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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통적인 교육목회방식을 통한 청년부 부흥

힐링&바이블센터 2006. 8. 1. 15:17
전통적인 교육목회방식을 통한 청년부 부흥

박용진 목사(안양제일교회)


1.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

교회마다 청년들 때문에 걱정이 많다. 청년들이 무슨 말썽을 일으켜서가 아니라 앞으로 교회를 지켜나가야 할 청년들이 교회에 남아있기를 싫어하고 점점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년의 수는 천여명이 넘어가는 중대형교회 중에도 청년들의 회집인원은 고작 50명도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청년이 없는 교회는 미래가 없는 교회이다. 청년부가 침체된 교회들마다 좌불안석이다. 왜 청년들이 교회에 모이지 않는지에 대한 염려의 목소리는 무성하지만 시원한 대안이 없다. 청년들을 잘 대해주면 모여들지 않을까? 혹은 전담 교역자를 붙여주면 부흥하지 않을까? 고 대책을 모색해보지만 여간해서 청년부가 살아나 주지 않는다. 청년부의 회복은 그런 단순한 몇가지 수술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가장 세련된 목회스타일과 과감한 투자, 그리고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목회전략이 종합적으로 구사될 때 가능한 일이다. 물론 그 뒤에는 담임목사의 관심과 청년담당목사의 역량이 뒤받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어떤면에서 장년목회보다 훨씬 어렵고 인내를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번 청년들과 가까워 지려고 시도해 보라. 어른보다 몇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조금만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면 언제라도 교회를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그렇다고 교회가 대학이나 직장처럼 그들을 붙들어매고 강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청년들 스스로가 교회에 찾아 들어오도록 해야만 한다. 자신들이 교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교회의 구조를 긍정하고, 교회 안에서 새로운 소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들에게 신앙적 매력을 주는 교회만이 청년부가 부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 한가지는 제자훈련이나 양육훈련을 통해 많은 청년이 모였는데 결혼후에는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 청년예배의 회집인원이 수백명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몇해가 지나도 장년부인원은 늘 그대로이다. 진급이 않되고 청년부만 졸업하면 다른 교회로 가든지 혹은 선교단체로 가는 경우이다. 청년부의 영성과 장년부의 영성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교회는 " 아무교회나 가면 어떠냐? 우리는 한국교회에 교인을 양육공급하는 사명이 있다 "고 자위해 보지만 교회부흥에 직접적인 기여도가 없는 청년부라면 아무래도 궁색하다. 길러서 남갖다 주기만 한다면 수고하고 애쓴 그 교회는 아무 득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인가? 청년부가 부흥하고 그 힘이 넘쳐서 장년부도 부흥하는 그런 교회일 수는 없을까? 교회가 청년들에 관심을 두는 일차적인 목적에도 부합하고 활기찬 미래교회의 모습을 위해서도 그렇다. 따라서 우리실정에 맞는 청년부 성장모델이 있어야 한다. 그 모델은 장년의 신앙가치를 긍정하고 전수받는 청년부 성장이어야 하며 동시에 성숙한 신앙인격을 목표로 하는 전인적인 목회방식이어야 한다.


2. 신토불이 청년부, 교회체질에 맞는 청년부 부흥

" 청년회와 청년부의 차이는 무엇일까? " 청년회는 자치회이며 청년부는 교육부서이다. 어떤교회는 청년회라 부르고 어떤 교회는 청년부라 부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년의 부흥과 성장은 강력한 목회가 미칠 수 있는 교육목회 구조여야 한다. 청년회는 목회적 마인드보다는 회원간의 친목과 봉사를 추구하는 친교적마인드가 우선될 수 밖에 없다. 목회자도 지도목사로서 단순한 지원에 그친다. 청년회의 살림도 청년들끼리 자율적으로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청년부의 부흥은 언제나 강력한 목회자의 리더쉽이 발휘되는 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아무리 유능한 청년들이 모여있어도, 혹은 청년들이 제자훈련을 다 받았다해도 목회자보다 더 유능할 수 는 없다.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도 목회자는 목회적으로 고민한다. 따라서 지금보다 더 깊이 청년목회가 이루어 진다면 어떤교회 청년부든 살아날 수 있다. 이것은 평신도의 권한을 빼앗자는 말이 아니다. 방관자의 자리에서 목자의 자리로 되돌아가자는 말이다. 목회중심 청년부가 되면 청년들은 더욱 바빠지고 일도, 책임도 많아진다. 그러나 청년들끼리 살림하던 때와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우선 방향이 달라진 다. 그러나 결과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어떤 교회든 목회자의 생각 이상으로 자라는 교회는 많지 않다. 봉사도 그렇고, 부흥도 그렇다.

