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경공부 자료실

[스크랩] 성서고고학 - 서민호교수

힐링&바이블센터 2006. 5. 5. 20:03
서    문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은 성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가장 좋은 선물은 성경이라고 믿는다. 구세주로부터 오는 최선의 것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또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톤은 "나는 하나님의 성경을 최상의 철학으로 여긴다. 나는 어떠한 세속 역사속에서 보다 더 확실한 진실성을 성경속에서 발견한다. 세상에 밝혀진 어떤 역사책보다 성경의 역사적 진실을 더욱 더 믿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훌륭한 분들이 위대한 책으로 고백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이 성경책을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는 어느정도의 책으로 평가할까요?
  어떤 책을 아무 선입관 없이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서검증법입니다. 옛날에 기록된 책이 얼마나 가치 있고 정확한 책인가 하는 것을 검증하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에 의하면 원본이 없는 기록문서의 경우에 현재 가지고 있는 사본만을 가지고, 원본과 사본과의 정확성 정도를 검증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사본이 어느정도 믿을만한 것인가 하는 것을, 요즘 TV에 나오는 진품, 명품 가리듯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통해서 호머의 일리아드 라든가, 세익스피어의 희곡들, 성경 등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고서검증법의 기준은 첫째, 사본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둘째, 사본이 원본으로부터 만들어진 시간적 차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셋째, 많은 사본들 중에서 사본과 사본 사이를 비교해서 오류가 적으면 적을수록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정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의 수많은 책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알려진 책이 고대 그리스의 역사문학가인 호머가 지은 일리아드입니다. 그리스의 왕비 헬렌이 터키 해변에 있는 트로이 왕국에 납치되어 감으로서 그리스의 많은 군인들이 트로이에 가서 열심히 싸우다 안되자 나중에는 오딧세이 장군이 제시한 목마전법을 이용해 결국은 트로이 성을 함락시켰다는 내용의 대서사시입니다.
신약성경의 신빙성

  그러면 신약성경과 호머의 일리아드를 고서검증법으로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일리아드는 사본의 수가 643개이고, 최초의 사본은 500년 후인 기원전 400년에 기록되었고, 책과 책 사이의 오류가 5%입니다. 그 반면에 신약성경은 사본의 수가 무려 24,633권이나 되고 원본이 만들어진 AD100년에서 최초 사본이 나타난 것은 불과 25년 후에 바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본 사이의 오류의 정도는 0.5%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결국 일리아드의 정확성과 신약성경의 정확성을 비교해 보면, 일리아드를 정확도 1로 잡았을 때 신약성경은 8000배나 더 정확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검증결과입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에 비해서는 더욱더 정확한 책으로 검증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책중에서는 제일 정확한 책인 것은 알겠는데, 0.5%는 왜 오차가 있느냐 하는 것을 문제 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오차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0.5% 중에서 80%에 해당되는 0.4%는 철자의 잘못으로 밝혀졌습니다. 즉 "모든 교회에게 문안하노라" 하는 내용이 "모든 고회에게 문안하노라" 하는 식이지요. 이것은 누가 봐도 '교회'를 '고회'로 잘못 썼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고,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나머지 20%는 접속사의 오류로 밝혀 졌습니다. 즉 'A 그리고 B 그리고 C'라는 내용이 'A 콤마(,) B 콤마(,) C'하는 식으로 접속사가 생략된 것입니다. 이것역시 누가 봐도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비록 오류 자체는 0.5%이지만 사실은 오류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정되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파피루스에 기록된 신약성경 히브리서 입니다.

  왼쪽 그림은 초대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록하였던 필기도구들입니다. 요즈음과 같은 볼펜이나 만년필은 없고, 단순한 펜에 먹을 찍어서 파피루스나 양피가죽 등에 기록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신빙성

