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 음(신앙)
〈성구와 금언〉
★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 : 4).
★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시로 하인이 나으리라(마 8 : 13).
★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행 15 : 9).
★ 신앙도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다. 평화와 사랑을 주는데서 신앙도 또 일어나는 것이다(A. 아우구스티누스).
★ 신앙이란 소망하는 것의 바탕,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며 그리하여 그것이 본질이 된다(A. 탄테).
★ 마음으로부터 믿는 것이 의해서 사람은 올바르고 또한 의롭다(루터).
★ 신앙은 인생의 힘이다(톨스토이).
★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겁낼 것 없습니다(에드워드).
★ 믿는 자는 이미 달아났다. 신앙이야말로 우리들 삶의 핵심이다(실레겔).
〈실 화〉
★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미국 역사상 대통령으로 제일 큰 업적을 남긴 대통령이 바로 링컨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남북전쟁이 치열할 때에 이상하게 북군이 남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실패만 한다.
그때 사령관은 당황한 나머지 대통령에게 전황 보고를 하였다.
"각하, 어떻게 하여야 좋겠습니까. 우리 북군이 남으로 진격하기만 하면 패하고 돌아옵니다."
이때 링컨 대통령은
"여보시오, 사령관, 당신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줄 믿습니까?" 라고 도리어 질문을 하였다.
"그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신가요 불의의 하나님이신가요?"
"그야 물론 의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면 사령관에게 한 마디만 더 묻습니다."
"사령관이 지금 하고 있는 전쟁은 의의 전쟁입니까, 불의의 전쟁입니까?
이 물음에 낙심하고 있던 사령관은 두말을 못하고 용기를 백배하여 나아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의의 하나님이요 의로운 자의 편이 되심을 확실한 믿음으로 싸우게 될 때 마침내 승리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다.
★ 어떤 부인이 자기 남편을 전도하여 교회나오게 하느라고 무던히 애를 쓰고 노력을 아끼지 않고 기도를 많이 했으나 아무래도 남편이 예수 믿을 것 같지 않더란다.
그래서 실망하여 아무리 애써도 안되겠다고 여기던 중 이상하게 하루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남편의 고무신을 신고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기를 "주님 믿습니다. 내 남편의 고무신이 벌써 교회에 와있지 안사옵니까. 어느땐가 저의 남편이 여기 나올줄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더니 그후 얼마 후에 그 남편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었다.
오직 그 부인의 믿음 때문이었다.
★ 어느 신학생 전도사가 하루는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낙심천만입니다."
"왜요?"
목사님께서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얘기를 하였다.
자기는 기도를 많이 했고, 신·구약 성경을 30독을 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었다고 한다.
"주여 믿습니다."
그랬더니 더욱 믿음이 생기었다. 그 후에 40일 금식 기도를 했더니 더욱 믿음이 강해져서 의심이 없어졌다.
그 순간에 이 젊은 전도사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단다. "베드로는 믿음을 가지고 물 위로 걷지 않았느냐. 나도 물위로 걸어 보자." 그래서 그는 조수지로 나아가서 "주여 믿습니다."하고 물 위로 걸었는데 물에 빠져 죽을뻔 하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 믿음이 약해져서 지금은 맥이 없어 죽겠다는 것이다.
그때 목사님께서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당신 물에 빠져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하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보라 하였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걸었지만 당신은 물 위로 걸어 오라는 말씀이 없지 않았오." 하고 기도해서 돌려 보냈다.
★ 순복음 중앙교회에 다니시는 한 자매님의 아버지께서 요도암에 걸려 석달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분은 요도암 때문에 제대로 소변을 볼 수 없어 방광에다 고루 호수를 연결해 소변을 뽑아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하라고 해서 퇴원한 그는 이왕 죽을 목숨 기도원에 가보자는 가족들의 권유로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다.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잘못 실수하여 그만 방광에 연결되어 있던 고무호수가 쑥 빠져버렸다. 본인과 가족들은 이제 큰일이 났다고 걱정했는데 호수가 빠진 자리에서 피도 나지 않고 그 즉시 소변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요도암이 믿음으로 인하여 온데간데없이 그에게서 사라졌다.
★ 일본 최대의 철학자 다나베엥은 30년간 경도대학 교수였다.
그러나 경도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 60여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가 구원을 받은 성구는 이것이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구절의 말씀이 나를 구원하였다라고 그는 말했다.
★ 영도교회 박 정현 성도 이야기를 여기 적어 본다.
그는 북한에서 천주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영세까지 받았다.
6·25사변 당시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의지가 강했고 독립성이 강했다. 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약국을 경영했는데 아주 잘 되어 곧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인생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다 갖고 있었다. 돈도 있고, 아름다움도 있고, 낙도 있었다. 이런 그에게는 신앙이란 멀고 먼 추억으로 사라졌다. 그러던 1972년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온 몸이 까닭도 없이 쑤시고 아팠다. 약을 먹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곧 메디칼센터에 입원하여 진찰을 해보았는데 관절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이것이 악회되어 뼈 속에 염증이 생기고 극기야는 뼈가 썩어 들어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리를 절단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침상에 누워서 날마다 절망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마음 속에는 공허감, 병신이라는 열등감, 그리고 병신이라는 낙오는 늘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때 한 전도자가 그녀를 찾아와서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박 선생도 그 절망이 기쁨으로, 회의가 확신으로 바꾸어지는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박 정현씨는 〈그렇다. 예수를 믿는 길밖이 사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불편한 다리를 끌고 근처의 영도교회 강 목사님을 찾아가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절망 속에서 소망을 갖고 신앙으로 다시 약국을 경영했다.
그 약국이 잘 되어서 그녀의 아이 둘을 대학까지 공부시켰고 신앙 생활을 잘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지금도 그 약국에 가노라면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하는 찬송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핍박을 이긴 믿음
저는 노 형억 전도사가 과거에 당한 핍박과 시련 속에서 신앙으로 공산당의 올무에서 벗어난 일에 대하여 여기에 적어 본다.
노 전도사님은 황해도 봉산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막내라는 구실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다.
그는 1942년 나이 15세 때에 교회에 나가게 되어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 해 두 해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창조주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형들은 철저한 불신자요, 어린 동생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동생에게 교회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신앙에 불이 탔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기대했으나 기대는 완전히 이그러졌다.
이곳 저곳에서는 공산당의 살인극이 벌어졌다. 공산당들은 무식하고 가난한 자들을 포섭하여 감투를 씌웠다. 그리고 그들의 과업수행을 위해 갖은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과 신앙인이라면 여기에 현혹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형들은 공산당에 포섭되었다. 그의 큰 형은 리당 세포 위원장이요, 둘째 형은 평당원, 셋째 형은 사리원 부서장으로 있었다.
이들 셋은 모여서 동생 노 형억을 죽이기로 다짐했다. 예수 믿는 동생 때문에 출세에 지장이 많기 때문이었다.
최후로 권고하기 위하여 셋째 형이 형억에게 왔다.
"형억아 네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가 간단하다.
그렇게 한다면 좋은 직장, 좋은 집, 그리고 어여쁜 아가씨와 결혼시켜 주겠다. 그래도 예수 믿겠느냐?"
그러나 그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는 못 살아요"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 형의 눈빛과 안색이 달리진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날 밤 정방산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루는 친척아저씨 되는 사람이 찾아 와서 내려가자고 권하여 내려오다가 내무서원에게 붙잡혀 결국 잡히게 되었다. 〈그래도 형들은 한 피받은 형제인데 설마 안풀어 주기야 할까〉하는 기대를 걸었으나 형들이 더 악랄했다. "이 새끼 잘 만났다. 어디 맛 좀 보라." 욕을 하고 가 버렸다. 이때 누이가 간식을 갖고 찾아와 위로했으나 형들은 그것까지 빼앗아 갔다.
하루는 그가 감방에 들어온 밥을 먹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그의 형이 오더니 "야 기도해, 너는 사상이 아주 썩었어. 그 밥을 누가 준것인데 기도한단 말이냐" 하면서 그를 구두발로 짓밟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노 형억은 낙심치 않고 신앙생활에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도를 계속 하였다.