지금부터 제안하고자 하는 청년부 성장모델은 전통적인 목회방식을 통한 부흥전략이다. 청년을 교회에 많이 끌어들이려면 무언가 획기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는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갑자기 제자훈련을 도입하거나 대학생 선교단체의 양육방식을 차용하거나 기도원식의 신유나 안수로 불을 붙이거나 심지어 다락방식의 전도훈련 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청년부의 역사나 체질로 볼 때, 소화하기 힘든 요소가 많다고 사료된다. 그래서 일시적인 부흥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또 빨리 사그라지는 조루현상이 되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또 기존의 목회마인드와 충돌을 빚기도 한다. 청년부를 맡아본 지도자들은 다 알겠지만 교회 청년부에 나오는 청년들의 특성은 선교단체 대학생들이나 신유단체 교인들과는 사뭇 다른 점이 많다. 그들의 특성에 맞는 교육적 의도의 청년목회가 베풀어져야만 청년부의 건강한 부흥이 가능해진다.


3. 청년은 고민한다. 교회청년의 현주소

제직의 자녀로 교회청년부에 출석하지 않던 한 대학생이 어느날 청년부에 찾아왔다. 그는 교회청년들이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으며 신앙생활도 규모가 없어서 교회에 나올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몇 년간 대단히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제자훈련도 오랬동안 받았던 학생이었다. 그래서 부모가 본 교회의 집사였지만 교회청년부에 대해서는 늘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 교회청년부를 찾아온 것은 대학생 선교단체가 지니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기인하였다. 또 현실생활과 캠퍼스라는 제한된 공간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도 한 몫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해서 대학생들만을 바라보며 사회생활을 포기한채 평신도선교사로서 활동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거기에 계속되는 부모의 출석권유로 그는 교회청년부에서 새로운 소명을 찾기로 하고 스스로 청년부예배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해동안 모든 예배와 기도회, 크고 작은 모임과 프로그램에 한번도 빠짐없이 철저히 참석했으며 그 후 정기총회때 청년부회장으로 당당히 당선되었다. 오래 다닌 청년들을 모두 제치고 말이다. 청년부 회장임기 동안 그는 매우 훌륭한 회장이었으며 탁월한 리더쉽으로 청년부를 복음중심의 내실있는 청년부로 올려 놓았다. 필자는 그에게 목회자의 길을 권유했으며 현재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이청년의 고민이 한국교회 청년부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기존교회의 청년부를 들여다보면 부모가 그 교회를 다니고 있는 제직의자녀들인 경우가 많다. 그런 청년부는 구심력이 강해서 끼리끼리 모여 친목하는 일은 잘해도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이거나 대외적인 선교, 봉사활동에는 대단히 소극적이다. 때로는 목회자의 지도마져 거부하기도하고 선후배의 전통을 우선하려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소모적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청년이 들어와도 이런 분위기에 좀체로 적응하지 못하여 떠날때가 많다. 이런 청년부가 부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듯이 청년부가 부흥하지 않는 책임도 청년부 담당교역자에게 있다. 목회란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일이다. 목자가 양떼의 뒤만 졸졸 따라 다녀서는 목양이 이루어질 수 없다. 앞장서서 이끌어야 한다. 양들을 얼?br>떳매?실한 양으로 키울지에 대한 비젼도 있어야 하고 어떤 풀을 뜯어먹게 할 것인지에 대한 복안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못된 양이나 이리 같은 방해꾼과 맞서 싸울 각오도 해야 한다. 물론 한 마리 한 마리 양떼를 위해 밤새 기도하고 지키는 수고도 마다해서는 않된다. 아무리 구심력이 강한 청년부라도 이런 목회자와 만나면 살아날 수 밖에 없다. 우선 교회청년들이 지닌 잠재능력이다. 사실 구심력이 강하다는 것은 목회에 방해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대단히 유익한 점이 될 수도 있다. 구심력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안정감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은 거의 평생토록 그 교회에서 생활할 사람들이다. 젊은 시절의 신앙적 방황만 보고 그들의 실력을 과소평가 해서는 않된다. 교회의 장로, 권사가 되어 끝까지 교회를 지키는 사람도 사실 그들이다. 목회자는 그들에게 어떻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구습의 껍질에 갇혀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는 그들에게 신선한 영적자극을 주어야 한다. 신앙생활속에서 새로운 기쁨과 보람만 맛보게 해주면 그들은 스스로 놀랄 만큼 많은 능력을 발휘하는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청년들이 襤嗤?틀 수 있는 열린공간도 필요하다. 그들이 소명을 느끼고 헌신할 수 있도록 구조변화도 모색해줘야 한다. 그래서 청년부의 부흥은 교육목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교육적의도가 짙게 깔린 목회가 청년들을 살아나게 하는 가장 건강하고 정직한 방법인 것이다. 에릭슨(E.Erickson)은 청년시기에 이루어야 할 과업, 즉 인생의 성숙도를 자기완성과 친밀감이라고 했다. 자기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시기라는 말이다. 청년목회는 이러한 청년들의 신앙인격의 성숙이라는 대명제를 전제하고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사람앞에 지혜가 자라는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모이기에 힘씀으로 인해 청년부 부흥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본 교회에서 지난 2년간 시행해온 몇가지 목회방법을 소개함으로써 교육목회를 통한 청년부 부흥전략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었으며 동시에 승리였다. 최상의 경건예배, 재정의 독립채산제, 지파별선교훈련, 강력한 헌금교육, 자율적GBS, 지도교사제, 효과적 시상제, 군대간 청년관리, 청년수첩(정보공유)등을 중심으로 설명코져한다.