  그럼 이제부터 구약성경은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940년대까지만 해도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 사본은 기원 후 900년 경에 기록된 맛소라 사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의심을 받아 왔습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가 기원전 400년 경에 기록되었고, 맛소라 사본은 그로부터 1300년이나 후에 쓰여진 사본이므로 많은 오류가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1940년대 중반에 굉장한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1945년 이스라엘 동부지역 사해바다 부근의 쿰란언덕에서 베드윈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동굴속에 들어갔을 양을 찾기 위해 돌을 던져 보았습니다. 일일이 들어가 보기가 어려우니까 호주머니에 돌을 넣고 다니다가 동굴안에 던져 본 것이지요. 그러다가 양이 있으면 돌을 맞고 소리를 내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양이 있는 것을 확인하려 한 것이지요. 그런데, 한번은 양 소리가 안 나고, '쨍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가 보물상자를 묻어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굴안에 보물은 없고 항아리가 있었는데, 그 안에 쓸데 없어 보이는 가죽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목동은 이것을 '별 볼 일 없구나. 엿이나 바꾸어 먹자'라고 생각하고 아주 싸구려 값으로 골동품 상에게 팔았습니다. 그 골동품 상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뭔가 비싼 것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훨씬 비싼 값으로 시리아 정교회의 주교에게 팔았고, 그것이 미국으로까지 건너갔다가 이스라엘 구약학자의 집념의 추적 끝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비밀거래로 이스라엘로 돌아와 연구됨으로써 BC 125년 경에 기록된 구약성경의 사본, 즉 사해사본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사해사본은 말라기 서가 기록된 지 불과 27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때 기록된 것이었습니다. 맛소라 사본이 1300년이나 후에 기록되었다고 비난이 심했는데, 사해사본의 발견으로 인해 공백기를 1100년이나 줄여 놓게 되었고, 구약성경 마지막 책 말라기서 원본이 쓰여진 뒤로 270여년으로 사본의 연대를 좁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많은 고고학자들이 사해 바다 부근 쿰란지역의 11개의 동굴에서 구약성경사본뿐 아니라 신약성경사본도 일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맨위의 그림은 사해바다 근처 언덕에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지역입니다. 여기저기 동굴들이 많이 보이지요. 그러한 동굴 중의 하나가 그 아래 그림처럼 생겨 있고, 저 멀리 사해 바다가 보입니다. 가파른 언덕위의 동굴에 많은 고고학자들이 들어가서 참으로 귀한, 양피가죽에 기록된 구약성경 사본들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 구약성경들은 오른쪽 그림과 같은 항아리, 즉 장독 속에 들어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아래그림은 사해사본의 이사야 서가 기록된 부분을 펼쳐서 보인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지요. 사해사본은 예루살렘에 있는 '책의 전당'에 보관-전시되어 있으며 그 건물은 항아리 두껑모양으로 되어있는데 폭탄이 떨어져도 파괴되지 않도록 튼튼하게 건축되어 있습니다.
  사해 사본과, 1025년 후에 만들어진 맛소라 사본, 이 두 개가 얼마나 비슷한가를 비교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두 사본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맛소라 사본은 사해 사본과 똑같은 성경이었고, 그 이전 성경의 원본과도 똑같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모세가 기록하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성경과 똑같은 성경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말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이렇게 천년이나 지나도록 한 자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보관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대인의 풍습속에서 발견됩니다. 유대인중에서는 오로지 성경만을 복사하는 성경복사 전문가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탈무디스트(Talmudist)라고 불리었는데, 그 탈무디스트들은 성경을 복사하는데, 열아홉가지의 복사규칙이 있었습니다. 복사규칙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 항상 같은 복장을 입고 복사를 해라. 이 옷 저옷 바꿔 입으면, 마음도 바뀌고 태도가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검은색 잉크만을 써라. 이색 저색 쓰면 마음이 산란하다는 것이지요. 또 깨끗한 동물가죽 위에다 복사하고, 글씨와 글씨 사이의 간격은 가능하면 좁게 써서 머리카락 하나 정도 들어갈 정도로 빡빡하게 써라. 나중에 문선명이나 어떤 이단들이 자기 뜻대로 추가시켜 '그게 내니라' 하면 안되지 않습니까? 엉뚱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평생 성경을 베끼다 보면, 한 예로 시편 23편 같은 경우는 완전히 외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외워서 써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잘 아는 귀절도 암기력에 의존하지 말고 반드시 원본을 보고 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즉 '야훼', '엘로힘' 이런 말을 쓸때는 왕이 들어올지라도 절대로 쳐다 보지도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혹시 잘못 쓰면 큰일 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실제로 탈무디스트들이 성경을 복사하다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이 침공하여 야훼 이름 쓸 때 일어나지 않아서 칼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베낄 때는 방금 베낀 사본을 보고 베끼지 말고 원래 베꼈던 원본을 보고 베끼라 하는 등등의 철저한 규칙속에서 복사를 했기 때문에 사해사본이나 맛소라 사본의 기록이 똑같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성경을 지켜온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현대의 탈무디스트들이 히브리어로 성경을 복사하는 실제 광경입니다.
  지금부터는 성경에 기록된 많은 고고학적 사건들이 전문 고고학적 조사 및 발굴의 수준에서 볼 때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갈대아 우르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런 말이 성경에는 기원전 1400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11장 31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갈대아인의 땅 우르라는 곳에 살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성경의 이 말씀을 한낱 전설과 같이 우습게 알고 수천년을 지나 왔습니다. 근대까지만해도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지금의 이라크 땅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짐으로써 정말 갈대아 우르지방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에 지도가 나와 있는데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주욱 유지되고, 지중해 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유지가 되지요. 메소(사이) 포타미아(강)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끝 부분, 바로 이 곳이 우르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1800년대 중반부터 많은 고생을 하며 연구를 하였습니다. 왼쪽 그림은 갈대아 우르 지역을 발굴하고 있는 실제모습입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수메르


