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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게슈탈트 치료

힐링&바이블센터 2006. 7. 31. 21:29

1936년 43세의 정신분석가 프리츠 펄스(Fritz Perls, 1893∼1970)는 오랫동안 기대해오던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만나기 위해서 남아프리카로부터 4,000마일이나 여행을 했다. 같은 해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개최되었던 정신분석학 연차대회가 그 계기였던 것이다. 펄스는 이 여행과 그가 발표하려는 논문에 대해서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논문이 정신분석학계에 공헌을 하고 심지어는 정신분석학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믿었고, 그의 동료들이 이 논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그 행사는 펄스에게 있어서 모욕적인 불행한 사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논문은 시시하게 받아들여졌고 그의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정통파 정신분석학계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한 때 펄스의 분석가이기도 했고 도움도 많이 주었던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gh)는 펄스의 출석조차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정신적인 타격은 바로 프로이드 그 사람 때문이었다.

펄스는 프로이드의 방 문턱도 넘어서지 못했다. 프로이드에게 그가 먼 남아프리카에서 프로이드 당신을 만나러 왔노라고 말하자 프로이드는 "그래, 당신은 언제 돌아갈거요?"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펄스는 상처받고 수치스러워진 얼굴로, 처절하고 힐책받은 느낌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은 곧 분노로 변했다. 그는 그 연차대회를 떠나면서 한가지 결심을 했다. "어디 두고 봅시다.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소."

프로이드와의 만남은 펄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펄스의 딸은 펄스가 그 연차대회에서 "아주 달라진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펄스에게 있어서는 그의 전문직에 대해서나 그의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 전적(全的)인 재교육(再敎育)이었던 것이다. 그는 "평범한 정신분석가(mediocre psychioanalyst; 그가 그 자신을 지칭한 표현)"로부터 새로운 정신치료법과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철학의 정열적인 발의자(發議者)로 변모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사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했고 그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일들을 자기 스스로 실천하는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억압되었던 정신분석학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모두 그를 압도할 정도로 명확하게 떠올랐다. 이제는 자각(自覺)할 시기였다. 그는 이전의 신념을 버리고 나서야 과거에 자신을 지배해오던 압박으로부터 갑자기 자유스러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자기 자신 이외의 외부자원(外部資源)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은 예전에 자기가 사용하던 영적ㅗ도덕적ㅗ지적 체계에 의지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게슈탈트 치료법(Gestalt Therpy)의 정수(精髓)를 다음과 같이 인식하여 표현하였다. 즉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이후로 펄스는 진정으로 그렇게 이행했다. 그는 프로이드식의 정신분석가로서 자기 직업을 동일시(同一視)했던 의식에서도, 또 가족과의 밀접한 관계에서도 벗어났다. 펄스와 그의 아내(역시 정신분석가)는 요하네스버그(Johanesburg)에서 하인들과 보모와 하녀와 정구장, 수영장, 사설 스케이트장까지 갖추어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1935년 독일에서 피신하여 네덜란드에 와서 자선금으로 겨우 살아오던, 무일푼이었던 그들의 생활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첫 정신분석가로서 펄스의 정신분석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따라서 중류층의 물질적 성공이 가져야 하는 모든 조건을 충분히 구비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비참한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다른 각도로 그의 성공을 보게 되었다. "나는 가족, 집, 하인들, 그리고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전형적인 틀 안에서 훌륭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일과 오락 사이의 양분화(兩分化) 속에 얽매어 월요일부터 금요일 대(對) 주말(週末)이라는 식으로 한 주일을 양분(兩分)해왔다. 급기야 나는 심술과 반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출했다." 펄스는 다시는 그러한 상태에 안주하지 않았다.

함께 살기는 하면서도 펄스는 그 자신과 가족 사이의 정서적인 거리를 크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아내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는 자녀 양육에 관한 일(그가 일생동안 해야 하는 많은 일들 중의 하나)을 하고 아마추어로 영화와 연극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그의 이론과 치료를 발달시키면서도 무뚝뚝해지고 신경과민이 되었다. 그는 "게슈탈트 기도문(Gestalt prayer)"으로 자기의 인생과 이론의 기본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놓았다.

나에게는 나의 일,

당신에게는 당신의 일.

내가 당신의 기대에 맞추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나의 기대에 맞추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아닌 것.

당신은 당신, 나는 나,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는 기회가 생기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그렇지 못할 땐 어쩔 수 없는 일.

펄스는 여생 동안 - 남아프리카에서 뉴욕까지 그리고 마이아미에서 캘리포니아의 에살렌 인스티튜트(Esalen Institute)까지 - 자기 자신의 일을 하였다. 그는 자기가 설파하는 것을 직접 실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그를 아는 수백 명의 사람과 삶에 관한 그의 설법을 따르는 수천 명에게 영감과 지침을 주었으며 치료자가 되었다. 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의 생활양식과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람들에게는 화를 내었고 불쾌해했고, 노골적으로 윗사람이 하는 식으로 책망을 하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나 비방자가 다같이 동의했던 한가지는 펄스가 색다르고 괴상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게슈탈트 치료법의 연수회를 이끌어가거나 자신의 손녀뻘이나 됨직한 어린 여자에게 구애(求愛)하거나 (그리고 대체로 성공했는데) 그는 열의와 열정 그리고 충만한 삶에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희열감을 가지고 했다.

게슈탈트 치료법의 추종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마틴 셰파드(Martin Shepard)가 1975년에 펄스의 전기(傳記)를 썼다. 그는 이렇게 이 사람을 묘사한다. "그는, 나에게는 완전한 동물이었다. - 하등한 면에서가 아니고 오히려 고차원적인 면에서이다. 그는 성질이 고약할 수도 있고 재미있을 수도 있고 무례하거나 친절할 수도 있고 추잡하거나 사랑스러울 수도, 저속하거나 허풍장이로 보일 수도 있었다. 다만 그는 그 중 어떤 것도 숨기고 싶어 괴로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70년대의 펄스에 대해서 셰파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줄담배, 대머리에 긴 머리, 길게 흐르는 턱수염, 반짝이는 눈, 그리고 퉁명스러우나 허튼 말 없는 목소리, 낙하산복 같은 것에 러시아 기병 같은 셔츠를 걸치고, 구슬 목걸이를 하고 있는 그는 산타클로스, 라스무틴(Grigorii Efimovich Rasputin ; 시베리아 농부 출신의 수도사), 선 머슴, 원시시대 조상, 철인, 도사, 게다가 아마 여호와 자신까지 합쳐 놓은 것 같은 인상이었다. 자기 자신이 묘사한 대로 '집시(gypsy)'로서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찾는 탐구자로서 그는 약물사건과 선(禪)의 경지를 경험한 바 있고, 성(性) 생활도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고 있었다."