"주님 원하신다면 목숨만 살려주시면 목숨 다하여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전쟁은 극심해졌다. 전쟁이 심각해지자 김 일성은 모든 죄수들까지 다 군인으로 끌어갔다. 노 전도사는 숭실전문학교로 끌려가서 다 떨어진 장교복 하나를 얻어 입고 일선으로 나아갔다.
4일만에 서울 이화 여자대학교에 도착했다. 그 당시 이곳은 공산군의 본부로 쓰였다. 그가 한 방에 들어 갔을 때 성화 한 장을 보고 그것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였다.
계속 전진한 그들은 안동까지 내려갔다. 그도 안동까지 갔는데 연일연야 쉬지 않고 걸었기 때문에 발바닥이 부릅터 더 걸을 수 없게 되어서 안동 장로교회 안에 마련된 군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는 동료들을 위해 입원 중에도 열심히 일하며 정성껏 위로하고 간호해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이들은 자유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인민군은 유엔군에게 패하여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병원에 있던 일행들은 원주까지 후송되었다. 어둠 속에서 행군 도중 그와 일행 30여명은 뒤로 처지게 되었다.
결국 그는 국군 주둔 지역의 치안대를 찾아가 투항하였다.
처음에는 국군들도 그들의 투항을 믿지 않았다.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귀순을 받아 들였다.
30여명은 자유의 품으로 나왔고 다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지금 강원도에서 훌륭한 목회자로 일하고 있다.
★ 채 필근 목사님은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살피는 순회 목사가 됐다.
그래서 어느 때는 선교부의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누어 주곤 했는데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중에 아주 외딴 산 길을 걷게 되니 으슥한 곳에 이르러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변소에는 쉬파리가 날아오고 돈이 있는 곳에는 도둑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비는 오고 날은 어두워 한 마을에 갔더니 객주집은 하나 밖에 없는데 주인을 불러 여쭈웠더니 독방은 없고 합숙방은 있다고 했다.
그래 할 수 없이 합숙방을 들어 갔어니 웬 사람이 아랫목에 누워 있는데 관상을 보니 꼭 도둑같이 보인다. 그 아랫목에 있던 사람 역시 채 목사님을 볼 때 꼭 도적놈 같이 보았다.
그래서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저놈이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나 않을까 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 쪽이 부시럭하면 다른 쪽에서 "에헴"하고 헛기침을 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세웠는데 아침에 여관 주인은 식사를 겸상으로 차려 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겸상을 하여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마주 않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네, 저는 채 필근 목사입니다"라고 했더니.
그가 깜짝 놀라면서 "아니 채 필근 목사님이세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저는 ○○교회 장로입니다."
서로 인사하고 보니 목사와 장로사이인데 서로 상대방을 알지 못했으니 밤새도록 의심하고 도둑인줄 알고 뜬 눈으로 밤을 세웠던 것이다.
★ 어떤 여자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집에 들어오지를 않더란다. 그래서 이 여자는 남편을 생각할 때마다 지독하게 속이 상했다. 그리고 남편이 한 번이나 집에 들어오면 욕을 하면서 때린다. 그런 후에 어느 날 남편이 이혼장을 가지고 와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라고 한다.
그래서 이 부인은 "도장을 찍어주기는 찍어 줄 것이니 기한부로 합시다. 100일 후에 생각해보고 이혼하자"고 하였다. 이 말에 남편도 "그러하자"고 한다.
부인은 남편의 문제로 목사님과 상의했더니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남편이 지금까지는 바람을 피우고 자매님을 돌보지 않았을지라도 이제부터는 남편이 완전히 집에 들어오셔서 자리에 누워계신 것이나 자리에 앉아 계신 모습을 그리면서 기도하십시오" 하신 그 말씀을 듣고 집에 돌아온 후론 빈자리지만 남편이 들어와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보신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계속하여 기도하였다. 어쩌다 남편이 한 번 집에 오면 좋게 대해 주었다.
그랬더니 후엔 완전히 들어오게 됐다. 100일 지난 다음에 부인이 "여보, 우리가 이혼장에 도장 찍기로 한 날짜가 지났는데요. 이혼장을 가져오십시오.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십시다." 했더니 "별 소리를 다 한다"고 하시면서 그 후론 재미있게 잘 살았답니다.
★ 어느 여집사님은 기도할 때 "주여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하고 집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하니 믿지 않은 남편이 듣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여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귀가 잡수신 분인가 보지" 하고 핀잔까지 주더란다.
어느 날 밤에 도적이 그 집에 침입했다. 도적놈 여럿이 집담으로 뛰어 넘을 때 "쿵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집사는 이를 알고 남편을 깨웠다. "여보 지금 도적들이 담을 넘어 집에 들어왔어요" 하고 귓속말로 말했더니 남편이 그 소리를 듣더니만 놀래가지고 "뭐뭐 도 도 도둑놈이 왔어" 하면서 겁을 집어 먹고 떨고 있는데, 이 여집사는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라고 소리쳤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도둑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버렸다. 〈믿습니다〉하면 마귀가 물러 간다는 이야기다.
★ 지난해 그러니까(1976년)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씨가 죽었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 뉴우스 위크지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그는 말년에 사람을 두려워하고 병균을 두려워 한 나머지 호텔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수염이 배꼽까지 이르고 뒷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고 손톱과 발톱이 너무 길어서 구부러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병균을 두려워한 나머지 음식을 닭통조림과 스프 밖에는 먹지를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20억 달러를 모은 억만장자 휴즈의 마음에 의심이 들어오자 그는 그시로부터 패인이 되고 말았다. 그가 죽을 때에는 너무 못먹는 나머지 영양실조에 걸려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믿음이 없는 생활은 휴즈의 말년처럼 20억불의 거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양실조에 걸려서 죽는 것과 같은 처참한 사태가 일어 나게 됩니다.
믿음 예화 100선
1. 사랑의 절정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기 때문에 안고, 업고,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철길에서 조약돌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고 있을 때 기차가 달려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철길에서 놀고 있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뛰어들어 엄마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른이 된 후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라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백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그것이 아닙니다.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찬송 작사자 하버겔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라고 읊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박종순
발렌타인은 고대 로마에 살았던 한 젊은 그리스도인의 이름입니다.
많은 초대교인들처럼 발렌타인은 그의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자주 깊이 사랑하는 자들을 생각했고, 그 자신의 안녕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알리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감옥 독방 창문 너머, 손이 닿지 않는 한 곳에 제비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그는 몇 개의 하트 모양의 잎들을 뜯어 구멍을 뚫어서 "발렌타인을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냈습니다. 다음날 또 다음날 계속하여 그는 더 많은 메시지들을 보냈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내용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시작된 성 발렌타인 데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사랑을 보여 주시려고 많은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독생자를 주시어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십시오. 그분께 그분의 사랑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드리십시오.
한 전도사가 도자기 공장 지대에 사는 한 사람을 방문하였다. 그 사람은 젊었을 때는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도사는 그 집에 도착하여 유리 상자 속에 든 두 개의 좋은 꽃병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야! 참 멋있군요. 아주 귀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주인은 고개를 휘저으며 전도사에게 말했다.
"이 세상 돈을 다 준다 해도 저 두 개의 꽃병은 절대로 팔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몇 년 전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지요. 말하자면 마귀에게 영혼을 맡겨 놓고 다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흙 한 무더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쓸데가 없어서 버린 것이었지요. 나는 그걸 집에 가져와 반죽을 하고 모형을 만들어 구워 보았습니다. 결국 나는 쓸모 없던 흙으로 두 개의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거야!' 그때부터 저는 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내맡기고 하나님께서 저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길 바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쓰레기장의 흙무덤 같은 나를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
어느 시골의 한 가정에서 딸이 가출을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자 소녀는 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죽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이 그리워 고향집에 내려갔다. 밤중에 가 보니 자신이 가꾸던 장미꽃도 보이고 뛰어 놀던 잔디밭도 보였다. 달밤에 자기 집을 바라보니 담장 옆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그 소녀는 문 가까이 가, "아버지-" 조용한 음성으로 불렀다. 그러자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뛰어 나왔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느냐? 네가 집을 나간 뒤 대문을 닫아 보지 못했단다. 언젠가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혹시 밤중에 딸이 돌아올까 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가 딸이 부르는 작은 소리를 듣고 뛰어나와 그 딸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승리의 그리스도
전쟁중 우리 나라에 있었던 실화라고 한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어머니는 그만 그 집을 다가지 못하고 길에서 진통을 하기 시작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다.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죽고 말았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 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다.