  주택단지들을 파 들어가 보다가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사 책에 보면 인류 문명의 최초의 문명으로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메르문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습니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2005. 2. 26. 조선일보 기사 '대영박물관이 온다'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라크 남부의 고대유적도시 우르. 1920년대 발굴에서, 서기전 2600~2400년으로 추정되는 여왕 푸아비의 무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10명의 여인이 순장(殉葬)됐는데, 한 여인의 주변에서 금빛이 번쩍였습니다. 황소의 황금 가면이었습니다. 황금 황소는 목제 11현 수금(竪琴·하프의 일종)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발굴단장 L. 울리는 “순장된 한 여인의 손은 현이 있던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20세기 발굴 유물 중 최고품의 하나로 꼽히는 4500여년전 수메르문명의 수금은 이렇게 발굴됐습니다.
  우르 지역에 살던 수메르 인들이 섬기던 신들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이 '이난나' 여신인데, 이것이 이난나 여신의 상입니다. 머리에 있는 이것은 뿔이 아니라 '달'(초생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흥분도 하고 땀도 흘리고 하면, 비도 많이 오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기간동안 모든 여성이 남성들과의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수 있게 하였으며, 신전은 공공연한 난교의 장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이난나 여신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으로 불렸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들어가면서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으며, 그리이스로 가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으며, 결국 로마로 가서 비너스가 되었습니다. 그 신이 다 그 신이고, 그 원조가 이난나 여신입니다. 의학적으로 성병을 베네리얼 디지즈(Venereal disease, VD)라 부르는데요, 이 베네리얼이란 말은 비너스의 형용사로서 비너스 여신으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비너스 여신이 관련된 병이라는 것이지요. 비너스 신전의 모든 성직자들은 여자들인데, 이 여사제들의 성은 완전개방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입니다. 쐐기라는 것은 곤충 중의 풀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Wedge)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요, 그 어순( 語順)이 서양이나 중동 사람 말이 아닌,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고요, --'가', --'을' 등의 토시를 붙여서 말을 구성하며,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뒤에 '님'자를 붙입니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지요. 그러한 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입니다. 예수님의 별명도 '샤론의 장미'이지요. 찬송가 89장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 인데요, 그것은 바로 무궁화 꽃의 학명과 동일합니다. 그 옛날 고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동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유래의 언어와 자취와 그들이 사랑한 꽃을 가져와 극동에 위치한 우리나라까지 대장정을 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메르인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라는 청년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밝힌 '길가메시 에픽'에 관한 기록입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지요.
하 란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만 순종을 하여, 하란까지만 가서 살다가 늙어서, 거기서 죽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가지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고 하셨지요.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해서(우르를 떠날때는 60세 가량) 그 하란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 때에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 것이지요. 그래서 갈대아 우르도 중요하지만 이 하란이라는 지역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근래에 와서 이 하란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이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은 지금의 시리아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결과 과거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수메르보다 몇 백년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그 문명을 세웠던 나라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에블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에블라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발굴된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을 분석한 결과 에블라 문명을 세운 왕의 이름이 '에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믿던 신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그 이름은 '야'였습니다. 아마도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왼쪽 그림은 현재의 하란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보시면 하란에 있었던 에블라의 대문명을 암시하는 족보가 있습니다. 여기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인'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요? 어떤 잘못된 견해로 이집트에서 나온 문자를 토대로 '하비루'라는 노예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이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이 '히브리'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결국 노아의 아들 셈, 셈의 아들 아르박삿, 그 아들 셀라의 아들인 '에벨'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이 에벨이 큰 문명국가를 이루었고, 에블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통 셈족의 국가인데, 어떤 원인에 의해 수메르인에게 멸망당합니다. 강 아래쪽의 더 강성한 국가 수메르의 사르곤 왕이 에블라를 멸망시킨 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끌고 갔는데, 이들이 그곳에서 우상이나 만들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영적 분별력을 주셔서 새로운 땅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는 가다 말고 자기 조상 에벨이 세웠던 찬란했던 나라 '에블라'의 고토 하란 땅에 머무르다가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침내 가나안까지 들어갔습니다. 에벨 시절에 번성하던 에블라는 수메르인들이 강해지면서 망하게 되었고, 니므롯의 제국 때 바벨탑을 세우다가 세상이 나누이게 되었는데, 그때가 벨렉의 시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벨탑과 지구라트