펄스의 생활 양식과 외모는 1960년대 말기와 1970년대 초기의 분위기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호소력을 지녔던 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굉장한 인기는 그의 외모와 행동 방식에만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그 자신이 되기 위하여 "여기 그리고 지금"에 살아야 한다는 그의 경고 때문이며, 예전의 핵심과 가치가 붕괴된 시기에 삶의 새로운 핵심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기 때문이었다.

펄스가 1970년 시카고의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건물 주변에 열광적으로 모여드는 그의 추종자들을 막기 위하여 경찰 경호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그 군중들은 거기서 펄스가 숨을 거둘 때까지 꼬박 6일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펄스에 대해서 어떠한 말을 하든 간에 그의 추종자들의 헌신과 1970년보다 오늘날에 더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그의 이론과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을 부정할 수는 없다.

펄스의 성격 연구 방법 : 게슈탈트 치료법

펄스의 성격에 대한 연구 방법은 인간 성격의 본질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치료의 형식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프랭클과 마찬가지로 어떤 치료 형식이든 그 기초는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기능을 하는가에 대한 이론에 두고 있다.

"게슈탈트(Gestalt)"라는 말에서부터 그의 연구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싶다. 이 말의 설명은 그의 치료법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 것이다. "게슈탈트(Gestalt)"는 원래 독일말로 형태, 모양, 체제로 번역할 수 있다. 그것에는 전체 혹은 완전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말은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싹튼 이론 심리학 분야에서 사고하는 학파를 기술(記述)하는 데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위의 세계를 지각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다.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우리들이 조직된 전체나 유형에 의하여 지각한다고 믿는다.

펄스의 게슈탈트 치료는 직접적으로 게슈탈트 심리학으로부터 파생된 것은 아니다. 게슈탈트라는 용어를 다같이 사용했다는 것 이외에는 이들 사이에 공통성은 거의 없다. 펄스는 몇몇 초기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의 업적에 감탄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책을 모두 읽은 것은 없고 몇 개의 논문만을 읽었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순수 형태주의자(pure Gestaltist)"는 아니고 이론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단지 게슈탈트라는 용어는 그대로 사용했다. 펄스는 모든 유기체는 전체로 완성하려는 경향성이 있다는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기능성의 법칙만을 의미하는 말로 게슈탈트라는 용어를 썼던 것이다. 이 게슈탈트(혹은 종결로 향함)를 막는 것은 모두 유기체에 해롭고 따라서 미완성 상태(unfinished situation)라고 펄스가 부른, 물론 완성되어야 하는 상태를 (전체가 되거나 완전성을 이룬다) 요구한다.

한 인간의 모든 국면들이 게슈탈트를 형성하고 형태를 종결할 수 없을 때, 인간 성격의 전체성은 파괴되고, 하나 하나의 부분들은 의미를 잃고 만다. 심리적 건강을 위해서 유기체 내의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 균형이 흔들리면 - 게슈탈트의 형성을 막으면 - 부적응이라는 형태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불균형을 경험할 때는 그것을 수정하려는 동기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펄스는 프로이드가 지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동기이론을 제시했다. 프로이드는 인간이 다양한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었다. 펄스는 미완성된 상황이나 불완전한 게슈탈트(프로이드와 새롭게 대결하고자 하는 자신의 오랜 욕구와 같은 것)에 의하여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우리들 각자는 여러 가지 - 아마도 수백 가지의 - 미완성 상태를 내부에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희망도 없이 혼란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를 몰아대는 그렇게 많은 미완성 상태에서 한꺼번에 여러 방향으로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중요성의 위계질서(hierarchy of importance) 식으로 그 불완전한 형태들을 배열하기 때문에 중요성의 순서대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가장 긴박한 상태가 우선 그것이 만족될 때까지 행동과 사고의 지배적인 통제자이며 관리자가 된다. 그러고 나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나타나고 그리고는 그 다음 그 다음 - 이러한 식으로 일어난다.

펄스는 자기 강연 도중 불이 났다고 가정하여 예를 들었다. 그 불은 곧 자기 강연 내용보다도 그 순간에는 더 긴박한 것이 될 것이다. 그 불은 미완성의 상황에서 가장 지배적인 혹은 가장 중요한 욕구(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가 되었다. 이제 불에서 재빨리 도망쳐 나왔을 때는 숨이 몹시 찬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미완성 상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즉 화재의 위험보다는 산소 공급이 보다 다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숨 돌리고자 하는 욕구가 그 순간의 관리자가 되고 통제자가 되는 것이다.

미완성 상태를 처리하는 한가지 중요한 양상이 자아조절(self-regulation) 대(對) 외부조절(external regulation)이다. 건강한 사람은 타인의 욕구나 요구, 사회규범의 구속 같은 외부의 힘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자아 인식만이 건강한 성격의 발달과 성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자아의 완전한 인식으로써 우리는 유기체(마음과 몸)를 이어 받을 수 있고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유기체의 지혜에 의지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펄스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사회로부터 충동을 억제해야 된다고 배워왔고 그 결과 자기를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억제된 충동은 단순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실지의 예로 좌절된 공격성은 틱(tic ; 신경성 국부경련)으로, 경쟁심은 궤양 증세로, 성적(性的) 욕망은 적당한 예의로, 의존의 욕구는 단순한 혹은 몇 가지가 겹쳐진 공포증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충동을 표현하는 대신에(그래서 게슈탈트를 완성하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투사(project)한다. 우리는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타인이 하면 그들을 비난한다. 소심한 사람은 타인을 공격적이라고 비난하고, 금욕적인 사람은 청년의 부도덕성을 힐난하고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들은 젊은이의 장발에 대해 공격하며 동성연애를 하는 것 같다고 비난한다. 이와 같은 경우, 용납될 수 없는 충동들이 다른 이에게 투사되는 것이다.