4. 예배가 살아야 청년이 산다. 최상의 경건예배

청년부가 부흥하려면 예배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예배없이 부흥없다. 하지만 이 평범하고도 간단한 진리가 현장에서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청년부를 처음 맡았을 때의 청년부 예배는 그야말로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토요일 오후 7시에 드리고 있던 예배에는 30여명쯤 참석하고 있었고 예배형식도 찬양예배라 해서 찬양리더가 인도하였다. 찬양도중 5분가량 지도목사가 설교를 하는 정도였으며 헌금시간도 없고 다만 월회비를 걷어 재정을 마련하고 있었다. 2부순서로 성경공부가 이어졌는데 선배청년이 인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년들 스스로 자기들의 예배를 예배라 하지 않고 집회라고 불렀다. 지금은 감성목회시대다. 이미지에 호소하는 메시지와 목회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마다 열린예배, 혹은 찬양예배등이 성황중이다. 하지만 이것도 내용과 형식을 제대로 갖춰야한다. 모양만 따와서는 오히려 예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청년들이 예배라는 정상적인 은혜의 통로가 있음에도 예배를 통해서 은혜받기보다는 뭔가 색다르고 감성적인 행사나 순서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려고 덤빌 때 목회자로서 가장 암담하다. 필자가 가장 먼저 손댄 것이 바로 이 예배였다. 예배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시간을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어떤 변화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주일 오후2시로 예배시간을 바꿨다. 형식도 찬양예배를 폐지하고 경건예배로 바꾸었다. 물론 청년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교회학교 부장들까지 반대해왔다. 주일교사봉사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끊질기게 설득해 나갔으며 결국은 모두가 동의해 주었다. 청년부의 주일예배는 그동안 토요집회에 참석하지 않던 많은 청년들을 예배에 끌어들였다. 청년성가대도 조직되었다. 출석 및 헌금카드도 제작되었다. 장소도 가장 쾌적하고 좋은 곳으로 정했다. 많은 비용이 지출되었지만 예배때마다 꽃꽂이도 풍성하게 했다. 예배 10분전에는 조용한 찬양곡을 틀어주어 기도할 수 있게 했으며 예배를 위해 많은 정성이 쏟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배순서도 친교의 시간과 함께 통성으로 중보기도하는 순서를 빼고는 장년부 대예배와 똑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이것이 우리의 예배라고 강조했다. 이 예배를 사랑하고 더더욱 최상의 것으로 드리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요 신앙이라고 역설했다. 당장 회집인원이 두배로 늘었으며 헌금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분위기만 좋고 메시지가 약하면 부흥은 실패한다. 그래서 한편의 설교를 위해서 오랜 시간 골방에서 씨름했으며 스스로 눈물을 흘리며 설교원고를 작성했던 때도 많았다. 청년부 부흥의 비밀은 예배속에 있다. 예배를 통해 은혜받고 감동하면 청년들은 스스로 찾아들게 되어있다.