  지금부터 바벨탑 사건에 얽힌 고고학을 살펴 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1장 1-9절에 보시면 '온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서로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니...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니...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여기서 성이란 도시를 말합니다. 개정개역판 성경에 보시면 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성이 아니라 거대한 도시였던 것이지요. 이를 누가 주도했을까요? 바로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을 만든 사람 '니므롯' 입니다. 니므롯이 통일제국을 만든 뒤 여러 가지 이질적인 종족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쉽게 다스리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와 같이 도시부터 만든 이후에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이제 바벨탑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살펴 보겠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그라트라고 합니다. 그 신전중에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그라트가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역사를 가진 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미 지그라트는 오래된 탑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기록뿐 아니라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BC500년 경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건축물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는데,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다고 합니다.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되는 것이지요. 63빌딩보다 더 높습니다. 수천년 전에 이러한 어마어마한 탑을 지은 것입니다. 다 지었으면 더 높았겠지만, 중간에 하나님이 공사를 중단시켜 그 정도로 그친 것이지요

  오늘날 이라크 지역에 많은 지구라트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그라트의 무너진 수많은 벽돌을 다시 쌓아서 복원하였습니다. 후세인이 관광목적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수천년전에 만들어진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마르둑(Marduk)'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이라크에 있는 많은 지구라트 중 하나의 모습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아랍 사람들은 오늘날 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진의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작습니다. 이 건축물과 또 이와 관련된 후대의 여러가지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아래 김성암님의 글에 질 나와 있습니다.
니므롯

  고대 근동에 최고의 영웅이던 니므롯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창세기 10장에 상세히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함의 아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사냥꾼'이란 히브리어 뜻으로 볼 때 '전쟁을 즐기는 사냥꾼', '사람을 죽이는 사냥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니므롯'이라는 이름의 뜻은 '님(높은 사람)' + '마랏(반역한다, 대항한다)'으로서 높은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반역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그(니므롯)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이는 큰 도시라)을 건축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아갔다'는 말은 쳐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앗수르는 셈의 자손들로 큰 민족이었으나, 니므롯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그 결과 동방으로 이주해서, 아사달에 도착해서 홍익인간의 기치를 내건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동방으로 이주할 때 앗수르족속만 온 것은 아니고, 야벳족속의 일부와 함족속의 일부도 함께 이주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 티그리스강 주변의 비옥한 땅에 고대도시 니므롯도 있었고, 바빌로니아의 다른 고대도시들이 있었습니다.
  왼쪽 그림이 티그리스 강입니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고 있지요. 강 가에 자리잡은 이 도시가 바로 니므롯 성입니다.
  아래 왼쪽은 그 니므롯 지역의 발굴현장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와서 발굴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니므롯 지역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장식들로 뒤덮힌 찬란한 고대도시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아래 오른 쪽).
 
  오른 쪽 그림은 고대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니므롯의 도성을 복원한 복원도입니다. 비록 바벨탑은 무너졌지만, 니므롯은 대제국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니므롯이 죽은 후 가족들에 의해서 니므롯이 마르둑 신으로 화했다고 조작되었습니다. 고대 갈대인들이 세운 모든 나라의 왕들은 이 니므롯의 화신인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권위가 인정되었습니다. 아래 왼쪽 그림 은 앗시리아의 살만엣셀 왕의 모습인데요, 마르둑 신에게 인정을 받고 왕권을 받는 모습입니다. 결국 니므롯은 사후에도 계속 갈대아지역을 통치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니므롯 지역의 신전 입구에서 발견된 거대한 인면수신의 조각입니다. 영국 고고학자들의 수많은 고생 끝에 현재 이 조각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이 모두 망한 뒤에도 마케도니아를 거쳐 니므롯의 권위는 계속유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비석에도 니므롯이 최고의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아래 왼쪽).
  아래 그림은 그리이스 사람들이 세운 영웅의 만신전, 즉 팡테옹입니다. 여기서도 니므롯은 중앙의 가장 높은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는 서열이 한참 아래였습니다.











헷족속

  지금부터는 성경에 나오는 헷족속(힛타이트)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샀습니다. 거기에 자기 아내를 묻고, 후에는 자기도 묻히고 아들 이삭과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족속이라고 성경에 여러번 나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힛타이트 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힛타이트 족속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때문에 성경이 허무맹랑한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힛타이트 족속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헷족속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됨에 따라서 힛타이트 문명권이 규명되었는데, 오른 쪽에 보면터키 지도가 있습니다. 붉은 색을 칠해놓은 이곳이 힛타이트의 중심부 입니다. 힛타이트의 수도는 '핫투사'인데 터키의 현재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핫투사를 수도로 해서 터키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비옥한 초생달) 전체를 지배하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왼편 그림은 지금의 터키 땅에 있는 힛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의 왕궁터입니다.