그 아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다.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아들은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나왔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사랑과 행복에의 초대, 양은순
신문배달을 하는 소년이 있었다.
하루는 장난감 가게 앞을 지나가다 중세의 범선을 본떠 만든 깜찍한 보트를 보게 되었다. 그 보트를 꼭 갖고 싶었지만 소년이 사기에는 값이 너무 엄청났다. 그래서 소년은 스스로 보트를 만들기로 했다. 소년은 날마다 가게의 진열장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책도 보면서 틈틈이 모은 돈으로 재료를 샀다. 나무를 자르고, 돛을 달고, 페인트를 칠하고, 자기의 모든 기술과 정성을 쏟아 드디어 멋있는 보트를 만들었다.
소년은 완성된 보트를 들고 강물에 띄었다. 강물에 뜬 보트는 아름답고 훌륭했다. 소년의 가슴은 뿌듯했다. 아, 그런데 보트가 강 한가운데에서 하류 쪽으로 급히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애써 만든 보트를 잃은 소년은 날마다 신문배달을 마치고 강가를 뒤졌지만 보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일이 지난 어느 날, 소년은 어느 고물상에서 우연히 자기의 보트를 찾아냈다. 주인에게 자기의 것이라고 사정을 했지만 갖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석 달이나 신문배달을 하며 돈을 모았다. 드디어 돈을 마련하여 보트를 샀다. 보트를 사 오던 날, 소년은 보트를 끌어안고 얼굴에 비비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돈이 보낸 편지, 이의용
13세기 스페인의 귀족이며 명문 대학의 교수였던 라몬 럴은 자신의 유망한 장래를 포기하고 모슬렘교도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갔었다. 그는 두 번이나 그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일년 반을 감옥에 감금당했다. 노인이 되어 성벽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어 갈 때에 그의 마지막 말은, "오직 예수"였다. 죽기 직전에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목사 안수식 때에 "오, 주 하나님 당신께 나 자신, 나의 아내, 나의 자녀, 그리고 나의 모든 소유를 드립니다"라고 말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만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취소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핍박이 심해질 때에, 겔린드 물러는 믿음을 버리고 성경 읽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화형당하게 된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에게는 아내와 네 자녀가 있었다. "당신의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는가?"라고 재판관이 물었다. "만일 하늘이 진주이고 땅이 금덩어리이고, 내가 그 모든 것의 소유자라면, 우리가 겨우 빵과 물만 먹고 살게 될지라도 내 가족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 그러나 결단코 그리스도만은 포기할 수 없다." 그는 교살되어 화장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의 희생을 잊지 않으셨다.
기쁘게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J. 오스왈드 샌더스
어느 학교 선생님에게 열 두 살 먹은 딸이 있었습니다.
그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딸에게 어머니 역할까지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일 때문에 딸에게 시간을 충분히 내주지 못하는 게 문제였고, 그것 때문에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서 크리스마스 휴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크리스마스 휴가 때는 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휴가가 시작된 첫날 딸아이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혼자 지내면서 식사 시간 이외에는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도 그랬고, 또 다음 날도 그랬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계속 그랬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하루하루를 외롭게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자 크리스마스 트리에 선물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뜨개질로 짠 한 켤레의 양말이었습니다. 딸아이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까지 이걸 다 짜야 한다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제가 방문을 잠그고 지금까지 했던 건 바로 이 뜨게질이었어요. 이젠 다 짰어요. 아빠 양말이에요! 좋으세요?" "암, 좋고말고, 얘야, 정말 예쁘게도 짰구나, 고맙다." 아빠는 딸아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딸을 덥석 껴안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 이 철없는 아이야. 양말은 시장에 가서 사면 되지 않니? 난 양말 같은 건 원하지 않아.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 말이야! 난 너와 함께 지내며 너의 사랑을 받고 너의 관심을 사고 싶었던 거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캐롤 메이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
무엇보다도 먼저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실 것이다. 우리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지상의 가장 귀중한 관계들을 배제하시고 "너는 이 모든 것들을 미워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인상적인 말씀을 하신다. "미워하다"라는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용어는 아니다. 그는 여러분과 나에게서 우리가 최초로 느끼는 사랑, 즉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우리의 가장 귀중한 사랑 즉 우리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신다.
W.Y.플러튼
메릴리는 성적 부도덕이 잘못된 것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19세 때에 그녀는 모든 성적 지식을 다 배운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성적 호기심을 갖기 있었고 억제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합리화 과정을 시도하였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부도덕을 저질렀다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제도 용서하시리라고 확신한다.' '다윗왕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는데도....' '아무도 알 리가 없지. 그래서 나의 행동이 아무에게도 거침돌이 되진 않을 거야.' 거듭거듭 몇 주일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마침내 메릴리는 자신이 '그 일을 해도 좋다'고 확신하였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드라이브를 하다가 멋지게 생긴 히치하이커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반항적인 도전을 하였다. "도대체 어째서 안되는 겁니까?" 그녀에게 놀랄 만한 대답이 즉각적으로 들려왔다. "왜냐하면 내가 너에게 하지 말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란다." 메릴리는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아, 기다리고 있는 그 히치하이커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녀가 합리화시킬 수 없었던 한 가지 이유가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임이 명백해졌다. 단순히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맞지 않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상대방을 생각해 주는 것이다.
"너희 믿음에....사랑을 공급하라."
그리스도인의 인격 계발, 스탠리 C. 볼드윈
여러 해 전에, 정해진 시각에 어떤 큰 오르간 연주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르간에 펌프질을 할 사람이 그만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 유명한 작곡가가 자신이 그 펌프질을 하겠노라고 자원했습니다. 왜 그런 보잘것없고 천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작곡가는 "음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한 일도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그를 섬기는 가운데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결코 보잘것없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봉사의 일이라면 가장 작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모두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의 전도 책임자로 있을 때 그는 가끔 전도를 희망하는 후보자를 면접하였다.
한번은 봉사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을 만나 "왜 당신은 해외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하고 물었다. 선교사 후보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때 허드슨 테이러는 말하기를 "그 모든 동기들은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가 당신을 어려운 시험과 시련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가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진실로 좋아해서 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닙니다. 나와 처는 먼지와 이 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냄새가 나는 이런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진정한 봉사를 하게 할 것이다.
인생을 다시 한번, 배훈
6.25 직후 나병 환자 수용소에 미국 로터리 클럽에서 회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미국에서 파견나온 간호사 선교사 한 사람이 나병 환자의 고름이 흐르고 있는 상처를 간호하고 있는 뜨거운 인간애의 장면을 포착하였습니다. 한 사업가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을 찍으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백만불짜리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에게 백만불을 주어도 이 일을 못할 것이다."
간호사 자매는 이 사업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일을 못합니다."
이 대답을 듣고 사업가가 당황하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소?"라고 물었더니 자매가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향해 보여 주신 조건 없는 그 놀라운 사랑! 내가 그를 신뢰했을 때 나에게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시고 지금 내 삶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방식을 따르십시오.
굉장히 가난한 아주머니 한 분이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그녀는 빵과 우유를 샀지만 고기를 몇 근 훔쳤습니다.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할 때 그녀는 빵값과 우유값만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계산하던 아가씨가 "아줌마, 그 가방 좀 열어 보세요"하고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열지 않겠다고 우겼으나 경찰이 왔을 땐 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방에서 고기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당연히 경찰서로 끌려갔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재판관만이 형법을 사용하여 선고를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법을 만든 사람들이며 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그 법의 뒤에 있는 정신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그 가난한 아주머니를 부드럽게 심문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현재 다섯 명의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것, 집도 절도 없으며, 몇 달 동안 기름진 음식이라곤 한 번도 입에 대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알게 된 재판관은 그 아주머니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그 가족이 살기 적절한 집을 제공해 주고 연금을 지급받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재판관에게는 법의 정신이 법조문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간음하다 붙잡혀 온 어떤 연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 하는 형식에 치우친 사람들의 행위를 저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제정자인 동시에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잘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연인의 주위 환경을 아셨으며, 그녀가 지금 회개했다는 사실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율법 그 자체보다 율법의 정신이 예수님께는 더 중요합니다.