펄스는 심리적 건강을 위해서는 이러한 투사가 우리의 내적 감정을 나타내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외부의 규제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욕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바로 당신이다"라고 펄스가 말하는 뜻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당신에 대해 힐난하고 있는 욕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원칙에 부합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펄스의 인간 성격의 연구 방법의 다른 한 면은 현재를 유일한 현실로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여기 그리고 지금"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역시 현재의 시기에서 경험된다. 마치 아직도 과거 속에 있는 듯 살아가는 사람, 미래가 오늘 벌써 와 있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은 균형 잡히지 않은 성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거나 아직 실재하지도 않는 시간 속에 살며 그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과거와 미래로 도피하려는 충동이 생긴다. 이 두 가지 움직임이 모두 완전한 인간 발달에 해(害)가 된다.

우리가 과거에서 산다면(회고적 성격, retrospective character) 일생의 어느 기간에 대하여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거나 모든 것에서 부모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펄스에 의하면 비극적 실책(失策)이고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지니는 미완성 상태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부모를 비난하고 우리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린다.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아직도 아동으로서 생각한다. 게슈탈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모에의 의존을 몰아내고 실제로 "나는 이제 성인이고 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내게 책임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미래 속에서 사는 전망적 성격(prospective character)도 똑같이 완전한 인간 성장의 면에서 볼 때는 바람직하지 않다.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환상이 과거의 기억보다 더 현실적일리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재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미래를 경험할 수도 없다. 단지 이 시기, 즉 현재의 영상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미래에의 소망과 전망 등이 실현되지 않으면 낙담하고 불행을 느끼며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타인이나 환경, 또는 "불운(不運)"을 탓할 것이다. 역시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 다른 것에 전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가 과거 쪽이나 미래 쪽에 향하고 있다면 현재라는 시간과 함께 그 순간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희생시키게 된다. 여기에 있는 현재가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현실이므로 매순간 완전히 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경험에서 무엇인가 얻어내야 할 책임을 갖는다.

펄스는 우리는 완전히 현재에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기억 속의 것이나 미래에의 이상을 완전히 버리자고 변호하지는 않는다. 과거는 우리가 종결지어야 하는 미완성 상태와 회상하여 즐거운 경험들, 또 현재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험들을 지니고 있다. 과거를 인식은 하되 그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계획을 세우되 -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으므로 - 현재의 대용으로 그 계획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펄스의 인간 성격에 대한 연구의 본질이다. 내적 균형을 조정하려는 것이 인간 성격의 동기가 된다. 다시 말해서 미완성 상태를 완성하려는 것이 동기가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충동과 욕망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인생의 다른 모든 면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리고 여기, 즉 현재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점은 바로 자아에 있음을 주시하자. 우리 자신만이 생을 조정할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성격에 첨가된 단면들

펄스는 우리가 두 가지의 수준에서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공적인(public) 수준(겉의 행동)과 사적인(private) 수준(사고와 환상)이 그것이다. 생각은 미래 행동에 대한 예행 연습의 수단이며 마음의 사적인 수준에서 시도하는 일이다. 미래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필수적인 반면 그러한 소리 없는 연습은 "지금(now)"과 "그 때의(then)" 사이에서 존재하는 긴장(anxiety), 즉 불안으로 이끌릴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긴장 상태를 거의 견딜 수 없어 오늘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예견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보다 익숙한 것에 매달려 현상태를 유지하려 하므로 인간의 성장은 따라서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건강한 성격은 그 순간에, 그 순간의 삶을 살게 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은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매일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하고 괴로와하는 일이 없다.

죄악감(guilt) 역시 펄스의 이론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타인에게 투사된 분노라고 단정한다. 분노는 표현되지 않는 평범한 경험이기 때문에 심리적 건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표현되어야 하는데 표현되지 못한 욕구는 무엇이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분노는 우리가 갖고 있는 미완성 상태 가운데서 가장 고약한 종류 중의 하나이다. 화가 난 사람은 곤경에 처하여 펄스가 말한 "고착(stuck)" 상태가 된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 분노의 표적을 처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불쾌하게 만드는 것을 잊어버릴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해결책은 분노를 표현하는 것, 즉 곤경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분노의 원인인 죄악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심리적 건강을 위해서는 인식(awareness)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지한 바 있다. 미완성 상태, 충동과 욕망, 여기 그리고 지금, 또 분노를 인식해야 한다. 인식에는 자아(self)의 인식, 세계(world)의 인식 그리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간섭환상(intervening fantasy)의 인식이라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펄스는 이 중간 단계를 DMZ(비무장지대)라 불렀는데 완전히 자아와 또 세계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는 기능을 한다.

이 DMZ는 편견과 속단을 포함하므로 그를 통해 세계와 타인을 보게 된다. 세상을 자기 선입관으로 보면 결코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단지 자기에게 보이는 대로만 보게 된다.

건강한 사람은 자아에 대한 인식 및 세계에 대한 인식에 완전히 접촉하고 있다. 그러나 병적인 상태의 사람은 이러한 인식 단계 양쪽에 모두 접촉이 되지 않는다. DMZ, 즉 인식의 간섭 환상 단계는 그 환상에 너무 많은 기력을 소모해버렸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의 현실에 남아있는 기력은 거의 없다. 인간 성격의 환상적이고 비이성적인 이러한 양상을 이해하고 나서 이 중간지대를 비우고 현실세계와 자아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될 때 심리적 건강은 성취될 수 있다.