5.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강력한 헌금교육

짧은 목회경력을 통해 헌금에 대해 깨달은 바가 한가지 있다. 헌금을 잘내게 하면 교인의 신앙도 많이 자란다는 점이다. 주님께서도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셨다. 사실 헌금과 헌물은 개인신앙의 산물이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다녀도 믿음이 없으면 절대 실일조하지 못한다. 십일조는 한두번 내고 마는 기부금이 아니다. 평생토록 하는 것이므로 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오래 교회를 다녀도 십일조를 못하고 늘 감사헌금만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청년들은 순수하여 십일조를 가르치면 오히려 잘한다. 사실 청년시절에 배운 신앙생활로 평생을 써먹는 경우가 뭅? 청년부에서 십일조를 못배우면 결혼하고 나이들어도 십일조를 하지 못한다. 십일조가 헌금의 표준인 점을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토요집회 시절의 월회비를 폐지하고 십일조와 감사헌금, 생일헌금, 절기헌금등을 강력히 시행하였다. 개인별 주정헌금카드를 만들어 매주 사용하게 하였다. 출석도 확인할겸 도움이 되는 점이 많았다. 그리고 설교시간이나 사석(私席)을 가리지 않고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하라고 외쳤다. 심지어 자신의 졸업식을 해도 감사헌금을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헌금을 드리게 했다. 어떤청년은 주일하루에 세 번씩 헌금하는 청년도 있었다. 대예배, 주일학교예배, 청년부예배.... 이쯤되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 같지만 헌금에 관해서는 불만을 터트리는 청년은 지금까지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태도였다. 추석이나 설이 지나고 나면 세배돈 때문인지 십일조가 엄청나게 쏟아지기도 했다. 청년부의 곡간은 나날이 풍성해져서 돈이 남아 돌았으며 어디에 써야할지를 몰라 고민을 할 정도였다. 순수한 청년의 시절에 헌금을 잘 가르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는 가르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욱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그결과 한해만에 교회학교 부서중 가장 예산이 작은 부서에서 가장예산이 많은 부서로 바뀌고 말았다. 그해 결산은 2천만원이 넘었다. 80명 청년들이 드린 예물치고는 큰 액수였다. 그렇게 헌금이 모아지니 비용의 부담없이 각종 전도나 선교행사를 과감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6. 청년부 돈주머니에 자유를 주라, 재정의 독립채산제

필자의 교회는 모든 교회학교가 재정의 독립채산제를 시행하고 있다. 즉 교육부서가 예배를 통해 모아진 헌금은 교회재정부에 올려 보내지 않고 자체부서의 교육행사경비로 사용한다. 물론 일년간 해당부서가 교회로부터 받는 교육보조금도 있다. 그래서 각 교육부서마다 수입원이 늘 두가지다. 하나는 교회재정부에서 타다쓰는 교육보조금이며 다른 하나는 자체헌금이다. 그밖에 찬조금 수입도 조금 있다. 제도환경이 이렇다보니 부서마다 헌금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교사, 학생을 가리지 않고 힘껏 헌금을 한다. 교사들은 대예배때 헌금을 하고 학생예배때 또 한번 헌금한다. 물론 교사의 십일조는 대예배때만 드린다. 학생들은 자기 예배 때 십일조를 한다. 하지만 이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교사는 거의 없다. 교육부서 교역자들도 부서재정에 책임을 느끼고 헌금교육을 자주한다. 교육전도사지만 헌금에 관해서는 단독목회하는 심정이 된다. 이 제도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교회학교 부흥에 상당히 유리한 점이 많다. 먼저 교사들이 예산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일이 없다. 행사때 경비가 부족하면 합심기도 한번하고 교사들부터 특별헌금을 하면 된다. 또 '예산 때문에 행사를 축소하지 않아도 된다. 예산액수에 묶여 교육행사가 진행되다보면 아무래도 자유롭지 못하다. 교회학교가 이처럼 자치를 누리다보니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감시할 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교육부서들의 재정감사만을 전담하는 교육본부라는 상설부서가 있다. 일년에 4차례 재정감사를 할 뿐만 아니라 재정부예산을 각부서가 타가려면 반드시 교육본부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 청년부의 헌금이 계속 쌓여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재정에 관한 제도환경이 구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재정의 독립채산체는 청년부자체의 경비를 사옹함에 있어서도 적용하였다. 청년들을 모두 열두지파로 나누고 각지파마다 지파장과 회계를 선출토록했다. 그리고 각지파는 스스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으며 일년동안 지파별로 할당된 예산과 자체회비를 걷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위에 지도교사의 찬조금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 감사기능을 청년부임원회가 맡도록 했다. 지파가 예산을 타가려면 청년부회장과 청년부 부장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 재정을 독립시켜주면 조직의 자율성이 살아나 뜻밖의 성과를 거두는 경우가 많다. 청년들은 지파별로 M.T나 전도행사 혹은 고아원?br>疫?樗?자체적으로 시행하면서 자율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7. 일감이 있어야 공부도 한다. 지파별선교훈련(일하는 청년들)