인간 심성의 외침,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믿는 바에 따라 행동의 다른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어떤 행위가 용납되거나 용납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이러한 일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여성들은 미국 여성들의 짙은 얼굴 화장을 눈감아 주는 것이 어려웠다. 동시에 미국의 신자들은 큰 맥주잔을 들고 있는 독일인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자문하였다. 각 나라마다 견해들간의 갈등이 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자전거를 타는 것에 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흡연과 음주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기 사항이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기초한다. 은혜에 의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또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가질 권리를 인정해 줄 것이다.
당신은 그 누군가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기꺼이 그만두겠는가? 즉 그 행동이 당신 보기에는 나쁘지 않더라도 어리거나 연약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하지 않거나 포기할 수 있는가? 자신의 명분을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려는 이러한 일들을 행할 때 당신은 평화뿐만 아니라 기쁨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당신은 타인의 행복을 위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의하면 이러한 기쁨은 자신이 포기한 '잃은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가인 미국의 아이언사이드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듣던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아주 놀라운 얘가를 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
우리는 법보다 위대한 원리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은총의 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나를 다루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은총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옳고 그름의 원리 - 율법적인 원리 - 가 아닌 은총의 원리에 의해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 무엇입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
어느 교회에 처음으로 취임한 신임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첫 취임 예배에서 아주 멋지고 놀라운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우리가 정말 목사님을 잘 모셔왔다고 생각했겠지요. 그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취임 예배에서 한 설교와 똑같은 설교를 또다시 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교인들이 늘어갑니다. 그래도 이제 두번째이니까 혹시 잊었거나, 아니면 취임 예배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설교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이해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번째 주간에도 이 신임 목사님은 첫번째, 두번째 주간에 하신 설교를 똑같이 하셨습니다. 당신은 상상할 수가 있습니까? 똑같은 설교를 세 번 들었을 때의 교인들의 반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셔와도 단단히 잘못 모셔왔다"고 말할 것입니다. 한 용감한 교인이 목사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언제 새로운 설교를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정말로 삶 속에 적용할 때 그때 저는 새로운 설교를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은 무슨 목적과 동기로 이 말씀을 받으십니까? 아니면, 행동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이 말씀을 받으십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순종할 때 참 자유를 얻습니다.
어떤 성경 주석이나 설교도 일체 없이 오직 성경 한권을 읽는 것만으로 원시인들이 구원을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아마죤 강에서 선교사업을 하는 한 선교사를 통하여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남부에서 있었던 일인데, 부부 두 세사람이 함께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아마추어 성경 공부입니다. 그런 단순한 공부였지만 그들은 기쁨을 발견하고 생활이 변하여서 나중에는 삼십 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수십 명의 선교사들이 배출되었고, 특히 치과 의사 부부가 한 달에 4만 불씩 벌던 직업을 버리고 몇 백 불의 월급을 받으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선교사들이 대학 교육을 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나왔지만, 요즘의 선교사들은 평신도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운동을 하러 다닙니다.
어떤 목사님이 나에게 한 부인의 간증을 들려 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글을 읽을 수 없어서 하루에 오백원의 품삯을 주며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고용했는데, 읽어 주던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그 부인보다 더욱 신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어도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신앙이 자랄 수가 있습니까? 성경을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1850년 1월 6일, 영국의 콜체스터 시는 심한 눈보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한 십대 소년은 그가 늘 다니던 교회에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들어가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 교회에서는 출타한 목사님을 대신하여 한 평신도가 서툴게 설교를 하였다. 그가 설교한 본문은 이사야 45장 22절의 말씀이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 달 동안 이 소년은 마음의 곤고함과 죄에 대한 괴로움에 빠져 있었다. 비록 교회에서 자랐다 할지라도(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었다. 그 서툴게 준비한 대리 설교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다만 본문을 반복해 외칠 뿐이었다. "사람은 바라보는 것을 배우고자 대학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설교자는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그때, 이 설교자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새 방문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방문자를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이, 자네는 아주 피곤해 뵈는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그때 그 젊은 청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위대한 설교가 스펄젼의 회심의 경험이었다.
능력 가운데 살라, 워런 워어스비
차디찬 지난 며칠 간 영하의 날씨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파트에 사는 한 가정에서 새 한 쌍을 선물로 받아 매일 아침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받으라고 초롱을 베란다에 걸었다가 저녁이면 들여오곤 하였습니다.
그 동안 새는 자라서 어미새가 되었고,어미새는 어느덧 알을 품더니 두마리의 예쁜 새끼를 갖게 되었으며,그 새끼들은 초롱 속에 만들어 준 둥지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베란다에 둔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영하의 날씨에 밤을 그냥 보내 버렸습니다. 아침에서야 새 초롱을 생각하고 허둥지둥 나가 보니 아뿔사 어미 새는 둥지에 몸을 덮은 채로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실수로 인해 생명을 잃게 한 것을 생각하고 가슴을 치며 죽은 어미새를 집었더니, 아! 거기 얼어 죽은 어미새 밑에 한마리의 큰 새와 두 마리의 새끼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미새의 지극한 헌신은 육체로 둥지를 덮어 얼어 죽으면서까지 남은 생명들을 사랑한 기막힌 얘기였습니다. 차가워지는 혈관을 의식하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여기 세상의 한파,죄악의 한파가 몰아 닥쳐 모두가 죽음에 직면하였을때 차디찬 십자가에 몸을 던져 스스로 차가워지면서 세상이라는 둥지를 덮음으로 그 한파 속에서 뜨거운 혈액으로 소생케 한 사랑,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극히 인간을 사랑하셨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랑의 얘기는 바로 인간은 던져진 무목적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존재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한 수도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훌륭한 설교를 하겠다고 알리며, 모든 사람들이 모이기를 강요했다. 시간이 흐르자 성전은 노인과 청년들로 가득 찼다. 모든 사람은 그 예배를 통하여 훌륭한 설교를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 수도사는 설교를 시작하지 아니하였다. 대신에 촛대를 꽂아 둔 곳으로 가 밝게 타고 있는 초가 꽂힌 촛대를 집어들고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상이 조각되어 있는 제단으로 올라갔다. 그 수도사는 조용하고 밝게 타고 있는 촛불로 못박히신 예수님의 팔을 비추어서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였다.
다음에는 촛불을 옮겨 역시 못박히신 예수님의 다른 한팔을 비췄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때 촛불은 못박힌 예수님의 두 발을 밝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 수도사가 일어나서 돌아섰다. 그때에도 손에 쥐고 있던 촛불은 그의 얼굴을 밝게 비춰 모인 사람들은 그 수도사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그의 뺨을 흘러 내리는 눈물을 볼 수가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는 축복기도를 하고서 사라졌다.
로버트 슐러
오래 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아이가 있습니까?"
그 물음에 원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있어요. 열 살짜리 여자아이인데 매우 흉한 꼽추예요. 단지 이름만은 좋아서 머시 굿페이스(Merch Goodfaith: 훌륭한 믿음의 은혜라는 뜻)이지요."
"바로 그런 아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고서 그 아이와 함께 떠났다.
35년이 지난 후, 아이오와 주 고아원 감사실의 실장은 한 고아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가정은 매우 특별한 곳인데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며 특히 그곳 원장은 사랑이 넘쳐 흐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곳에 수용된 어린이는 모두 잘 보살펴지고 있으며, 원장은 풍부한 사랑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 후에 피아노 앞에 모여 섰을 때 나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 원장의 눈과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내가 그 원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고 꼽추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데 놀라워했다. 그 원장의 이름은 머시 굿페이스이다."