  오른편 그림은 힛타이트인들의 신전의 모습입니다. 거대한 돌기둥에 돌사자 두 마리가 보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거대한 청동으로 된 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신전의 규모도 대단합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힛타이트인들이 짧은 시간동안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하게 된 비결이 무엇인지를 고고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바로 이것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힛타이트의 전차입니다. 속도전에 능했고,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활을 쏘고 하니까 일반 민족들이 그 속도에 도저히 방어를 할 수가 없어서 힛타이트인들이 중동지역을 장악하게 된 것이지요. 힛타이트의 전차가 바로 그들 나라의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힛타이트의 전차가 얼마나 감명이 깊었는가 하니, 이것은 이집트의 왕들이 세운 비석입니다. 이집트의 역사 자랑을 잔뜩 해 놓고는 힛타이트의 전차를 그려놓았습니다. 힛타이트 군이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이집트를 침략해 왔으나 그것을 막아냈다 하는 뜻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이집트가 패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의 기록만 이렇지 고고학적 조사결과 이집트가 힛타이트에 점령되어 조공도 바치고 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힛타이트 족속은 전차뿐만이 아니고 금, 은, 동 특히 철을 다루는 솜씨가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사 책에도 최초의 철기 문화는 힛타이트 족속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나옵니다. 철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대단히 앞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금속공예는 예술적 수준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아름다운 사슴을 정교하게 조각한 술잔입니다.

  그런데 힛타이트 족속이 남긴 기록은 역시 수메르 인들이 만든 설형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술과 전투력은 앞서 있었지만 학문적인 면에서는 수메르인들의 것을 그대로 이어서 쓴 것입니다. 왼쪽 그림은 히타이트의 수도 핫투사에서 발견된 유명한 비석인데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서로가 평화를 맺도록 하고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한 평화조약 문서입니다. 인류 역사로 볼 때 평화조약문으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그것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 있는데요, 바로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총회장에 들어가시면 오른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요, 히타이트의 하투사에서 발견된 최초의 평화조약문을 확대하여 동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힛타이트와 이집트 사이의 평화조약은 오래 가지 않고 결국은 다시 전쟁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에돔족속

  다음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에돔 족속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6장 8, 11절, 기타 여러 곳에 보면 에돔족속이 있었고, 에돔 족속의 최초의 조상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에돔이라고도 불리었고, 세일 산이라는 곳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어떻게 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것이 성경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에서라는 말이나 에돔이라는 말이나 모두 붉다는 말입니다. 에서가 털이 많고 붉게 생겼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세일산 자체가 아주 붉은 산입니다. 그래서 에서도 자기 색과 같은 땅을 좋아해서 거기서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에돔족속이라는 것도 성경에만 기록되어있었지 다른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천년간 성경이 허위라고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중동의 고고학적 발견이 붐을 일으킴에 따라서 세일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탐사하다가, 에돔족속이라는 집단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다는 사실이 발굴되었고요, 오른 쪽 그림은 집단 주거지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색깔이 붉지 않습니까? 들어가는 입구는 이렇게 좁은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면은 안쪽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래서 이곳도 지금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 들어가면 전반적으로 붉은 바위로 된 협곡인데요, 그 바위를 뚫고 집도 짓고, 신전도 짓고, 무덤도 만들고 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여기에서 거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BC 3세기경에 에돔족속들이 동서양 무역사업을 활발히 행하여 굉장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나바티안 상인집단을 형성해 가지고, 동서양에서 본 안목으로 자기들 거주지에 투자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페트라 폴리스라든가 여러 가지 화려한 집들을 짓고 아주 잘 살았습니다(오른 쪽 그림).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달력에서도 많이 나오는 페트라 입니다. 이것의 건축구조는 보시는 바와 같이 어디서 돌을 가져다가 다듬어 만든 것이 아니고, 바위산을 파 들어가 만든 조각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 덩어리를 파서 그 속에서 생활한 것입니다. 조금만 실수해서 조각이 떨어지면 작품전체가 망가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나바티안 상인들이 거금을 투자해서 유명한 조각가들을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아래 그림은 에돔족속의 왕이 살던 집이요, 무덤입니다.
  야곱자손과 에서자손 사이의 투쟁이 계속 내려왔는데요, 그 중에서도 절정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 당시의 왕인 헤롯이 바로 에돔 족속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괴롭히다가 헤롯이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이들 자손 사이의 악연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장군의 인도로 팔레스틴 지역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있는 성중에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다른 성은 열심히 전쟁을 해서 빼앗았는데, 여리고 성은 기적으로 빼앗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 6장 15-17절을 보시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생도 안하고 성에 들어가 완전히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안 믿는 분들에게는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까? 기독교인은 유치원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고고학자들과 대영 박물관 탐사팀 등등이 19세기부터 열심히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사실이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자 가스텡과 여러 학자들은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발굴된 성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습니다. 또한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습니다.


