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리더십

[스크랩] 예수님의 지도력

힐링&바이블센터 2006. 5. 6. 13:10
 예수님의 지도력


오늘 날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시고, 행하시고 가르치셨던 종의 지도자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그대신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테이블의 상좌에 자리잡고 있다. 하나의 체제나 단체를 이끄는 boss 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 한 분이 교회 내에서 운영할 선교원을 개설하고자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대화하고 난 후 나에게 하던 이야기가 기억나는데 사실은 기억하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목사님, 그 목사님은 완전히 사장이던데요!" 적어도 일부 목회자는 그렇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의식에 있어서도 그렇고, 당회장실 부터 시작하여 당회원실은 마치 이사장실이나 이사회실을 방불케 한다.그리고 top-down type 의 명령체계가 잡혀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오늘도 저 낮은 곳이 아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을 모르는 성도들이 몇이나 될까? 만약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기독교나 그것과 연결되어 사역함에 있어서 스스로 참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의 지도력의 모습을 되찿아 실현해야 할 필요는 이 시대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광야에 외치는 한 소리가 아니라 각자의 내부에서 몸부림치는 실천으로서 종의 지도자의 모습을!

몸 말
이 글에서는 간단하게 성경에서 발견된 예수님의 종의 지도자 모습 6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상좌에서 내려오라!(누가 14:10)
나폴레옹이 독일의 어느 제후의 만찬에 초대 받아갔는데 그 만찬의 상좌는 의외로 나폴레옹의 자리가 아니었다. 모두들 의아해 하면서 동시에 팽팽한 긴장을 느꼈다. 나폴레옹보다 더 높은 이가 있단 말인가? 만약 있다면 이는 반역이 아닌가! 그 상좌의 주인공은 제후의 부모였다. 그는 말하기를 "국가에는 국부가 있듯이 가정에는 가장이 있는데 바로 나의 부모님 입니다. 우리 집에 초대받은 이 가운데 부모님 보다 더 존대받아야 할 분은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상좌에 않지 못하는 자존감이 거슬렸으나 그는 인륜을 배웠다. 상좌에는 앉을 사람이 있는데 그가 누구일까? 성경은 주인이 상좌에 올려줄 때라고 한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저를 청한 자가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눅 14:10) 오늘날 만연해 있는 지도자들 끼리 "서로 높여 주기"에 의해서 서로 높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도력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아야 마땅할 분이라는 묵시적인 인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마땅히 상좌에 않을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정받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눈길에는 거슬린다고 하신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느니라."(눅16:15) 결론은 단 한 가지다.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상좌에 앉기를 원하는 마음 자체를 포기하는 지도자의 자세이다. 진실한 지도자는 지도력 자체를 가장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며 높임을 받는 것은 주님의 것임을 시인하는 사람이다. 높임 받기를 포기하기 전 까지는 지도자일 수 없다.

무릎을 꿇라!(요한13:14)
무릎을 꿇는 지도자, 어딘가 낮설다. 아니 익숙하지 않다. 지도자는 다른 이의 무릎을 꿇도록 하기에 앞서서 자신이 늘 무릎을 꿇는 사람이어야 함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 주셨다."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한 복음 13:14) 진정한 지도자는 사람들의 마음의 머리부터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부터 사로잡는 사람이다. 무릎 꿇기를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같다. 지도자는 누구나 싫어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될 수 없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번은 vancouver 에서 우리가 사는 동네의 한인들과 함께 소풍을 갔다. 음식을 다 먹고 난 후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서 비닐 백이 넘어지고, 연이어 음식 쓰레기의 일부와 플라스틱 접시와 컵이 날려 다녔다. 그런데도 여자들 가운데 아무도 주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귀챦기도 했지만 문제는 여자들의 자존심이었다. 은연중에 "나는 식모처럼 사는 여자가 아니다." 는 메시지를 서로 에게 말하고 있었다. 결국 순찰하던 경찰이 "이 쓰레기가 당신들의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자 겸연쩍게 서로 줍던 기억이 있다. 결국 나는 무릎 꿇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념 속에 지도자는 무릎을 꿇는 사람이 아니라 무릎 꿇는 사람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지도자는 다른 이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신의 마음을 낮추어 넓고 편편한 바닥을 만들어서 그 위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서게 하고, 그 후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분이다. 온 세상이 그의 낮은 마음 위에 발을 딛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마음과 몸의 무릎을 꿇을 수 있기 전에는 지도자 일수 없다.