어떤,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추하고 보기 흉한 고아를 보살펴 줄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머시 굿페이스는 사랑의 벙법을 배우고 또 그 사랑을 백 배로 증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돌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인생 최대의 갈망, 로버트 슐러
나는 김성준 선교사님과 같이 지내면서 그분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을 볼 때마다 참 부끄러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내가 목사로서 이분처럼 구체적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열정을 가졌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당신은 왜 선교사로 갔습니까?"하고 그분께 물었더니 "그 야만인 지역은 전파가 통하지 않습니다. 또 글이 없서서 책을 줘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몸으로 직접 가는 방법 외에는 다르게 그들을 사랑하는 표시,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감동을 사랑으로 옮겨 행할 때는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사람들의 감정은 부풀어 올랐습니다. 사랑해야겠다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그 설교, 예수님의 실제 설교, 사랑의 그 많은 설교 앞에, 예수님의 사랑의 행동 앞에 제자들과 사람들은 많이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높은가?" 하는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에게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친히 대야에 물을 떠 오시고 허리의 수건을 동이시면서 자신의 몸 전체로 사랑의 수고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은 실제로 어렵습니다. 참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십계명 강해, 홍정길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작은 동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열네 살 된 윌리암이라는 소년은 동리에서 평판이 대단히 나빴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지도를 할 수 없었던 거칠고 못된 소년이었다. 더구나 그는 많은 학생들에게 점차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학교 당국에서도 큰 문제였다.
그때에 새로 부임해 온 교사가 한 사람있었다. 이 새 교사는 윌리암 소년에 대한 말을 듣고 그를 한 번 지도해 보겠다고 했다. 동료 교사들은 모두 말렸다. 공연히 봉변이나 당할터이니 손을 대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 교사는 윌리암 소년을 차근차근 관찰해 가면서 그의 형편과 성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희망이 없다고 낙인이 찍히고 틀임없이 악한 사람이 될 곳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윌리암 소년을 친절과 이해와 끈기로 지도해 갔다.
교사는 못된 그 소년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참된 자존심과 포부를 넣어 주었다. 그 교사는 눈물로 씨를 뿌린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뿌려진 씨앗이 싹을 트고 땅에 뿌리를 내고 자라는 것이었다. 이 소년은 나쁜 버릇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밤잠을 안 자며 공부를 하였다. 그는 대학에 진학을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우등이라는 명예로 졸업을 했다. 윌리암은 계속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결국 미국 대법원의 부판사가 되었다. 윌리암은 뉴욕 주의 주지사가 되었고 드디어는 미국의 국무장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 몹쓸 인간으로 점찍혀 버림받았으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 한 교사의 지도로 이처럼 위대하고 뜻 있는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수년 전 한 아가씨가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중에서도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다. 주일학교에서는 이 여선생님에게 새 옷 한 벌을 가지고 보비의 집을 방문하여 계속 출석을 잘하도록 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다. 그러난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다. 주일학교 부장을 찾아가 이제 더이상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주일학교 부장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 보십시오"하고 격려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목사이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만의 영혼을 주께로 나오게 했다.
G.D. 제임스
어떤 선교사가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데 그 엄마가 주인을 보고 "주인님, 나도 아들과 함께 사 주십시오. 저희 모자가 함께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며 애원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안돼"하며 아들만 끌고 가는데 그 엄마는 생명을 내걸고 함께 사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엄마도 울고, 아들도 울고.... 한번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던 그 선교사는 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 그 두 모자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선교사가 풀밭에서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다. 실신이 된 선교사의 뒷발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자 엄마 노예가 입을 대어 독을 빨아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거의 죽었던 선교사가 일어나 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던 엄마 노예는 얼굴이 퉁퉁 부어 죽어 있었다. 엄마 노예는 자기를 사 준 그 고마운 선교사,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자유를 준 이 선교사를 위하여 사망의 독을 입으로 빨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나의 생명을 건져 주신, 아니 우리 가족 전체를 살려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있을까?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신예철
강아지를 보고 "나는 네가 밉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쓰다듬어 주면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난 널 사랑해!"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 콱 물어 버립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랑한다고 말했느냐 미워한다고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육도, 어떤 비판도, 어떤 훈계도,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만 틀림없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하던 3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토요일마다 주일을 위해 목욕탕에 가곤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공중 목욕탕으로 곧바로 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데, 길에서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평소 우리집에 자주 오는 분이어서 낯이 익었습니다. 그는 나를 반기면서 말합니다. "저어, 사모님은 늘 뵙고 신세를 집니다마는 목사님은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두둑히 좀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 보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 참, 아무것도 없네요. 어쩌지요?" 했더니, "에이, 그러시지 말고 좀 주세요. 목사님"하면서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않아서 저는 난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그 사람을 좀더 가까이 오라고 한 다음, 방금 씻은 깨끗한 손으로 문둥병자의 손을 덥석 붙들어 잡았습니다. 그리고 불쑥 소리쳤습니다. "정말 없단 말이야!"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아아, 목사님 참말 고맙습니다. 돈을 얻은 것보다 더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몇 번이고 인사를 했습니다. 못 받아도 괜찮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윤리, 곽선희
아이버 포웰은 {성경의 유리창}이라는 그의 훌륭한 책 속에서 유산을 남기지 않고 죽은 부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 집의 가구 경매에서 죽은 그의 아들의 초상화를 산 유일한 사람은 남루한 옷을 걸친 늙은 여인이었다.
그 아들은 어린 시절에 죽었기 때문에 그 부자는 그 그림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러나 모여든 경매자들은 그 그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왜 그 그림을 샀느냐는 질문에 그 여인은 수년 전에 소년의 유모였고 그 소년을 무척 사랑했다고 대답했다. 뒤에 그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림 뒤에 있는 두꺼운 서루뭉치를 발견했다. 봉투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유서가 들어 있었다. 그의 사랑스런 아들에 대한 기억을 고이 간직한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내용이 명백히 쓰여 있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2,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 지 아니하고 동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엑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 2:15)
어두움을 몰아내는 데 과연 얼마만큼의 빛이 필요할까요? 아주 작은 빛입니다. 그것은 등화관제를 할 때 여실히 들어납니다. 온 동네가 칠흙같은 어둠 속에 있을 때 어느 집에서 TV를 켰다고 합시다. 그 빛은 어김없이 밖으로 새어나와 어두움의 적막을 깨고 맙니다. 또한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조그만 손전등 하나가 아주 훌륭한 길 안내자가 되어줍니다. 당신의 주변을 살펴보십시요. 영적인 암흑이 존재하는 곳은 없습니까? 어두움은 아주 작은 빛으로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이 달빛에서 반사해서 빛을 발하듯이, 예수님의 빛을 반사해서 내는 그 빛을 당신에게서 요구하십니다. 당신은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삶으로써 그 빛의 역할을 해내실 수 있습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든다.
최선을 다해 그일을 했지만 기대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어떤 목사는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 동안 새로 나온 교인이라고는 로버트 모펫트라는 단 한 명의 소년뿐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라는 소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겠어요." 이 말에 목사님은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그후 로버트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어 수많은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을 다하십시요.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형편없는 생활을 하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제는 알렉산더 병사가 있는 막사로 찾아가 다음과 같이 명령을 했습니다. "자네 이름이 알렉산더라지? 그렇다면 자네 이름을 바꾸던가 아니면 자네의 생활 태도를 바꾸도록 하게!"
우리에게도 병사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즉, 이름은 그리스도인이지만 행동은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자칭 그리스도인은 아니신지요?
한 영국 귀족이 부모로 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 귀족은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많은 돈을 점박이 쥐를 만드는 일에 투자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점박이 쥐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무익한 일이었습니다. 귀족은 수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점박이 쥐를 위해 바쳤지만 점박이 쥐는 귀족이나 인류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일하다 보면 귀족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당신이 열심히 내고 계신일은 진정 가치있는 일입니까?
어느날 마귀가 야시장을 열어 정욕, 기만, 자랑, 시기, 등과 같은 도구에 가격표를 牟?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것은 '좌절'이었다고 합니다. 좌절감은 목표와 욕구가 성취되지 않을 때나 혹은 하기 싫은 일을 강요당할 때 생기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절하게 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믿음의 방패를 버리고 두려움과 불신앙과 자기연민이라는 창의 공격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사람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마지막으로 좌절이란 도구를 쓴다고 합니다.