  왼쪽 그림은 고고학자들이 실제로 여리고성의 유적을 파고 들어가서, 성경에 기록되었던 여호수아 시대의 실질적인 성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여리고성을 발굴한 모습입니다.




  왼쪽 그림은 여리고성 폐허에서 발굴된 식량단지들입니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됩니다. 그때 되야 항복을 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리고성은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정복된 것입니다. 또한 대영 박물관의 탐사 팀에 의해서 여리고성은 여호수아 시대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여리고 성의 성경적 함락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고대 여리고 성벽을 고고학적으로 복원한 모형입니다.
  여리고 지역에는 여호수아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그 이후에도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여리고라는 도시가 굉장히 오래된 도시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예수님 시절에는 그 유명한 삭개오가 여리고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구원을 받게된 사건이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지금부터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에 관한 고고학적 발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 17장 48-51절의 기록에 의하면 엘라계곡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블레셋 사람 중에 골리앗이라 불리는 거인때문에 이스라엘 용사중 많은 사람들이 벌써 엎어져 죽은 상황에, 다윗이라는 소년이 자기 형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형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러 갔다가 그 거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멸하는 꼴을 보고 어린 다윗이 의분을 느껴 나가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때에 다윗이...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 어린 소년이 물매를 들고 나가서 한 방에 정통으로 맞추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혼비백산 도망하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왼쪽 그림은 다윗과 골리앗이 격전을 벌였던 엘라 골짜기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고대 블레셋 민족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블레셋 군인의 모습입니다. 철모를 쓰고 전쟁에 나가는 용사들의 모습, 이것은 영화 '삼손과 데릴라', '다윗과 골리앗' 등에도 보시면 나옵니다.
  아주 재미있는 발견이 이루어 졌습니다. 1993년 5월에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견을 하다가 이마에 돌이 박혀있는 거인의 해골을 발견했습니다. 이마 좌우거리를 측정하여 거인의 키를 계산해 본 결과 그 키가 2미터 90센티나 되는 거대한 체격의 거인이었음이 밝혀졌고, 연대측정 결과 약 BC 1000년경의 다윗시대에 죽은 것으로 측정되었습니다. 발견장소가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체격이 거대하였고 이마에 돌이 박혀 있고 연대가 다윗 시대임을 종합해 볼 때, 이 해골의 주인은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골리앗의 유골임이 확실하다고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왼쪽 그림은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거인의 해골입니다. 이마를 한번 보십시오. 물매돌이 아직도 정통으로 이마 한복판에 확고히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신문의 영어표현이 절묘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물매에서 날아간 돌이 아직도 거인의 이마에 박혀 있다." 이와 같이 영어로 쓰여 있습니다.
앗시리아의 침공

  오른 쪽 그림은 니네베와 그 부근에서 발견된 앗시리아의 부조인데요, 앗시리아의 강력한 왕인 사르만에셀이 사자를 사냥하는 장면입니다. 이 나라가 주변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세력을 키워가다가 결국은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되었습니다. 남유다보다 북 이스라엘이 더 타락했기 때문에 더 일찍 멸망했습니다.
  왼쪽 그림은 앗시리아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는 장면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돌로 구성된 큰 성 위로 활과 칼로 공격하면서 들어가는 장면과,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장면이 보입니다. 앗시리아 군인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습니다. 사람의 목을 자른 모습입니다. 아래쪽에 물고기가 보이는 곳은 강(江)입니다. 이 강은 앗시리아의 강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앗시리아의 침공시에 남 유다는 힘이 약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약 136년을 더 견뎌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많은 고고학자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앗시리아가 얼마가 강력한 나라인데, 힘도 없는 히스기야 왕이 이기긴 뭘 이기겠냐며 믿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발굴된 실린더처럼 생긴 앗시리아의 비석에서 성경의 기록과 똑같은 내용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앗시리아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이 산헤립의 원통형 비문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산헤립왕은 속이 상해서 고국 앗시리아로 돌아갔는데 쿠테타가 일어나서 자신의 아들들에 의해서 신전에서 암살 당해 죽었습니다. 그후 에살핫돈이라는 아들이 산헤립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열왕기하 20장 20절에 보면 산헤립의 침공 때 히스기야왕이 땅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것이 고고학적으로 그대로 발굴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곳이 예루살렘의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왼쪽 그림은 히스기야 왕 시절에 급히 판 수로입니다. 완전히 암석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성안과 바깥에서 각각 400m씩 파 들어가 가지고 800m의 수로를 팠습니다. 성 바깥의 기혼샘이라는 샘으로 부터 성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혼샘 윗 부분은 막아 버렸지요. 이것을 급히 만들었는데, 다행히 산헤립의 침공 전에 완성을 하여, 성안에 물이 있으니까 끝까지 버텨 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을 에워싼 앗시리아 군은 대치상태에 있다가 여호와의 신이 그들을 쳐서 패배하여 도망을 치게 되었다고 열왕기하 19장 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기혼샘에서 수로를 파서 물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 바로 이 실로암이라는 인공 못입니다(오른쪽 그림). 예수께서 맹인의 눈에 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해서 눈을 뜬 기적의 못이 바로 이곳이지요. 지금도 눈병있는 사람들은 이 물 떠간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남 유다도 타락을 해 버리는 바람에, 앗시리아의 뒤를 이은 (역시 갈대아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지만) (신)바벨로니아라는 나라에게 여러 차례 침략을 당했고, 이 때 다니엘 등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로니아 최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 유다는 결국 멸망되었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법궤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문에 예레미야가 감추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 영화 제1탄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에 보면 이 사라진 법궤를 찾아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벨론과 다니엘