이것이 성취될 수 있을 때 놀라운 전환이 일어난다. "갑자기 세계가 거기에(there) 있다. ……치료의 목표, 성장의 목표는 점점 '마음(mind)'에서는 사라지고 감각(senses)으로 서서히 오게 된다." 우리는 환상, 공포, 편견 대신에 그 순간의 우리의 세계와 자아를 경험하게 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인식의 연속선(continuum of awareness)을 확보하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업, 즉 삶의 미완성 상태를 계속 진척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인식의 연속선을 이루려면 주위에서 진행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잠시라도 여기와 지금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와 지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불쾌하고 위협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아야 하는 경우가 생길 때이다. 그런 때에 미래나 과거로 도피하는 것을 통하여 불쾌한 인식을 대치하거나,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또는 진실로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 의미도 없는 자유연상의 혼잡에 자신을 몰두시킴으로써 현재에 대한 인식을 오히려 방해하려 할 수도 있다. 펄스는 현재 인식을 회피하는 수단을 분열(dissociation)이라 부르고 현실로부터의 회피나 도주로 정의하였다. 분열은 공포적 태도(phobic attitude)를 대표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불쾌한 상태를 피하고 싶어하므로 각종 갑옷과 가면을 사용하나 그렇게 하면 곧 여기와 지금으로 집중된 주의는 물러나게 되어 인식의 연속에 방해를 받는다. 이 공포적 태도는 인간 발달의 적(敵)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다시 한 번 현재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자, 이제 자아조절 대(對) 외부조절의 문제로 되돌아가자. 자아조절이 건강한 성격의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살펴본 바 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부모에게서 일련의 규칙, 즉 어떤 것은 용납되는 행동방식이고, 어떤 것은 용납이 안 될 뿐더러 때로는 벌까지도 받게 되는 행동방식임을 배운다. 이러한 일련의 규칙을 양심(conscience)이라고 일컫는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초자아(superego)라 불렀다.

펄스는 행동이 외부의 통제나 조절을 받는다는 사상에 반대하였다. 타인들이나 우리 자신에 의해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 규칙들을 내면화했더라도 역시 그들은 원래 외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외적 힘에 의하여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펄스는 이들 내면화된 외적 통제력을 승자(勝者, topdog)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우리가 지녀야 할 형상과 행동 방식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승자는 독재적이고 정당하며 항상 최선의 길을 안다. 펄스는 명령으로써 우리를 조정하고 만약 자기를 어기면 파국에 이른다고 위협하는 그것을 난폭자(bully: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사람)라고 불렀다. 승자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보복이 따른다고 난폭자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고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며, 언젠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펄스는 프로이드가 성격 형성에 있어서 초자아나 승자만을 강조하고 상대적인 힘, 즉 눌려 있는 자(underdog)를 무시했다고 비난했다. 눌려 있는 자도 역시 우리를 조정하는 데 보다 미묘하고 달래는 듯한 방법으로 한다. 눌려 있는 자는 방어적이고 변명적이 되어 승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겠지만…… 실패하면 어쩔 수가 없군…… 나의 의도는 그렇게도 좋았는데."

이들 두 어릿광대 중에서 승자는 좀 더 힘이 있으나 눌려 있는 자는 보다 교활하므로 그 결과 대체로 승자를 이겨내게 된다. 우리들의 대부분에게는 성격의 통제권을 위한 계속적인 싸움이 그들 사이에 있고 결국 통제자와 통제받는 자로 나누어진다. 그 갈등은 끝나지 않고 자아고뇌 게임(self-torture game)으로 된다고 펄스는 믿었다.

이 내적인 게임에서 우리는 승자가 항상 옳다고 믿어 그 요구에 따르게 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으면 혹독하게 느낀다. 불행히도 승자의 많은 요구들은 완전함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따르기가 불가능하다. 사실상 펄스는 정신이상 혹은 적어도 심한 신경증은 이들 완벽주의의 명령에 따르려고 애쓰다가 생긴 결과일 것이라고 썼다.

우리는 성격에 있는 눌려 있는 자와 승자의 불화를 깨닫고 그 차이점을 양립시켜야 한다. 일단 그것이 성취되면, 타인들이나 사회에 의하여 제시된 기준에 동조하기 위해 억지로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심상을, 또 승자가 행동방식으로 지정하는 심상을 이행시키고 실현시키는 데 자기의 인생을 바친다.

우리가 실현해야 하는 것은 진정한 내부적 자아(inner self)이다. 자아실현(actualization of the self)과 자아영상(image of the self)의 실현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자아를 잃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닌 심상만을 위해서 산다고 펄스는 믿었다. 자아는 이상(理想)대로 살고자 하는 광적인 노력 때문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승자와 자아의 심상이 우리를 우리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이상이라는 저주"이다.

외적 통제의 형태는 어떤 것이든, 내면화된 것까지도, 그것이 자아의 실현을 방해하기 때문에 심리적 건강의 발달을 저해한다.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를 주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처해진 상황 뿐이다. 인생의 복잡함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현재 상태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도록 하는 것이다.

펄스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우리가 운전을 할 때 항상 같은 방식으로, 예를 들어 똑같은 고속으로 운전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속도는 상황에 따라 조절된다. 차가 거의 없는 고속도로에서는 빨리 달리고 밀집된 도시의 거리에서나 피곤할 때에 천천히 달린다.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반응을 한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자아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에 접하면, 상황과 우리 자신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반응은 우리를 이끌어가는 데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받으면 이미 결정된, 똑같은 태도로 모든 상황에 반응하고 진정한 자아보다 자아의 영상에 따라 행동한다.

펄스의 인간 성격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로 환경에 대해 유기체가 맺는 자아경계(ego boundary)가 있다. 물체를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경계의 역할인 것처럼 그 역시 배타성이 있어 사물을 떼어 놓는다. 마찬가지로 자아경계는 세계를 나머지 다른 것과 자아로 구별하거나 분리한다.

자아경계의 두 가지 특성은 동일시(identification)와 소외감(alienation)이다. 우리는 자아(ego; 우리의 자신[self])로 동일시되고 자아가 소속된 곳에 높은 가치를 둔다. 자기의 집, 가족, 차나 직업과 동일시되고 다른 사람의 집, 가족, 차, 직업들과는 명확히 구분을 한다. 이 동일시는 대체로 강한데 특히 가족에 관해서는 매우 강하다. 예를 들어 자기 가족 중 어떤 사람이 모욕을 당했다면 우리 자신이 모욕을 당한 듯이 느낄 것이다. 우리는 친구와도 역시 동일시할 수 있고 클럽이나 교회의 성원, 동업자 등등과도 동일시할 수 있다. 자아경계 안에 사랑, 결속감, 단결감 등이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들은 경계의 다른 편에까지는 확장되지 않는다. 자기 친구가 아니거나 다른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친근감 없이 의심과 심지어는 적대감과 거부감까지도 갖고 대할 것이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시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시오. 우리는 당신의 친절을 우리 이웃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소."라고 말이다.