어느 택시 회사에 성미가 무척 까다로와서 직장 전체의 분위기를 우울하게 만드는 한 수리공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 과장이 그사람의 해고 문제를 사장에게 정식으로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사장은 그사람이 얼마나 완벽하게 일을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 칭찬하면서 그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말했습니다. 사장의 그 이야기는 머지 않아 수리공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사람은 유능하고 유모어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칭찬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어느 내무반에 한 믿음 좋은 병사가 있었는데 그 병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늘 놀림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한 상사가 병사의 오른 뺨을 군화로 힘껏 후려치고는 '너희 기독교에서는 오른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민다면서'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다음날 아침, 상사는 자신의 군화가 반들반들하게 닦여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상사는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주변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쓸데없는 감정 소비를 하기보다는 친절을 베푸십시요. 친절 이상으로 힘있는 무기는 없습니다.
어느 부자집에 머슴이 필요하다는 소문을 듣고 어던 사람이 자기를 써 달라고 부탁하러 왔습니다.
그때 주인은 "너는 무얼 가장 잘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잠자는 걸 가장 잘한다고 대답했습니다.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땅한 사람도 없고 해서 주인은 그 사람을 머슴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날은 유달리 천둥과 번개가 심한 밤이었습니다. 심란해진 주인은 집안 구석 구석 비가 새는 데는 없나 살피다가 머슴이 자기 방에서 코를 골며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둥 번개가 요란했지만 머슴은 낮 동안 힘을 다해 모든 일을 해 놓았기 때문에 피곤해서 깊이 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주인은 잠자는 걸 제일 잘한다고 한 머슴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왕이 이끄는 군대가 페르시아를 쳐부수기 위해 전진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군인들은 패전을 결심이라도 한 듯 힘없이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렉산더 왕은 그 이유를 재빠르게 알아차렸습니다. 군인들은 여러 전투에서 얻은 노획물들을 몸에 잔뜩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의 행군을 잠깐 멈추게 한 알렉산더는 노획물들을 모두 모와 불태울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 명령에 군인들은 심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렇지만 군사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적인 욕심을 잔뜩 짊어진 채 군사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텍사스의 한 사내가 아내와 네 자녀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30년 동안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돈 한푼 없이 죽었는데, 자기의 시체를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텍사스에 살고 있던 자식들은 모두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있어?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해준 게 뭔데? 그 사람때문에 어머니와 우리 모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왜 우리가 그 시체에 수고와 돈을 들여야 하지?"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큰아들은 아무 말없이 동생들의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아버지의 시체를 운구해 오기 위해 자기 트랙터와 농기게들을 저당잡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큰아들은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씌어 있을 뿐,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단다"
교회에는 여러 모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을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모이자마자 험담으로 시작해서 험담으로 끝을 맺습니다.
당신이 속해 있는 모임은 어떻습니까? 혹, 험담이 난무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모임의 목적과 의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은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합니다. 험담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요소입니다. 헐뜯을 만할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을 놓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서로가 잘 되는 길입니다.
어느 목사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누가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렸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한 소년이 일어나 "저는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놀란 목사는 주일학교 선생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은 "저는 그 소년이 정직하다고 믿습니다. 그 소년은 분명코 그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았을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밝혀놓은 책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무지한 사람은 과연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누구를 향해 기도하는 걸까요?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올바로 하나님을 알고, 올바로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것,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현실입니다. 이는 전도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는 밤을 새워서까지 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 예로, 멋있는 사람과 막 교제를 시작한 처녀를 보십시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신과 교제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 관해서 만큼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그 놀랍고도 감격적인 복음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자문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사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하며, 그 속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며, 맛을 내야 합니다.
열왕기상 18장 3,4절 말씀에 나오는 오바댜를 보십시오. 그는 악독했던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궁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여호와를 크게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세상에 뛰어들어 그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주십니까?
어느 저녁 무렵, 한 노인과 그의 손자가 호숫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령, 계절은 왜 바뀌며, 여자들은 왜 지렁이를 싫어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마침내 손자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나요?" 그 노인은 잔잔한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얘야, 나는 이제 점점 하나님 이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단다."
우리의 하루 하루가 바로 이 노인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점점 하나님을 선명하게 바로보며,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천국 생활을 준비한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성공한 목회자인 사무엘 브랭글 목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맡고 있던 교회를 사직하고 런던에 있는 구세군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으로 그가 한 일은 한 무더기의 흙투성이의 장화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생각하면서 자신 또한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브랭글 목사의 섬기는 삶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일생동안 많은 이들을 섬김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저로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하고 기도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하면서 높은 위치에서 호령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리란 무릎 꿇고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죤 길모어 목사는 어느 날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주방용품을 팔고 있는 어느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요즘 장사는 잘 되시는지요?"
"예, 그럭저럭 잘 됩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물론 믿지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인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지요"
"그래요? 그게 뭔데요?"
"그건 나를 구원해 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단지 구원받고 죽어서 천국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 속에서 천국 생활을 미리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요즘 들어 세계선교에 대한 열의가 무척 높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계선교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기본적인 신앙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단순한 타문화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그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선교를 운운하기 전에 잠깐 우리의 주변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서 가족들이나 교인들과의 관계조차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코카콜라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료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내건 좋은 표어 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어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는 가정과 교회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졌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그 복음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이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아픈 나머지 그리스도인은 불평 섞인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욕을 했던것을 회개하면서
"주님,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너무 힘이 듭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비그리스도인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게 뭘 그런 걸 다 회개하나? 삶을 좀 자유스럽게 살게."
순간 우리는 비그리스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그만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 한다는 것은 그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자신이 지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어느 아이가 주일학교 시간에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늘나라를 준비하셨다는 것을 오늘 배웠어요. 하늘나라는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곳이래요."
듣고 있던 엄마는 아이의 말이 맞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다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엄마는 다른 여행준비는 언제나 철저하게 준비하시면서 그 아름다운 하늘나라 여행을 위해서는 왜 준비를 하지 않으세요?"
주일날 교회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얘들아 성경은 무슨 내용이니?"
이때 한 작은 어린이가 손을 들더니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 누나 성경에는요, 우리 누나 애인 사진과 편지가 들어 있어요."
어떤 사람이 다니엘 웹스터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까지 당신의 마음에 품었던 생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미국 역사상 훌륭한 지성 가운데 한 사람인 웹스터는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뢰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에 짐 윌슨이라는 구약 교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학생들이 이 노교수에게 성경을 토론하러 왔습니다. 교수는 말했습니다.
"성경 토론도 좋지만 성경을 몇번이나 읽었습니까?" 그러자 학생들은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짐 윌슨이 자못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적어도 40년을 밤잠 못자면서 연구를 하며 수백 번을 읽어도 믿지 못할 것이 없으니 우선 몇번이나 읽고나서 성경 토론을 해봅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모두 고침을 받고 돌아갔는데 그중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깨끗한 몸으로 회복된 것이 너무나 기뻤던 까닭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달려가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의 감격이 가라앉게 되자 그제서야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이 계신곳을 찾아가 보니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뒤였다고 합니다. 감사는 감사할 수 있을 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감사할 시기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무디는 이말을 자주 했습니다.
"회심하기 전 나는 십자가를 향해 일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십자가로부터 일해 왔다. 전에는 구원 받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받았슴으로 일한다."
"내가 회심을 하고 중생을 체험하기 전에도 선교사였으며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열심으로 믿었고 온갖 교회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들의 믿음이 아니요 종의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종의 믿음은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믿음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어느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데 전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다른 이야기는 늘 하지만 한번도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은 설교를 듣고 나서 전도를 못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 해보니까 이 비서에게 한번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비서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 하면서 사장은 다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저한테는 한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도 없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위싱턴에 미국의 유명한 정치인이요, 학자요, 언론인이었던 다니엘 윕스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같은시에 있는 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시골의 작은 교회만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웹스터씨, 왜 그렇게 하십니까?"