목자가 되어라!(요한10:27,11)
목자를 성격지우는 두 가지는 양들을 보살피는 일과 양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또 보살피는 것은 두 가지 인데 양의 사정을 잘 아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부성애적인 마음이나 또는 모성애적인 마음이다. 부성적 마음이나, 모성적 마음이 전제되지 않고는 잘 보살필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도들이 바라는 목회자상 가운데 하나는 부성애를 느낄 수 있는 목회자라 한다. 같이 시무 했던 부 목사님 한 분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설교에는 자질과 큰 은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하게 교인들을 care 하는지 설교를 잘 하셨던 다른 부 목사님 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따르고 신뢰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목사님은 부성애적인 면을 강하게 가지고 이었고, 또 실천 하셨던 것 같다. 지도자는 많은 식구를 거느린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다. 그들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상한 마음으로 돌 볼수 있는 마음을 품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부성적 권위에서뿐만 아니라 부성적 사랑과 보살핌과 관용에 있어서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부성적 마음과 모성적 마음이 잘 돌볼 수 있는 중요한 자세이고, 양들은 결국 자기를 잘 돌보는 목자의 음성을 따른다. 예수님은 친히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 10:27) 고 말씀하셨다. 이곳 캐나다에서 한 교회의 목사님은 스스로를 너무 바쁘게 만드시는 분인데 정작 심방과 관심을 받아야 할 사정이 딱한 성도들에게 심방과 관심과 사랑을 주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목사님의 사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분의 목회는 소위 힘 있는 분들을 어떻게 잘 잡느냐가 목회사역이 중심 문제였다. 한국의 대부분의 목회자가 그러듯이....... 이것이 한 연약한 성도의 경험으로 확인 된 후에 목회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존경도 떨어지고, 심지어 힘 있는 직분자들 까지도 그 목사님의 친절을 의심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교인들은 냉담해지고 점점 이탈하는 숫자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 소문이 퍼지자 그 교회에 올려고 하는 교인들도 발걸음이 끊어졌다. 어떤 유명하신 목사임의 조언이 생각난다. "연약한 자를 잘 돌보십시요 그러면 당신의 교회에 빈자리가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특별히 버려진 사람들을 잘 보살폈던 분이다. 아마 페스탈로찌의 원조 정도는 충분히 되실 그런 분이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그의 음성들 듣는 양들이 산재해 있다.

그 다음은 아낌없이 주는 목자이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한 10:11) 진정한 지도자는 목숨까지는 아닐지라도 자기의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오늘 날 지도자들을 향하여 던지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천국인가?" 라는 것이다. 지도자 자신을 위한 것인가? 추종자들을 위한 것인가? 이다. 어떤 목사님이 열심히 교회 일을 하셨다. 그러나 그 분의 설교와 행동 가운데서 교인들은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 했다. 성도들이 목사님이 열심히 하시는데 그것이 자신을 위한 열심인 것을 알고 나면 그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신을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주라! 듣기에 불편한 농담이 있는데 성도들이 종종 "양들을 잡아먹고 살찌는 목사" 라는 말이다. 아낌없이 주는 목자 때문에 살 맛 나는 양들은 어디쯤 있을까? 받기 보다는 주는 것이 편할 때 까지는 지도자 일수 없다.

의무를 다하라!(누가17:10)
기독교 지도자는 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취감도 느껴야 하겠지만 나의 성취감 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도 아니다. 기독교 지도자의 성격을 잘 말하는 것이 청치기적 의식이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주인의 뜻대로 잘 관리하고 운영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나를 지도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분의 요구에 대하여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 조차도 늘 말씀하신 것은 " 나를 보내신 이의 뜻" 이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뜻이란 바로 의지 인데 곧 하나님의 의지 이다.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의지를 행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기독교 지도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이다. 지도자는 나의 뜻을 이루려는 욕구와 하나님의 뜻을 피하려는 의지와 필연적인 갈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죽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또한 지도자의 의무를 행하는 자세를 말씀하셨다. 누가 복음 17장 10절에서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라고 말하라고 하셨다. 지도자는 먼저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땅히 하여야 할 나의 일에 불과 했습니다. 라고 말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가셔서 하나님께 "마땅히 하여야 할 나의 일을 하고 왔습니다." 고 보고 하셨음이 틀림없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기의 업적을 보고하시기 보다는 순종과 의무를 행한 것을 가지고 가셨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니다. 업적을 보고하는 것은 하나님을 귀찮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업적 쌓기에 광분하고 있는가? 죽도록 충성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라 단지 나의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고백을 할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지도자 일수 없다.