  바벨론에 끌려 간 다니엘은 '다니엘서'를 기록하는데, 그의 예언대로 바벨론의 멸망 다음에는 메디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등의 나라가 나타났습니다. 다니엘서의 예언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다니엘서'가 그 사건들이 다 이루어진 후에 기록된 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후대에 기록하고 이름만 '다니엘서'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대해서 성경의 신빙성이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서에는 헬라어(그리이스어) 단어가 세 개 들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벨론 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고 알렉산더가 지배하던 '헬라' 즉, 그리이스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보면 그리이스와 바벨로니아는 느부갓네살 시대 이전부터 이미 광범위한 무역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말(言)도 서로 오고 갔다는 것이 밝혀져 있고, 세 개의 단어가 무엇인가 조사해 보았더니, 그 단어들은 모두 그리이스의 악기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최소한 한 개의 악기는 다니엘 시대 이전부터 바벨로니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악기였습니다. 예전부터 써 오던 악기이므로 그리이스 말 그대로 바벨로니아에서 쓰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니엘서에 수메르 단어가 8개나 들어 있습니다. '수메르'라는 나라가 언제 부터입니까? 아브라함보다 이전 아닙니까? 다니엘서가 기원전 500년경이라면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전이므로 1500년도 더 된 단어가 8개나 남아 있다는 말이지요. 느부갓네살 통치 시대 이후에는 수메르 언어가 전혀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다니엘서에 수메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적어도 느부갓네살 시대, 혹은 그 이전에 다니엘서가 쓰여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저작시기가 느부갓네살의 통치 시기로부터 먼 훗날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수메르 단어로 확정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조차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서에 히브리어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도 포로로 잡혀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내용에 있어서 허무맹랑한 사실이 너무 많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요, 한 예를 들면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외국의 포로중의 일부를 잘 먹이고 갈대아 학문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있는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너무나 악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로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바벨로니아의 정책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대 바벨로니아 지역을 발굴하다가 특별한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건물의 비석에 그 건물의 용도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비석에는 포로로 잡혀 온 왕족과 귀족에게 갈대아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잘 먹이고 가르쳤다는 성경의 기록이 실제로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용광로 불 속에 집어넣었다는 기록이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불 속에 던져 넣으려던 바벨로니아 군인들은 방화복을 입고 했었는데도 오히려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불길이 강했으나, 세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용광로가 발굴되었는데, 그 용광로의 용도에 대해 쓰여진 비석에 보면 바벨로니아의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 시키는데 사용되는 용광로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타는 용광로 속의 세 명의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였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또 많은 비난을 받았던 부분은, 다니엘이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아서 사자 굴에 떨어졌는데, 사자들이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다가, 다니엘을 고발했던 사람을 잡아넣었더니, 뼈까지 뜯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계깊은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고대 바벨론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거대한 웅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 웅덩이는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나운 짐승의 먹이로 떠밀어 넣는데 사용된 웅덩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잡아먹힌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 사건은 적어도 사실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갑자기 느부갓네살왕이 미쳐서 이슬을 묻혀가면서 풀을 먹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려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정신을 차려 돌아온 뒤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던 것 같습니다. 바벨로니아의 고고학적 발견 가운데 느부갓네살 왕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명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명각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왕이 미친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느부갓네살왕의 명각입니다.




