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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즘 젊은이들 꿰뚫어 보는 법`

힐링&바이블센터 2006. 8. 1. 15:20
'요즘 젊은이들 꿰뚫어 보는 법'

( 2004-03-26 조선일보 )

세대차의 허상과 라이프 스타일의 심리 ①

'대한민국 사이버 신인류'의 저자인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가 '요즘 젊은이 꿰뚫어 보는 법'을 5회에 걸쳐 전해드립니다. 대통령 탄핵 정국이 온 나라를 흔들면서 세대간의 의식 차이가 이 시대의 큰 문제로 다시 한번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요즘, 황 교수를 통해 ‘요즘 젊은이’의 코드를 좀더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편집자 주)

“중학교 때 나는 날라리였다. 이때 첫 키스도 해봤다. 특히, 가출을 많이 하던 중학교 시절 소위 말하는 깡패 같은 짓도 했다. 날라리가 된 계기는 중학교 시절 한 선생님 때문이었다. 중학교 1·2학년 때 그 선생님은 정말 구타를 많이 했다. 어느 날 이유도 없이 맞는 게 너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뒤, 그 선생님이 ‘너 나와’라고 하면 안 나가고, 그럼 ‘나가’라고 하면 아예 교실을 나가 버리고, 이런 일을 반복하다 가출을 하게 됐다.”

한 사람의 불쌍한 인생유전을 듣는 듯 하다. 한편으로 한 교사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이야기일까? 이것은 가수 서태지가 스스로 털어놓은 중학교 시절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이런 고백에 대해 놀란 사람은 서태지가 아니라 사회자와 방청석의 다른 출연자였다는 것이다.

“(서태지가 돈을 빼앗다는 것이) 상상이 잘 안 간다”고 놀란 표정을 짓고, 급하게 ‘돈을 빼앗긴 학생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말로 개그 상황을 만들었다. 나중에 그 방송사의 고위 관계자는 “서태지의 가출 건과 날라리 시절 일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편집 여부를 제작진과 상의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은 이 사건의 백미이다. 서태지는 정작 하나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서태지는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세대 차’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란이다.

한국 사회에서 ‘세대간의 차이’가 뚜렷하게 부각된 것은 2002년 대선 이후이다. ‘참여정부’의 핵심 인물들은 전에는 주변부에 머물렀던 소위 ‘386 세대’ 젊은이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정치·사회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기성세대가 참여는커녕 배제되고 있다는 소외감과 불만을 느끼고 그것을 세대갈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전까지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되었던 ‘지역갈등’ 대신에 ‘세대 갈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느끼는 세대차는 10년 전에 서태지가 ‘난 알아요!’라는 요상한 노래로 등장하였을 때, 우리 사회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트롯트와 발라드로 양분되었던 가요 시장에서 서태지는 ‘랩’이라는 완전히 다른 상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다.

서태지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잘 몰랐지만, 뭔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것은 그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아이돌 가수’와 ‘랩’ 열풍의 서곡이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경험하는 대중문화의 변화이자 '새로운 것'과 ‘다른 것’에 대한 대표적인 이미지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우리사회에서 기성세대와 젊은이의 차이처럼 부각된 것이다.

사람들은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에 대해 그리 편안해 하지 않는다.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처럼 가능한 서로 한 배를 탄 심정으로 차이가 없거나 서로 비슷하다는 동류 의식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 행동 방식이었다.

이것을 한국인의 패거리 문화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차이란 불편하게 느끼거나 아예 무시한다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차이란 항상 한국과 미국, 또는 일본과 같이 외국과 비교할 때나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외국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차이는 점점 엷어지게 만들었고, 이전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사이의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집단 내의 개인간 차이가 집단간의 차이보다 더 부각된 것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물리적인 차이가 아닌 각자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에서의 차이 말이다. 지금까지 서로 비슷하다는 믿음으로 잘 살아 왔지만, 이제 이 믿음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느 문필가는 이런 차이를 우리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이자 위기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르면 적이라도 된단 말인가? 서로 비슷해야 하고, 서로 가능한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서로 잘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차이가 불편하게만 받아들여졌던 시대에는 서로 다르면 적이었다. 사람들은 처음 만났을 때, 나이를 묻고, 고향을 묻고, 또 출신 학교를 물어야 했다. 그것도 안되면 어디 서로 공통으로 아는 사람 없나 묻는 행동들을 거의 강박적으로 하면서 서로가 가진 ‘차이’를 두려워하고 그 차이를 줄이려고 했다.

강박적으로 차이를 해소하려는 심리의 표현이었다. 하나라도 통하기만 하면 이제는 적이 아닌 친구나 가족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믿음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태생적 차이를 유발하게 만드는 모든 것, 예를 들면 ‘지역 차‘, ’성차‘, ’학교차‘ 등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고, 또 없애 버렸다고 한다.

적어도 겉으로 보여지는 차이, 출신 지역, 학교에 따라 구분되는 차이에 따른 차별은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좋은 학교 나오고 성공한 사람‘도 그렇게 잘 난 사람이 아니고, ’못 배우고 별 볼일 없어도‘ 그렇게 못난 사람이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세대 차이‘를 이야기하게 되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세대 차이는 항상 ‘철부지 젊은이’와 ‘보수적인 기성세대’라는 이분법적 구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무엇이, 왜 어떤 사람을 ‘젊은 철부지’로 또는 ‘갑갑한 기성세대’로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그냥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그냥, 나는 젊으니까, 나는 나이가 얼마되니까, 어느 쪽에 속할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철부지‘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새로운 사고와 개혁 성향은 나이와 관계없이 나타난다. 또 ’갑갑한 기성세대‘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전통과 규범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역시 나이와는 관계가 없다.

인간의 경우, 나이를 먹음에 따라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조금씩 줄어들고 자신이 과거에 학습했던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경향성은 증가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이를 먹으면서 마치 온도계 눈금 올라가듯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수구 보수 20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듯이, 개혁 진보의 60대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세대의 차이는 단순히 기성세대와 젊은이들의 차이가 아니다. 그리고, 세대 갈등도 연령 집단에 따른 집단간의 대립이 아니다. 세대 차이는 그냥 나이로, 그냥 출신 지역으로, 그냥 출신 학교로 서로 비슷하고 또 서로 비슷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의 차이가 겉으로 보이는 기준이 아닌 각 사람의 성향과 생각, 그리고 생활 방식의 차이에 의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는 ‘모두 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대’ 그리고 ‘일단 돈벌고 출세하면 된다고 믿었던 시대’에서는 뚜렷하지 않았던 심리였다.

하지만, 이제 각자가 자신의 살 길을 찾으려고 하고 또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나 만의 기준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내가 느끼고 내가 구분하는 어떤 기준에 의해 남과 다르게 표현하려는 성향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에 대해 각기 다르게 반응하고 표현하는 행동으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개인의 심리적 성향 또는 라이프스타일에 의한 차이이다. 다양한 집단 속의 다양한 사람들이 가진 심리적 차이를 ‘세대차‘라는 연령 집단간 차이로 성급히 구분해 버린 것이다. 결국, 기성세대와 젊은이의 차이는 우리 모두가 심리적으로 느끼는 이미지의 차이가 되었다.

(황상민·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대한민국 사이버 신인류’ 저자)

출처 : † 세계제일교회 †
글쓴이 : 띠띠빵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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