청년부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한다. 하지만 후원교회나 선교지를 가지고 있는 청년부는 많지 않다. 어떤 청년은 4년동안 청년부에서 성경공부를 했지만 개척교회를 방문해보거나 교회밖에 나가 봉사해 본 경험이 한번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성경을 공부했단 말인가?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였나? 아니면 친교 프로그램의 하나였나? 교회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일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을 공부했으면 적어도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는 일꾼이 나와야 한다. 학자연(學者然)하며 성경적지식의 수려함만을 자랑하는 건 성경공부의 목적과 맞지 않다. 머리는 크지만 손발이 자라지 않은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필자는 청년부임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지도자인 지파장을 선출토록했다. 그리고 모든 회원을 열두지파로 나누어 놓았다. 예산의 자유를 주었고 사업의 자유도 주었다. 하지만 한 지파가 꼭 한곳의 선교후원지를 돕도록 책임을 맡겼다. 이에 따라 청년부안에 열두곳의후원교회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해외선교사, 농촌교회, 개척교회, 장애인교회등이 골고루 포함되었다. 예배때와 지파별 성경공부시간에 선교지를 위해 중보기도하게 했으며 지파단독으로 후원교회를 어떻게 도울것인지 연구시행토록 했다. 이것이 모아진 헌금을 사용할 필자의 복안이었다. 그래서 일년에 세차례 열두선교지에 20만원씩 송금하였으며 지파별로 선교지와 서신교환을 하며 의류, 도서등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도록 했다. 이일에는 지도교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하다보니 일년예산중 거의 절반이 다른교회를 돕는 일에 사용되었다. 한 줌의 청년들이 한 일로는 대단한 일이었다. 불과 일년전의 청년회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청년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이루어 논 성과에 놀라워했다. 청년들은 예배시간에 선교지에서 온 편지를 읽었으며 성경공부시간에도 후원교회를 도울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성경공부는 삶과 맞물리면서 치열한 영적전투가 되어갔다. 지파들은 일꾼의 부족을 느끼고 새로운 지파회원 확보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새로나온 청년들도 각자의 일감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빨리 자기자리를 만들어 갔다. 그래서 필자는 또 하나의 목회적진리를 깨우쳤다. "청년부를 부흥시키려면 미칠곳을 만들어 주라"


8. 청년부흥의 가교(架橋), 지도교사제(자율적GBS)

청년부에 지도교사가 필요한가에 대한 논란이 많다. 필자의 입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쪽이다. 왜냐하면 청년들에게도 구역장 같은 신앙적인 지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역장은 목회자의 일을 구역식구들에게 대신 행하는 작은 목회자이다. 목사 한사람이 수 많은 교인에게 다 목회적 돌봄을 베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앙의 본이 되고 지도력을 갖춘이를 동네마다 세워 구역장으로서 그일을 대신 하도록 한다. 구역장도 제대로 하려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구역식구들의 경조사에 다 뛰어 다녀야 하고 이단들의 유혹에서 교인을 지켜야 한다. 또 구역예배를 책임져야 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도 해야한다. 구역식구들이 주일성수를 잘하는지 체크하여 권면하는 것도 구역장의 몫이다. 그래서 구역식구들에게는 목회자 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구역장이 훨씬 가깝고 어려운 상대이기도 하다. 필자의 생각은 교회학교 교사는 학교나 학원의 교사보다는 구역장의 역할에 훨씬 가깝다고 본다. 청년들 중에는 이미 교사나 성가대로 봉사하고 성인으로 역량이 충분하지만 이들 역시 목회적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 돌봄의 책임은 청년부 지도목사에게 있지만 그 돌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교사들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처음에 청년부로 교사를 대거 영입할 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실제로 성경공부를 누가 인도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청년들 쪽에서 교사를 더욱 요청하게 되었다. 이처럼 방대해진 살림을 꾸려가려면 청년들만으로는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또한 주일마다 자기를 반겨주고 경조사때 찾아와 주고 풍부한 인생경험을 토대로 신앙지도를 해주는 교사들의 필요를 그들이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년들은 지파 지도교사에게서 구역장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현재 청년부교사는 20명이다. 그래서 성경공부는 지파별로 자율로 실시하고 있다. 교재도 그렇고 진행방식도 그렇다. 교사가 인도하는 지파도 있고 학생들이 발제식으로 하는 지파도 있다. 성경암송을 포함한 기초 성경공부를 하는 지파도 있고 토론위주의 공부를 하는 지파도 있다. 물론 모든 교재는 지도목사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주로 선생님의 능력에 따라 성경공부의 활성화가 달려 있다. 하지만 교사의 능력은 성경공부보다는 일감을 지도해 줄 때 잘 드러난다.