 왼쪽그림은 다니엘의 무덤인데요, 지금 이란(페르시아)의 수사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페르샤와 그리스

  대제국 바벨로니아도 결국 파사(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다리오) 장군에 의해 멸망당하고, 다리우스는 키루스 (고레스)왕에 이어 페르시아의 황제가 되고 페르시아의 왕궁인 페르세폴리스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림은 페르세폴리스에 조공을 바치러 온 수많은 사신들의 벽화입니다. 60여개의 나라들이 페르시아에 조공을 바치러 나아 왔습니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이지요. 그 엄청난 통치하에 남들도 잘 대해주고 했으면 좋았을텐데, 크세르세스 황제때 바다 건너 그리이스까지 다 정복하려 하다가, 스파르타,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들에 불과한 그리이스에게 전쟁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라톤이란 것도 시작되었고요. 그리이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크세르세스는 국내에서 폭정이나 하면서 시시하게 지냈는데,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이 바로 크세르세스 왕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페르시아의 대단한 왕이었던 다리우스와, 그 앞에 조공을 바치려고 나아오는 그리이스 사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에서 하도 조공을 많이 바치라고 하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이 쳐들어가 전쟁을 일으켰지만 페르시아는 그리이스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왼쪽 그림은 다리우스 왕의 도장입니다. 이것을 두루룩 돌리면서 찍으면, 이렇게 나옵니다. 실린더형으로 되어 있지요. 이 전성기를 누리다가 결국은 그리이스가 힘이 더 강해져서 알렉산더 대왕 때, 철천지 원수로 여겨온 페르시아를 완전히 진멸합니다. 알렉산더는 본래 점령을 하면 융화정책을 썼는데, 역사적 이유 때문에 페르시아만은 용서하지 못하고 완전 초토화시켰습니다. 그 웅장하던 페르세폴리스는 모래바람에 묻혀버리고 그후 수천년 동안 잊혀졌다가 근래에 다시 발굴되게 되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아테네 도시의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이 신전은 아테네 도시의 수호신 아테네 여신의 신전입니다. 아테네는 평생 처녀로 살았기 때문에 처녀신 아테네로 불리었습니다. 그리스말로 처녀는 파르테노스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아테네 파르테노스'가 된 것입니다.
로마와 기독교


  그러나 그 위대했던 알렉산더왕과 그 나라들도 모두 망하고 결국은 멀리 있던 나라인 로마가 중동을 점령하고, 전 세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줄리어스 시이저의 암살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옥타비아누스가 최초의 가이사로 오른 것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명하여 호적하라 할 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 그 가이사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 시절에 중동과 서구에 가장 안정된 평화가 왔기 때문에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라고 불리고, 왼쪽 그림은 그당시에 건립된 로마의 도로입니다. 오른쪽 길가의 양과 비교해 보면 도로의 넓이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길부터 닦았습니다. 이렇게 로마가 전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여기까지 모든 역사의 흐름이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다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보았던 금신상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이 다 맞아 떨어진 것이지요. 참으로 성경은 놀라운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그 당시에 로마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도 남아 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에도 예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요, 오른쪽 그림은 빌라도의 비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별로 학식도 없었고 숨고 도망다니던 사람들이었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너무나도 담대하고 똑똑한 사람들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그 시대에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이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렇게 시체만 들어있던 지하묘지 카타콤에서 집회를 하고 하다가, 결국은 황제의 가정에까지 복음이 다 전해진 것입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경우는 그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 기독교의 세력이 필요하게 되어, 급격히 양성화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경건하지 못한 형식적인 기독교인이 많이 생기면서 초대 기독교정신은 희석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보급


  그러다가 그 후에 카톨릭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성경보다 전통을 더 숭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시작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을 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개발입니다. 그 귀하고 만지지도 못하던 성경책을 대량으로 막 찍어내게 되자, 성경을 너나 나나 다 볼 수 있게 되니까, 루터가 성공한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어긋났다면,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하여 성경이 역사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 성경이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중국어 성경이 만들어진 뒤, 급히 한국말로 다시 번역한 것이, 한말에 서상윤 등이 「예수셩교젼셔」라고 해서 처음으로 성경전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셩교전셔 요한복음 제 1장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안네 제일장. 처음에 도가 이샤되 도가 하나님과 함께 하니 도난 곳 하나님이라. 이 도가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하뫼 만물이 말무암아 다 지여사니, 지은바난 한나도 말무지 않고 지음이 없나니라..." 그때는 '말씀이 계시니라' 해서는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말'이라는 단어를 수준 낮게 보는 것이지요. '도' 틔는 이야기를 해야 실감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후에 개정판이다 개역판이다 뭐다 해서 조금씩 바뀌다가 1998년 9월에 개역개정판 성경이 나온 것입니다.
결 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인 올브라이트 박사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고고학에 의하면 구약전승의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와 19세기의 중요한 역사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과다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 의심들은 지금도 종종 제기되고 있는데, 그러한 의심들이 점차 근거가 없는 것들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고학적 발견들이 거듭되면 될 수록 성경의 내용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어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성경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틴의 고고학 전문가인 넬슨 글루엑 박사도 평생 성경고고학을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부인한 고고학적 발견은 전혀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성경의 역사적 진술들을 개괄적으로, 혹은 세세하게 확증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성경은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책인 것입니다.
출처 : 낙송의 집
글쓴이 : 낙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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