자아경계는 그래서 견인력과 반발력이라는 양극성이 있다. 경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친숙하고 좋지만 외부 것은 낯설고 나쁘다(당신의 신은 사이비이고 나의 신은 진짜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아경계 안에 있는 것과는 동일시하고 나머지 모든 것으로부터는 소외당하게 된다.

자아경계는 삶의 영역 전체에 적용되고 보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항상 변화하는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소수 집단의 구성원들과 일을 하여 그들에 대한 편견이 없어지면 그 때는 전에 그들을 배제하던 자아경계가 그들까지 포함하게 되어 새로운 경계가 창조된다. 편견에 매달리고 새로운 경험에 대해서 배타적인 사람은 그 자아경계를 그대로 보유할 수밖에 없다.

자아경계는 자아 속에서도 역시 적용된다. 우리는 자아경계 안에 있는 영역으로부터 자아의 일부를 배제시켜 버릴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진정 자신에게 속한 사고, 감정 혹은 욕구의 일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거부하고 부인한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욕구가 없다." 그리고 이 용납될 수 없는 충동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투사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 충동들을 거부하는 방식보다는 우리의 본질 자아의 일부를 부인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내부의 자아경계는 더욱 작아진다. 우리 본질의 일부분에만 동일시하고 그 이외의 것으로부터는 소외된다. 그 결과 우리는 이미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다. 우리의 자질이나 특성의 일부분만 활용할 뿐이다.

펄스는, 내적 자아경계의 이러한 축소가 우리들 대부분이 인간의 잠재력 가운데 그렇게 작은 부분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전체적으로 완전히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한다. 자아경계가 축소됨에 따라 우리의 기력과 활력(우리의 "삶의 원동력")도 감소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감퇴된 능력으로 기능하는데 이것은 마치 8기통 자동차가 4기통만으로 달리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움직이기는 하지만 아주 잘 또는 빠르게 달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지극히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잠재력의 어느 부분도 거부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활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아의 모든 부분과 접촉하여 그들 중 어떤 부분에서도 불쾌하거나 위협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건강한 사람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완전한 인식을 하며 완전히 활용된다.

우리가 완전히 자신을 경험할 때 외부의 자아경계는 붕괴된 것처럼 보인다. 그 때에는 존재하는 데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다. 객관과 주관이, 자아와 세계가 화합되어 확대된 인식과 고조된 감수성 속으로 용해되며 그 과정, 즉 여기나 지금 속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다.

성격의 발달

인간 성격의 발달에 관한 펄스의 견해의 기본적 원리는 환경에의 의존으로부터 자기 의존에로의 변화이다.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자궁이라는 환경에 완전히 의지한다. 태아는 아무 것도 자급(自給)하지 못한다. 유아가 혼자 호흡해야 하는 바로 그 출생의 순간부터 이것은 변화된다. 태어날 때 잠깐 동안 우리는 중요한 게슈탈트 치료법의 개념인 곤경(impasse)의 첫 징후를 경험한다. 환경에 더 이상은 의지할 수 없는데 자기 자신에게도 역시 아직 의지할 수 없는 고비를 맞게 되는 곤경을 당한다. 이 때 갓난 아기는 혼자 힘으로 숨쉬는 것을 배우거나 아니면 죽어야 한다.

유아가 자라날 때에도 환경적 보좌는 계속 요구된다. 그러나 아동이 그 스스로 하는 것을 보다 많이 배우게 될수록 환경의 보좌는 점차 감소된다. 기어다니고 말하고 걷기를 배우며 자기의 내적 자원, 그 잠재력이 점차 발달하는 것이다. 아동은 타인들에게 덜 의존하게 되고 자아로부터의 원조가 점차 증가하게 된다. 신체적인 면에서 자연스럽게 환경에의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며 그것은 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심리적ㅗ사회적인 의미에서 환경에의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와지려면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되어 인간 실존의 "근본적 갈등"이 생기게 된다.

이 갈등은 우리의 실체로 타인이 원하는 우리들 사이에서 싹트는 것이다. 펄스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 - 식물, 동물, 사람 - 는 본능적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본질에 일치하도록 자아를 실제의 모습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펄스는 장미는 캥거루로서가 아니라 장미로서 그 자신을 실현하고 코끼리는 새로서가 아닌 코끼리로서의 그 자신을 실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독특한 잠재력을 완전히 누리며 살게 됨으로써 또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이 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갈등은 우리 실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기를 우리에게 기대하는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회는 그 대리자(부모, 교사, 그 밖의 것들)의 형태로 펄스가 "진정한 성장(authentic growth)"이라고 말한 본질적이고 자발적이며 완전한 자아의 실현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들은 집착(stick)과 최면(hypnosis)이라는 강력한 두 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의 존재를 "위조(falsify)" 할 수도 있다.

집착은 사회가 원하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우리에게 떨어질 재앙을 의미하는 파멸적 기대(catastrophic expectation)의 원칙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자기가 좋은 대로 행동하면("실제로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그들에게 말해야겠다.") 그 결과는 불쾌할 것("그들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최면은 교실, 설교 연단이나 광고 같은 데서처럼 선전이나 설득을 할 때 필요한, 어떠한 것을 믿으라는 호소가 들어 있다. 펄스는 한 강연에서 그 과정을 선명하게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바로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을 믿으라고 당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나는 내가 말한 것을 소화하고 동화하고 음미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 당신에게 주문(呪文)을 던지고 당신이 동화되거나 토하거나 계산기 속으로 집어넣고서 흥미로운 개념이군요 라고 말할 때까지 나의 지혜를 당신 창자 속에 밀어 넣는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집착을 통해서든 최면을 통해서든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환경에 더 의존하여 뒷받침을 받고 잠재력의 완전한 표현은 억제된다.