9. 청년도 상받고 싶다. 효과적 시상제

시상이란 교육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일종의 "강화"이다. 바람직한 행동에 대해 자극을 주어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상과 벌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상이 강화시켜 주는 것이라면 벌은 억제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벌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상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시상의 본질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시상은 효과를 보자고 시행하는 것이다. 효과없는 상이라면 이미 상이 아니다. 교회에서 상을 줄 때 정말 가지고 싶은 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면 예산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전도상이나 출석상을 줄 때 흔히 소모적인 학용품을, 그것도 빈번히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효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청년들도 예외가 아니다. 자극이 될만한 상이어야 시상의 가치가 있다. 필자는 청년들에게 일년에 두차례 전도주일을 지키게 한다. 그리고 개인상과 지파별 단체상을 정해 시상을 하는데 보통, 카세트녹음기, 통키타, 룩색, 구두상품권등 청년들이 평소 가지고 싶지만 고가여서 쉽게 구입하기 어려운 물건들을 선택한다. 물론 예산으로 선물을 사는 법도 없다. 교사들이 한가지씩 찬조해 준다. 그 중 가장 고가의 상품은 필자가 냈다. 1월 첫째주에 주는 개근상과 주보모음상도 동일하다. 그외에 연중에 주는 상은 없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필자의 신념은 교회에서 가장 큰 상을 받을 사람은 역시 전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년 내내 자체 경비로 수많은 예산이 소모되는걸 생각할 때 청년 하나라도 더 전도한 사람에게는 그 보다 더 큰 선물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이런 시상을 걸고 청년전도주일을 지키자 한주에 200명이 나온 주일도 있었다. 이런 봄가을의 전도주일을 통해서 이듬해 평균 출석은 120명이 되었다. 물론 헌금도 더 많이 쏟아져 나왔다.


10. 나도 회원, 군에간 청년관리

군에간 청년들은 흔히 청년부에서 잊혀지기 쉽다. 하지만 필자의 교회는 군대가면 오히려

대접을 받는다. 예배순서중 "성도의 교제"시간이 되면 매주일 군에서 휴가나온 사람이나 새로나온 청년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자신이 직접 인사토록 하고 있다. 한달에 한번씩 휴가 나오는 청년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자신이 직접 인사토록 하고 있다. 한달에 한번씩 휴가 나오는 청년이라도 매주 인사를 시킨다. 그래서 군에서 휴가 나온 청년은 예배에 참석해서 회원들에게 인사해야 하는 줄로 안다. 짧게 깍은 머리, 깜해진 얼굴로 다시 청년들앞에 서면 피차 진지해지고 감격스러워한다. 그리고 매주 봉헌기도시간에 군에간 형제들을 위한 기도를 빼지 않는다. 군에가도 청년부 회원이다. 그래서 매주일 주보에 나오는 회원명단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연말이 되면 지파별로 위문품도 만들어 보내고 면회를 가기도 한다. 모든건 늘 지파별로 이루어 진다. 임원회는 최상의 예배와 전체행사에만 매달린다. 복지문제는 늘 지파장의 몫이다. 인원은 작지만 지파하나가 작은 청년회 하나와 맞먹은 역량을 가지고 있다. 중간지도자를 잘 길러 놓으면 좋은 점이 많다. 지파장들과 임원들의 교육은 전적으로 필자가 맡는다. 그래서 지파장기도회는 수시로 모인다. 군에간 청년들은 생애 처음으로 고된 인생훈련을 겪기 때문에 어느때보다 신앙이 크게 자랄 수 있는 호기회다. 그래서 지파별로 주보와 청년신문(자체발행)을 보내준다. 그들이 제대할 때까지 계속해서 청년부와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게 되는데 이들이 제대해서 돌아오면 매우 유능한 청년리더들이 된다. 한 청년은 청년예배때 제대신고를 하면서 군복무기간 내내 청년부가 보여준 사랑 때문에 어려움을 잘 이기고 올 수 있었노라고 보고를 하여 눈물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군에간 청년들, 그들도 목회대상에서 제외시켜서는 않된다.