추종자들의 필요를 알라!(누가11:1-4)
간혹 사람들이 지도자들에 대하여 깊은 실망을 느낄 때가 있다. 지도자들의 경우 대체로 자신이 충분히 지도자가 될 자질 또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주장과 무었을 할수 있음과 지식들을 강변할 때가 많다. 추종자들은 듣고는 있지만 마음으로는 깊은 실망을 느낀다. 그들은 "저 사람은 우리의 마음과 요구를 받아 줄수 없는 사람이다." 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애완동물들의 음식을 만드는 회사에서 한번은 최고의 영양가와 보기에 좋은 개의 밥을 만들기로 했다. 영양사들 동원하여 과학적으로 영양가가 가장 많게 만들고, 개들이 보는 순간 군침을 흘릴수 있도록 모양과 색깔도 예쁘게 만들었다. 회사 간부들은 이것을 대대적으로 만들어 시판하기로 하고, 또한 회사의 사활을 걸기로 했다. 그리고 날개돋힌 듯 팔려나갈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결국 이 회사는 망하고 말았다. 왜 망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다 좋은데 문제는 개들이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지도자들이 때로는 좋은 생각과 계획들을 제시하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마음 깊이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과 초점이 맞지 않을 때 실패는 따 놓은 단상이다. 이 문제가 때로는 정치학 박사보다도 서민과 더불어 살았던 정치가들이 더 정치를 잘하거나 추종자들을 더 많이 거느리고, 목회학 박사보다도 일반 교인으로 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평범한 목회자가 더 목회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말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의 요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욕구를 아셨고, 그래서 주의 기도라 알려진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가버나움에서 5천명의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배불렀으나 육의 배가 굶주렸던 것을 아시고 배를 채워주셨다. 병든 자, 슬픔에 잠긴 사람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치료하시고, 위로 하시고, 용서하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그들 속에 계셨다. 그래서 그의 이름도 임마누엘이 아닌가! 우리를 지키시는 임마누엘 일 뿐 아니라 우리의 속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임마누엘이 아니신가? 추종자들이 침묵 속에서 바라는 요구를 읽어 내고, 귀 기우일수 있기 전 까지는 지도자 일수 없다.

가르치고 나누라!
때로 지도자들과 추종자들 사이에서 일어나서는 안될 갈등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지도자도 나쁘지 않으며, 오히려 좋은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좋은 지도자 이고, 추종자들도 잘 순종하고, 열심이 있어서 좋은데도 갈등이 상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인은 많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의 실패에 있다. 어떤 지도자는 앞장서서 좋은 것을 외치면 나머지는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살아계시는 동안 사람을 낚아 보지를 못했다. 오히려 애매한 말고의 귀만 단칼에 날려 보냈다.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미숙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시고 삶을 나누셨는데 더욱 성숙하고 성장 할 때까지, 그리고 실천 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리시면서 그렇게 하셨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셨는가? 승천 하실 때 그 사람 낚는 일을 성령께서 하실 것이라고 약속으로 남겨두고 가실 정도까지 하셨다. 예수님게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자신의 사역과 그 사역을 위하여 해야만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늘의 권세가 무엇인지 이적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귀신을 내어 쫒으시며 마침내 이루어 질 하늘나라의 승리를 나누셨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주무시면서...... 마치 옛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어린아이에게 밥을 주기 전에 자기 입에 넣어 잘게 부수고 난 후 그 밥을 입에 넣어 주었던 것 처럼(위생은 둘째로 하고서라도) 그렇게 가르치시고 나누셨다. 그렇게 하시므로 예수님에 대한 오해, 진리에 대한 오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사역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 하셔서 블필요한 갈등을 미리 제게 하셨다. 만약 지도자들과 추종자들 사이에 이러한 나눔의 긴 시간과 대화가 있다면 상당수의 갈등요소가 제거 될 것이다. 어떤 때는 대화를 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또 다른 갈등의 요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이것은 가르치고 나눔에서 파생한 문제가 아니라, 잠복되어 있던 갈등이 노출되었거나, 대화와 나눔의 방법의 미숙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나누어 지도자와 추종자들 사이의 담을 헐 수 있기 전 까지는 지도자 일수 없다.

나가는 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이 된 후에도 여전히 몸으로 사람들을 보살폈다. 그는 바쁘고 많은 직무에도 불구하고, 수제가 났거나, 전염병이 휩쓸고 간 곳에 직접 가서 상황을 살피고, 그들의 힘든 것과 요구를 알고, 구호품을 주었다. 사람들은 그레고리우스 1세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구호품을 받아서 그나마 목숨을 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이 위대한 교황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위대한 교황의 별명이 "주의 종들을 섬기는 종" 이었다. 주의 종들을 섬기는 종! 듣기에 가슴에 진동이 일고, 마음에 새기기에 값지고, 입으로 말하기에 고상하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종으로 섬기는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권위가 있어야 하고, 무엇인가 힝이 있어 보여야 하고, 무엇인가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소위 어떤 목회자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없으면 교인들에게 차이고, 목회자들 사이에서 차이고, 세상에서도 차인다. 얼마나 비 성경적인 모습인가! 아니 그만큼 왜곡된 목회자상과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쯤 이면 목회자를 보면서 예수님의 품을 느낄 수 있을까?

                                                                            어느 목회자의 글에서...

출처 : 주님의 숲
글쓴이 : 주님의 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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