아동이 자라면서 그들은 두 상황 중의 하나, 즉 응석받이가 되거나 좌절을 극복하는 것에 직면하게 된다. 아동들은 쉽게 응석받이가 되어버릴 수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것보다 아이들의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해주어 버린다. 또한 그들은 아동이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따라서 아동을 좌절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펄스는 좌절은 자라나는 아동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좌절이 없으면 아동에게는 능력을 발달시켜 스스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전율적 쾌감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

펄스는 아동들이 응석받이가 되었거나 충분한 좌절 경험이 없을 때 "고착(stuck)"된다고 믿었다. 이런 아동들은 성장과 발달을 하는 데에 독특한 잠재력을 활용하는 대신에 환경, 특히 부모를 조절하는 데에 사용한다. 그들은 추진력을 부모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부모를 교묘히 조종하는 데 사용한다. 다시 한 번, 그들은 자기보다는 환경에 의존한다.

아동이 효과적인 조종의 수단을 배울 때 특성(character)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고정된 특성을 가질수록 우리 행동이 굳어지고 예측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독특한 잠재력의 표현이 줄어든다.

아동이 발달시켜야 할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그들은 타인으로부터의 "지시적 원조"를 구하면서 결과적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엄마, 아빠, 어떻게 할까요?"라고. 그들은 부모를 조정하기 위하여 울기도 하고 성질을 부리기도 하며 부모의 자존감에 호소하여 아양을 떨기도 한다. 그래서 그 댓가로 부모는 무엇인가를 줄 것이라고 기대해보는 것이다. 또 다른 특성은 자기가 무력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인데 그 결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엄마 아빠는 확실히 저를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당신들은 매우 현명하니까요." 이러한 행동은 성인이 되어서도 벌이는 의존 게임(games of dependency)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끊임없이 칭찬, 사랑, 혹은 타인의 격려를 필요로 할 때 그들이 지배자가 된다. 우리는 자아에게 의지하고 있지도 않고 통제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감명시키는 데만 계속 관심이 있다.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견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는 더 이상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다.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효과에 대해 민감하게 말하고 행동할 모든 것을 계획하고 연습해야 한다. 계속적인 반복을 통하여 이 역할들은 연관이 된다. 지지를 받기 위해 연기를 통하여 환경을 조정하는 것은 신경증과 미성숙의 한 증상이다. 이 조종에 투자되어야 했던 기력은 이미 자신의 발달에 적용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자기가 자신에게 줄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서 받으려고 하는 노예가 된다.

환경에의 의지에 대신할 수 있는 다른 건강한 방법은 자기 스스로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 과업은 인간 성격 발달의 궁극적 목표이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벌이는 연기를 그만두어야 하고 우리의 내적인 본질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실현시켜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에는 펄스가 말하는 심리적 건강의 최고 상태에 이미 도달한 것이다. 펄스는 이 상태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것을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사람

펄스는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특성 목록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인간의 성격에 관한 그의 견해에서 쉽게 추론할 수는 있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사람은 현실존(present moment of existence)의 순간에 그 바탕을 안정되게 두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현실은 그 순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 앞이나 뒤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나 미래에 대한 환상이나 상상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초점인 인식과 만족은 현실세계의 각 순간적인 실존에 의지한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기들은 누구이고 어떠한가에 대하여 완전한 인식을 하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기의 강점과 약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잠재력을 깨닫는다. 그들은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능력 어떤 것을 갖고 있는지를 안다. 이와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그들은 할 수 없고 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기가 아닌 어떤 것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상 목표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인식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억제하거나 죄악감 없이 완전히 개방적으로 충동과 욕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존재의 어떤 부분은 표현할 수 없는 대신에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들이 어떤 순간에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누구나가 다 알 수 있게 할 만큼 충분히 안정되어 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에 근거하고 있고 부모나 배우자, 운명, 혹은 외적 자원 어디에도 자신이 누구이며 어떠한가에 대한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만이 자기 삶을 만드는 데에, 자기가 말하고 행하고 느끼거나 생각하는 데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건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책임에서도 탈피한다. 자기 인생에 다른 누구의 책임도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자기의 책임은 없다. 펄스는 게슈탈트 기도문에 "나에게는 나의 일, 당신에게는 당신의 일"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그는 우리가 타인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면 전지전능한 척하고 남의 인생에 간섭을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들을 보조해 주려고 할 것이므로 이것은 그들의 독립심과 스스로에 대한 책임의식을 쇠퇴시킬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되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둠으로써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타인들과 상호관계를 가져야 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 나는 나"이다.

건강한 사람은 자아와도, 세계와도 완전하게 접촉하고 있다. 그들은 감각과 감정, 그리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과 접촉한다. 인식이 DMZ를 구성하고 있는 환상에 의하여 흐려지지 않는다. 건강하지 못한 성격은 그러한 현실, 특히 자아와 접촉이 없으며 기력은 인식의 중개적 지대의 환상에 소모된다. 건강한 성격은 이 중간적 정신세계에 머무르기보다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전해지는 현실 세계에 더 오래 머무는 것이다. 펄스는 우리 마음(mind)을 잃고 감각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다시 말해서 현실과 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와 지금을 사는 사람은 분노를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분노는 표현되지 않는 경험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들 주위의 세계와 완전히 접하고 있는 반면, 외부의 규칙으로부터는 자유롭다. 그들은 적절한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개념으로 지시받거나 지배받지 않는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양심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부모의 가치관에 의하여 계속 명령을 받는다. 여기와 지금의 사람은 자아의 영상을 실행하려고 하기보다는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고 실행한다. 그들은 자아 의존을 위하여 환경에의 의존을 포기하고 외부적 기준이나 가치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자신이 누구이고 어떠한가를 그대로 반영하며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 영향받지 않는다.

