 작품을 작곡하여 발표하기보다는 이전에 작곡했던 작품들을 수정하는 작업을 주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유로 학자들은 말년에 그의 창작능력이 감퇴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에 브람스는 피아노를 위한 작품 Op. 116부터 Op. 119까지를 작곡하여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각각 몇 개의 소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깊은 음악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1895년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화려하고 의미 깊은 해이었다. 이 해에는 빈에서 브람스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예술과 과학에 대한 훈장'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그 이듬해인 1896년 5월 초 브람스는 약해진 건강으로 인하여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때마침 평생을 두고 사모해온 클라라 슈만도 죽음에 임박하게 되자 그에 따른 감정에서 "성서에 의한 4 개의 엄숙한 노래 Op. 121"을 작곡하게 된다. 이 작품이 완성된 며칠 후인 5월 20일 클라라 슈만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4세 연상의 클라라 슈만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았던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가을부터 간암으로 점점 쇠약해져갔다. 병이 심해지기 직전인 봄에 11곡의 오르간을 위한 코랄 전주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가운데 "오 세상이여, 나는 너를 작별해야만 해(O, Welt, ich muss dich lassen)"라는 작품이 그가 작곡한 최후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브람스'는 계속해서 병석에 있다가 1897년 4월 3일 오전 8시30분경 빈에서 6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유해는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고향 함부르크에선 모든 배들이 반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브람스'는 표제음악이나 오페라에 심한 적대감을 가졌으며 바그너가 주도한 신독일학파에 강력히 반대했다. 고전적 전통에 입각한 낭만적 이념으로 절대음악을 구축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대담한 화성과 강렬한 표현의 면에선 급진주의자였으나, 전통 악식부터 심지어 고대 악식까지 채용하며 음악의 형식미를 견고히 하려한 점에 있어선 보수주의자였다. 그가 작곡한 많은 성악곡과 실내악곡들도 사랑받고 있지만 4개의 교향곡과 4개의 협주곡(1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2개의 피아노 협주곡, 1개의 이중협주곡)은 특히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