웹스터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가 시내의 내 얼굴을 아는 교회에 나가면 목사들이 정치인 웹스터한테 설교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곳에 가면 내게 필요한 소리 '죄인 웹스터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 가를 들려줍니다. 이것이 제가 듣고 싶은 설교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것이 아니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대신 심판받아 멸망받았어야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한 희랍의 수학자가 "기하학에 지름길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나 하고 궁리하는 젊은 학도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들도 알고 있듯이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길은 지름길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어떤 분이 한 회사의 이사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여러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이 사업체를 떠나셨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하는 대화는 모두가 다 어두운 미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 최근에 여러분들이 읽은 책은 무엇입니까?"
참석한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무슨 잡지, 무슨 신문, 소설 등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잘못된 책만을 읽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항상 기쁨을 불어넣어 주는 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한 젊은 철학도에게 어느 날 참된 시작이 무엇인가를 설명했습니다.
철학도는 지금까지 자기가 진정으로 배울 만한 철학자나 시인을 만나 보지 못했으나 드디어 플라톤을 만났다고 자기 스승에게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얘기를 다 듣고난 후 플라톤이 이 젊은 철학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제까지 섬겨왔던 그 모든 스승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까?" 이어서 플라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참된 지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식은 참된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들의 관심을 존중해주며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감사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를 믿고 이해하고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기도 응답은 기도를 통하여 더 큰 믿음과 확신을 갖고 용기와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조지 메레디스는 말했습니다.
"기도한 후에 더 나은 사람으로 일어서는 사람은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이다.
인생의 절정기에 느닷없이 가시의 공격을 받아 쓰러졌던 니버 목사는 오랫동안 인고의 기도 끝에 다음과 같은 위대한 기도로 일어섰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를 침착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우아함을, 우리가 변경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를 변경할 용기를, 우리가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아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 놀라운 구원의 이름으로 지상에서부터 하늘나라 아버지께로 위대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16세에 주님을 영접하여 93세까지 80년 가까이 기도한 사람으로, 자기가 낳은 일곱 자녀들뿐만 아니라 손자, 증손자들과 수천명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주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영감을 불러 일으킨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그녀가 남을 비판하거나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삶을 의탁하고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이처럼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것은 그녀의 경건 훈련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같이 시간을 정하여 그 시간을 기도와 말씀과 예배의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삶의 최우선을 경건의 시간에 두었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중대사가 일어나도 경건의 시간만은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나이가 점점 많아져서 거동하기도 불편해졌을 때 자녀들이 모시겠다고 했으나 아직 기도할 수 있고 말씀을 공부 할 수 있는 동안은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이제 93세가 된 연로한 노인이지만 기도하는 일과 말씀 공부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중보기도의 명단을 작성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열매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신앙의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소속 성도가 4천3백66명으로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열 두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천3백66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성도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엘리엇은 남미의 키치와 인디언 전도를 위해서 선교회관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이 회관에서 키치와 인디언을 위한 병원과 학교 시설을 중심해서 여러 가지 선교를 위한 필수적인 시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엇 선교사는 이를 위해 일년 이상 일했고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를 때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큰 홍수가 나서 이 모든 시설이 하루 아침에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엘리엇은 얼마 후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그날 아침 나의 모든 수고와 땀과 기도가 들어 있는 선교회관을 휩쓸어가는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너의 하나님이다. 지금도 너는 나를 신뢰할 수 있느냐?'
이제 나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설교의 대상은 인간입니다. 설교는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찬송은 하나님과 사람을 움직입니다.
성가대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이 부르시면 설교도 기도도 끝납니다. 그러나 찬송은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천사들이 모두 찬양할 것입니다.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사울 왕의 귀신이 쫓겨 나갔다고 합니다. 다윗은 노래하는 임금으로 법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는 너무 기뻐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잔인한 죽음도 노래를 빼앗지는 못합니다. 신앙의 절정은 노래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기적은 찬송이 있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성도여 노래가 있게 하시길 바랍니다.
1. 기도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2. 예수 중심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3. 변화가 있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5.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전도사가 늙은 과부의 집을 심방하기 위하여 진흙탕이 되어 있는 좁은 길을 지나서 다 찌그러진 허술한 집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인기척을 들은 흑인 과부는 "거 밖에 누가 왔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방에 들어가 불을 켠 전도사는 방안 풍경에 할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전도사는 그 방안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한 여인이 누더기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먹물처럼 새까맣고, 삶에 찌든 주름살 자국으로 얼기설기 얽혔고, 차가운 겨울 밤인데도 불도 없고, 빛도 없고, 냉냉한 방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성스러운 평화와 신뢰의 신앙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은 끊임없이 "찬양하라, 영광, 할렐루야."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흑인 여인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가난과 관절염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평화와 찬송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이 여인처럼 세상의 기쁨과 환경 조건을 다 빼았겨 버리고 비참한 삶을 산 여인은 얼마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골 양반이 생전 처음으로 세탁 비누를 쓰면 때가 잘 빠진다는 말을 듣고 "내 평생에 찌든 악의 때를 벗겨야겠다."면서 비눗물을 만들어 꿀꺽꿀꺽 마셨다고 합니다. 과연 비눗물이 백발이 되도록 지은 죄악의 때를 씻을 수 있을까요? 절대로 씻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정결한 예식을 만들어 손을 부지런히 씻는다고 청결한 삶이 될까요? 이것이 비눗물로 죄를 씻으려는 노인과 똑같은 행동인 것입니다.
건망증 환자가 엄청난 보물을 자기 집 장롱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잊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받은 은혜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교회에 와서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을 찾고서 "아! 내가 고귀한 신분이구나!"하고 느끼다가도 다시 세상에 나가서는 도로 다 잃어버리고 거지처럼 살다가 또 교회에 와서 자기를 확인하는, 목표를 잃은 탕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물을 찾고나서 다시 감추어 버리는 목표를 잃은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오늘의 탕자인 것입니다.
미국의 메사추세스 노드햄토 공동묘지에 가보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무덤과 그 옆에 데이비드를 사랑했으나 일찍 죽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아름다운 여인 제루사 에드워드의 무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위한 데이비드의 원대한
소망과 기대는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채 그는 죽어 보잘것없는 무덤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노력과 일의 결과는 지금 거의 남은 것이 없고 그의 헌신적인 선교의 기억과 수십 명의 인디언 신자들이 고작 그가 이루어 놓은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 그는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져 그의 이름조차도 잊혀가고 그의 사업도 모두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성자라고 일컫는 요나단 에드워드가 데이비드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의 짧은 인생을 조그만 책으로 만들었을때 이 책은 미국 전역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 일으켰고 전도의 불을 붙였습니다.
영국의 캐임브리지 대학의 학생이었던 헨리 마틴도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학문의 성취와 천재적인 머리와 그에게 손짓하는 모든 기회를 포기하였습니다. 그가 인디언 탄광촌에서 전도하다가 돌아왔을 때 그의 건강은 심히 악화되었고, 그의 몰골은 거지 형상이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흑해 북부의 거친곳에 가서 거기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전도하다가 쓰레기더미 아래서 죽어갔습니다.
프랑스 작가 라브니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언어 가운데 최후로 두 가지 단어만 남긴다면 사랑과 여행이라는 것이다.
여행에는 우수가 있고, 고독이 있으며, 환희와 감탄이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우리를 성숙케 합니다. 여행을 하기 위해 우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폭넓은 인간성과 도덕정신이 필요합니다. 여행은 만남입니다.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풍물과 역사와 미래와 현재를 만납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행에는 반드시 주제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주제가 없는 여행은 방황에 불과합니다.
칼 매닝거는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삶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비하시켜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과 창의력 마저도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뇌의 능력은 브리태니커 대영백과사전을 다 외우고도 40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며 수십 개 대학의 필수 과정을 다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가능성을 열등의식이나, 죄책감이나, 부정적인 의식구조 때문에 불과 10% 내외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가든 그로브에 가면 로버트 슐러 목사가 담임으로 있는 크리스탈 교회가 있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성공요건은
첫째, 마음속에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 모든 성공은 꿈에서 잉태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위대한 꿈이 있을 뿐이니 잠재력을 부정적 사고로 묶어 버리지 말라고 역설합니다.