여기와 지금의 사람은 그 순간의 상황에 의해 지시받고 반응한다. 그러한 사람은 현실과 완전히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융통성 있고 현실감 있게 반응한다. 그들은 비이성적 환상이나 타인의 규정에 따라 상황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상황의 모든 면을 객관적으로 감지한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아경계의 위축이 없다는 특성이 있다. 그들의 자아경계는 융통성이 있어 확장과 확대가 가능하다. 이 개방성은 외적 자아경계(환경)와 내적 자아경계(자기)에 모두 적용된다. 어떠한 사고와 감정도 자아경계에 의하여 배제되지 않는다. 자아의 어떤 면도 부정되거나 소외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본성의 어떠한 면도 모두 수용하므로 보다 높은 성장과 발달을 위하여 모든 잠재력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와 지금의 사람은 행복의 추구에 열중하지 않는다. 펄스는 행복은 성취될 수 없는 것이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행복을 목표로 설정하는 것은 우리의 유일한 현실인, 현재로부터 정력과 주의를 돌리는 것이 된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행복은 순간적이고 산발적으로 나마 우연히 떠오르는 것이다. 펄스는 행복은 단순히 일어난 것이므로 영원한 상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마도 바람직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행복 그 자체를 목표로 추구하는 것은 불운이며 "디즈니랜드의 조작되어 꾸며진 재미"같은 대용 행복(pursue happinese)으로밖에 이끌 수 없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그 순간 우리가 위치한 모습 그대로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 논평]

이 책에서 토의된 모든 이론가들 중에서 프리츠 펄스는 가장 넓고 열정적인 대중이 따르는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다. 다른 이론가들 - 올포트, 머슬로우, 로저스, 융 - 이 학술적인 심리학으로 더 잘 받아들여진 반면에 그들 중 누구도 펄스만큼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펄스는 학술적 심리학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연구는 미국에서의 인간 잠재력 성장 운동에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게슈탈트 훈련 센터가 전국 방방곡곡에 생겼고, 수십ㅗ수백 가지 세미나가 해마다 개최된다. 수천 명이 게슈탈트 치료법에 참가하였고, 그 숫자는 분명 증가 추세에 있다. 펄스의 연구방법(그리고 그 사람 자신도)이 현대적 가치와 우리들의 많은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대표하는 듯하다.

이것은 지도자가 없는 게슈탈트 치료법의 미래에 대해 흥미있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펄스는 비범하게 능숙한 인간으로 그의 임상에서의 상호작용은 대단히 힘있고 역동적이며 민감하고 직관적이어서 그가 죽음으로써 게슈탈트 운동에는 공허가 남았다. 한 게슈탈트 치료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펄스의 죽음을 본따서 게슈탈트 운동은 노출된 개미탑 같이 보인다. 사람들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하며 허둥거린다. 확실한 지도자가 없다."

프로이드의 사후(死後) 정신분석학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프로이드와 펄스 둘 다 살아있는 동안 지도력에 영향력 있는 도전을 받지 않았던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선장도, 키잡이도 없이 배를 남겨둔 셈이다. 정신분석학에는 그 주인이 죽었을 때 많은 혼란이 있었다. 몇 십 년이 지난 후 젊은 정신분석가들이 점차로 프로이드의 가르침의 핵심은 보존했다 하여도 프로이드의 위치에 두드러진 변화를 이룩해내게 되었다. 운동을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점차적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이다. 추측컨대 지금 게슈탈트 치료에서도 그와 비슷한 분리 작업이 일어나는 중이고 각 사람과 집단마다 자신들의 다양한 견해를 진척시킬 때 도입된 변화를 배우려고 기대하고 있다.

어쨌든 펄스 시대의 게슈탈트 치료는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우리 시대와 장소에 보조를 맞추는 듯한 인간의 잠재력과 그 성취법 그리고 행동하고 느끼는 방식 - 자아와 나머지 세계라는 데 대하여 - 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많은 사람이 심각하게 여기는 건강의 대책이고 그로 인해 과거의 세대들이 즐겼던 것 보다 그들 자신이나 타인들에게 보다 공정하고 자발적이며 개인적 자유를 보다 많이 가진 세대가 되는 것이다(이것이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제 게슈탈트 이론의 중요한 논점을 몇 가지 검토해 보자. 첫째 자기의 충동과 욕망, 약점과 장점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은 다른 이론가들에 의해서도 제안되었던 개념이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심상(心像)을 가지고, 어떠했으면 하는 희망대로가 아니라 우리 모습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는 것이 보다 건강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사람은 자기 본성에 명확하고 객관적인 심상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산다. 그러나 충동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또한 그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펄스의 충고에 나는 곤란을 느낀다. 그대로 한다면 우리는 충동을 방해하거나 억제해서는 안 되고 분명히 타인들에게 일어날 법한 영향도 무시하고 요구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만약 충동이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고 충동대로 움직이는 것이 정직하고 자연스럽다고 스스로 믿는다면 극단적인 행동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를 핑계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만 되는 것이다. 펄스는 스스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였고 의심할 바 없이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우리는 다른 이의 감정을 상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항상 주의할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고 싶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고의적으로 경솔하게 생각 없이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 다른 사람을 불필요하게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복은 우리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다. 충동이 나타나면 그것을 모두 표현하라는 이 규칙을 완전히 따를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보복으로부터 대단히 자유롭고 나머지 세계로 부터 독립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누구도 자기를 해치지 않을 위치 - 즉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학점을 깎이고, 수선에 대해 지나친 부당한 가격을 요구당하는 등의 해를 받지 않을 위치에 있어야 한다(거기서 얻고 다루어지는 방식이 기쁘게 하는 데만 달려 있는 많은 개인적 상호작용들). 나는 충동을 표현한다는 이 사상에 갈채를 보낼 수는 있으나 일상 생활이라는 데 기초해서 그렇게 행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성이 염려된다. 인생은 게슈탈트 연구회나 감수성 훈련(sensitivity session)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현실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남의 행동에 대해 그렇게 관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와 지금에서 사는 것은 어떤가? 펄스는 "현재 이외의 다른 현실은 없다"고 썼는데 이것은 사실에 관한 간결한 진술인 것 같다. 실존의 현재 그 순간을 제외하고 다른 무엇을 우리가 경험 -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보고 느끼는 것 - 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 순간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면 또 다른 기회를 가질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회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경험을 인식하는 것은 심리적 건강을 위해 일차적인 필요조건으로 보인다. 이것은 과거를 애도하거나 미래의 가상적 세계에서 사는 것보다 얼마나 생산적인가? 그러나 펄스가 기록한 바와 같이 우리는 어제를 잊거나 내일을 무시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 두 과정은 비현실적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거기에 사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자기와 외부 세계의 현실에 완전히 접한다는 펄스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쉽다. 여기와 지금의 사람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며, 이 현실을 주관적으로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지각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견해는 고유한 것이다. 확실히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그 순간의 상황과 그것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에 의하여 이끌릴 수 있는 것은 객관적인 지각 때문이다.