11. 정보는 나눠야 힘, 청년수첩(정보공유)

끝으로 청년수첩에 대해 말하고져 한다. 청년수첩은 신학교시절 사진수첩에서 힌트를 얻었다. 21세기는 정보를 누가 소유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목회의 정보도 서로 흘러야 도움이 된다. 청년부의 정보라야 재정과 인사뿐이다. 그 중 회원들의 인적사항은 서로 많이 알려질수록 친교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교회는 성격상 페쇄조직이 아니라 공개조직이다.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 만큼 친교에 유리하다는 말이다. 청년들은 서로간의 신상에 대해 관심이 많으면서도 잘 묻지 못한다. 청년중에는 대학생, 재수생, 직장인, 군인 등 서로 신분상의 차이가 많아 자칫 위화감이 조성될 우려가 있다. 사귀기도 잘하지만 상처도 쉽게 받는다. 그래서 연초에 모든 청년들의 사진과 신상기록과 회칙, 행사등을 담아 다이어리형 청년수첩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이어서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청년들은 의외로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애독하는 재산목록 1호다. 그 안에는 생년월일, 세례여부, 주소, 전화, 이동통신번호, 학교학과와 근무처도 명기해 놓았다. 심지어는 부모 형제의 이름과 교회를 다니는지 여부까지 상세히 수록해 놓았다. 공식적으로 교적부를 완전히 공개해 놓은 거나 마찬가지다. 청년들이 집집마다 수첩을 잘 보관하고 있지만 실상은 부모들이 더 애독하는 편이다. 교회에서 사진 수첩을 꺼내 들여다 보는 청년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역시 책임을 맡은 지파장들이다. 결석한 지파회원에게 삐삐심방이나 엽서를 보낼 때 매우 편리하기 때문이다. 또 세월이 지난 후에도 볼 수 있어 좋은 점이 많다. 단 비용이 많이 드는게 흠이지만 만들어만 놓으면 여러로로 도움을 준다.


12. 맺는말

지금까지 필자가 지난 2년간 벌여온 청년목회의 치열한 기록들을 두서 없이 나열하였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부흥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영마인드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목회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개인과 만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일이다. 쉐릴(Lewis. J.Sherrill)은 "만남의 기독교교육"(The Gift of Power)에 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속에서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 진다"했다. 청년부 부흥을 위해 청년부들과 수없는 시간을 고민하며 씨름하면서 늘 마음이 쓰였던 것은 혹 청년들을 섬기는 종이 아니라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비춰질까봐 많이 염려했다. 사안에 따라서는 다른이의의견을 무시하고 오직 목회적 신념만을 밀고 나가야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필자가 늘 견지했던 바는 청년들과 복음이 직접 맞닥뜨릴 수 있도록 목회를 하는 것이었다. 양적 부흥도 부흥이지만 신앙인격의 성숙이라는 교육적 목적이 동시에 수반되는 청년부 성장이어야 했기에 더욱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청년하나 잘 키워 놓으면 교회하나 짓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당백을 하는 신앙인이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는 목회인가 말이다. 또 전통적인 목회방식속에도 신세대를 휘어잡을 수 있는 훌륭한 목회방식이 많다. 복음이 본래 사람을 바꾸고 살려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에게 복음을 맛볼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고 청년의 정열이 복음안에서 살아 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이것은 청년을 맡은 목회자의 책임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청년에 대한 부단한 연구와 생명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 복음전파에 대한 심각한 소명도 물론이다. 다만 당장 어떻게 해보겠다는 조급함과 뜻없는 패배감만 극복한다면 청년부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출처 : † 세계제일교회 †
글쓴이 : 띠띠빵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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