그 자신을 아는 결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이상이나 심상이 아닌 진실한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되는 것보다 자기 자신으로 되는 것이 분명 더 건강한 것으로 보인다. 타인에 의해 조절되는 것보다는 자아 조절(self-regulated)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만족스러울 것 같다.

책임에 대한 펄스의 의견은 어떠한가? 그의 견해의 일부는 바람직하게 보이나 다른 부분은 용납이 안 되는 것 같다. 우리는 자기 생활의 경과와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견해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확실히 우리는 외부의 힘에 지배될 수가 없고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해 타인들(보통 부모)을 탓하는 것도 건강하지 않다. 나는 펄스의 견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다른 어느 누구도 우리의 현재 모습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책임이 없는 주장에 동의한다. 프로이드 이래 불행이나 실패를 잘못된 아동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거부적 어머니, 아버지가 없는 것, 형제 간의 경쟁, 너무 지나친 대소변 훈련, 너무 관대한 대소변 훈련, 자전거가 없는 것 등). 다른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들로 탓을 돌리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자아파멸이 된다.

우리 인생의 개인적 책임에 대한 펄스의 주장은, 환경의 수동적 희생자로서 인간을 서술하던 과거의 이론에 대한 참신한 해독제이다. 모든 사람이 오늘의(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의) 자신이 된 것은 개인적 책임의 문제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그 결과로 보다 건강한 사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버려야 한다는 펄스의 견해의 결과로 보다 나은 사회와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심각하게 의심된다. 이것은 사람은 자기만을 위하여 살며 동료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무도 없다는 몰인정한 이론의 완전한 이기주의 때문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몇몇 게슈탈트 치료자들(그들 중에는 펄스의 부인도 있음)을 포함하여 많은 저술가들이 비슷한 비평을 하였다. 유명한 에살렌(Esalen) 심리학자이며 한 때 펄스와 협력을 한 바 있는 윌리암 슈츠(William Schutz)는 게슈탈트 기도문과 타인에 대한 책임을 외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영향력이 있다는 것에 낙심했다. 나는 그것이 긍정적 효과를 가진 만큼 부정적 효과도 가진 - 일종의 '제기랄' 하는 것과도 같은 태도라고 믿는다." 이것이 게슈탈트 치료가 발달함에 따라 조절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펄스 이론 중의 일면이다. 확실히 사람의 자아에 대한 책임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한 그들에게 영향받고 의지하므로 타인에 대한 책임도 그에 못지 않게 필요하다.

펄스의 연구에 대한 나의 마지막 비평은 반지성적이라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는 심리적 건강에 대한 그의 처방전에서 크게 확대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이 아닌 느낌, 존재하는 것, 실존하는 것을 강조한다. "마음을 잃고서 감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는 지적 능력(intellect)은 "지성(intelligence)의 매춘부…… 경험과 감각의 선명한 근접성을 대신하는 빈약하고 창백한 한 대용물"이라고 썼다.

우리는 이성적 사고보다 유기체(직관적이고 정서와 감정에 기초한 것)의 지혜에 더욱 의지해야 한다. 지적 능력은 펄스가 느끼기에는 왜 일이 일어나는가 원인을 규명하는 데 너무 관심을 쏟아서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완전히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는 지성적으로 사물을 설명하는 것보다 직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논리와 이성의 힘에 대한 강조가 줄어드는 데 심각하게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들 비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펄스의 이론에 몹시 흥미를 느낀다. 건강한 성격에 대한 그의 규정에는 지성적이며 직관적인 호소력이 있다. '현재에 대해 완전히 인식하며 사는 것', '우리 자신과 주위의 세계에 직관적으로 접하는 것', '자기가 누구이고 어떠하든 그대로를 수용하는 것',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 '외적인 힘보다 자신에 의해 지시받는 것' 등이 건강한 사람의 특성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나는 또한 인간 잠재력 운동의 몇몇 양상에 대항하여 발표한 펄스의 경고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인생의 종말로 향하면서, 본질보다는 속임수를 사용해서 하룻밤 사이의 치료와 즉각적인 "효과"를 약속하며, 게슈탈트 치료를 실행하고 있는 돌팔이와 허풍쟁이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치료에 접근하는 방식이 일시적 유행이 되어 게슈탈트의 견해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치료가 실시된다면 이롭기보다는 해를 줄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게슈탈트 치료를 즉각적인 치료, 즉각적인 감각인식의 보장, 완전한 쾌락상태를 추구하는 헛된 가장, 재미, 즐거움과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서의 황홀경으로 여길까봐 고심하였다. 펄스는 게슈탈트 치료의 목표는 보다 진지한 것으로 인간 잠재력의 완전한 성장과 발달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약이나 지름길을 통해서 급격히 달성될 수도 없다. 완전한 인간이 되는 과정은 시간과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거듭 이야기하건대, 나는 펄스의 많은 저서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게슈탈트 기도문이 그렇게 탁월한 척한 것은 불행이다. 그것이 인간 잠재력을 위한 펄스의 프로그램을 지나칠만큼 굉장히 단순화시켰다고도 볼 수 있고, 우리가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그의 심각한 철학을 가려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슈탈트 기도문을 중화(中化)시키려고 나는 펄스의 자서전 『휴지통의 안과 밖(In and Out of the Garbage Pail)』을 몇 줄 소개하고자 한다. 나에게는 그것들이 훨씬 더 건설적인 충고를 표현하는 듯이 생각된다.

친구여 완벽주의자가 되지 말아라. 완벽주의는 저주이며 긴장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과녁 한복판을 못맞출까봐 덜덜 떨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완전할 것이다.

친구여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실수는 죄가 아니다. 실수는 어떤 일을 하는, 또 다른, 어쩌면 창조적인 새로운 방법일 것이다.

친구여, 실수를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말아라. 자랑스러워하여라.

당신은 스스로 어떤 것을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졌었다…….

양극단, 완벽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시적 치료, 일시적 즐거움, 일시적 감각인식을 경계하라.

어떤 자든 도움주는 자를 경계하라. 돕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해 어떤 것을 약속하는 사기꾼이다. 그들은 당신을 망쳐 의존적이고 미성숙하게 한다.

출처 : 서사대상담심리학과제1회(4학년)
글쓴이 : 박형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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