둘째,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몹시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습니다. 욕망이 끊어지는 날까지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모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경기장에 나오는 선수들은 각기 승리하겠다는 각오로 나온다고 합니다. 후회는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실행에 옮기는 것뿐입니다. 시작이 반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믈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삶(B.C.)을 말하는 것이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는 바로 이 순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우리들의 삶의 구주와 주님이 되심으로써 변화된 우리들의 삶, 이 새로운 삶이'A.D.'인 것입니다.
미국 켐브리지 대학에서 불이 났을 때의 일입니다.
불이 나자 학생들은 모두 불을 끄기 위해 릴레이식으로 줄을 서서 물을 날랐습니다. 추운 날씨였는데 헤어라는 학생이 물 속으로 들어가 물을 퍼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허약하고 건강하지 못한 그를 본 교수가 물었습니다.
"여보게 헤어, 자네는 허약한데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자청하였나?"
헤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일은 분명 누군가가 해야만 할 일이기에 제가 먼저 맡았을뿐입니다.
생수를 마시려면 바위를 깨뜨려야 합니다. 생수는 파야 나옵니다.
헌데 그리스도인의 약점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파헤치는 경험 없이 죄 지은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는 너무나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파고 또 파헤쳐서 깊은 곳까지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은혜의 생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 회퍼는 <성도의 공동 생활>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들어줄 귀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들어줄 귀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야 할 때에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더 이상 귀를 기울여 듣지 못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도 귀를 닫아 버릴 것입니다.
오랫동안 인내로써 이웃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자들은 지금 이웃에게 웅변을 토한다 해도 빗나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웃에게 말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비록 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해도 말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인 다니엘 웹스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한번은 국무 장관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웹스터만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있더랍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웹스터 씨,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 집니다."
중세의 한 성자의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을 일깨워 줍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 날은 찌푸린 하늘에 몹시 추운 날씨였고, 땅 위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습니다. 나는 문 밖에 나가 곡식을 한 움큼 쥐어서는 새들에게 뿌리고 새들이 와서 주워 먹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멀리 앉아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도 두려워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새들이 날 신뢰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거기 앉아서 새들을 쳐다보며 기다리는 동안에 차츰 하나님의 마음을 전보다 더 분명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여러 가지를 주시고, 계획을 세우시고, 기다리시며, 우리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과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영광과 기쁨들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존경을 받으시고 사랑을 받으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보여지고 알려지고 들려지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각과 말 속에 계시옵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고도 조용한 노력 속에 계시고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겸허하고도 성실한 수고 속에 계시옵소서
과장도 아니고 허식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버려진 자들을 불러 모으시나이다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머지않아 내 꿈을 이루어 주시리라
곧 다가올 풍성한 영광, 완전한 영광을 내가 보리니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내 모든 소원을 이루시며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나의 전부가 되시리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수많이 죄 없는 자유인들이 독일의 수용소(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가던 그 현장 속에서 유대인들이 눈물을 뿌리면서 외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왜 이런 사건을 허용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탈환하고 이 수용소의 벽을 감시하다가 한쪽 벽에 씌여진 찬송가의 가사를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의 신앙의 고백으로 기록해 놓았던 구절이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나님의 사랑? 이 저주와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니 웬 말입니까?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이런 글자가 선명하게 씌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God is here)."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는 특권의식이 아닌 사명의식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과실을 맺기 위하여 나무가 존재하는 것이며 나무가 존재하는 보람은 열매에 있습니다. 농부가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꽃과 열매에 대한 흥미있는 대조적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꽃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모두 37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열매라는 단어는 자그마치 2백회 이상이나 등장합니다. 또 의미상으로 보아도 꽃은 성경에서 순간적이고 허무한 인생의 일시적 가치만을 비유하고 있음에 반하여 열매는 궁극적이며 영원한 생의 가치를 교훈할 때 쓰여지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말리브에 있는 페퍼다 대학교의 졸업식날이었습니다. 그날 1백명의 학생들이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대학 졸업자의 평균연령이 40세 가까왔습니다.
고령의 졸업자 가운데 67세의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는 10명의 자녀와 27명의 손자 손려를 가진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가 학사 학위를 받으려고 단상에 올라가자 한 백발의 노인과 여러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에서 환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드디어 해내셨군요. 할머니, 잘하셨어요. 드디어 성공하셨어요."
졸업식이 끝나고 그 할머니는 자기 목사님을 만나 격정에 못이겨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에게 만약 믿음을 심어 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하나님이 내가 죄절할 때마다 나에게 새힘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작하자마자 포기했을 것입니다."
신학자 리처드 니버는 인간의 이상형으로 예수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나가 닮고 따라야 할 인생의 정도가 곧 예수라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전생에 속에서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신을 향한 절대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는 길이 정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앞에 섰을 때 겸허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靜이 아닌 動입니다. 퇴보가 아닌 전진입니다. 바라는 실상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산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지 않은 이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 부족을 인정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이 시인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의심없이 믿는 것입니다.
그는 한 시골의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 곳에서 그는 30세가 될 때까지 목공수의 목수로 일했습니다. 그후 3년 동안 그는 떠돌이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한권의 책도 쓰지 않았고, 그는 관직을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가정을 떠나서 가정을 소유한 일도 없습니다. 그는 큰 도시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2백 마일 이상을 여행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위대하다고 할 만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임장이 없었고 단지 그 자신 홀로였습니다.
어느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징계는 자녀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자녀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과 매를 듭니다. 그처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징계가 올 때, 그것이 해석되고 징계로 확신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대전중 헤롤드 럿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어 불구자가 됩니다. 그는 참혹한 좌절에 빠집니다. "나는 이제 쓸모 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구나." 그런 가운데 그에게 차츰 진리의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의사가 그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직접 불구자의 모습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를 합니다. 그 해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탑니다. 그 상금은 상이용사를 위해 기부합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결연히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열 배를 보상받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만 눈을 돌릴 때 그곳에는 오직 절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잃은 것을 넘어 가진 것을 세어 보면 더 많은 가능성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선교를 열심히 하는 젊은 청년들의 어떤 모임에서 어떤 사람이 점심식사를 잘 내고 식후에 과일까지 좋은 것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중에 한 젊은 청년이 이렇게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지 않습니까? 고기 먹지 말고 그 돈을 아끼고, 이 과일 먹지 말고 그 돈도 아껴서 선교해야지, 먹고 마시는 데에 다 쓰면 언제 선교합니까?" 이렇게 한 청년이 눈을 부릅뜨고 도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고기를 주시고 이 과일을 주시는 것은, 이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선교를 충분히 하실 수 있으시며 우리가 어떤 기특한 마음을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에게 지금 주신 상급이니까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에게 갖는 가장 큰 기대는 자녀가 훌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훌륭하게 된 것이 기쁜 것만큼 자녀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을 먹이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것도 부모 된 자가 누리는 기쁨 중의 큰 기쁨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복의 전부라거나, 복의 첫번째, 두번째의 조건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십니다. 오늘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면 감사하겠지만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신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받을 복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 길, 박영선
오래 전 미국의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 씨를 찾아가서 2천불을 꾸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바턴 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 씨는 웬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2천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 씨는 완전히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 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5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 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 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한 스트로사의 대답은 멋진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합니다. 그때에 2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은덕과 사랑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도무지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금식 기도를 선포하고 경건한 이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땐가 또 한번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 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종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치 않고 여건이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농부의 그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식 기도 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 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감사주일의 기본 동기인 것입니다.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 옥한흠
우리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심정은 사람과의 관계나 서로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이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위에서 본 모든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 겸손을 배우자.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기를 힘쓴다.
즉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여 서로 종이 되며 각각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 순복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의 생활이다. 지혜에 있어서나 재능에 있어서나, 혹은 받은 바 신령한 은혜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사람을 낫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질문은 마음속의 참겸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광명한 빛 가운데 자신은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죽일 때까지 나타나는 것이 겸손이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오, 주여 당신을 찾으려고 나는 나 자신을 버렸사오니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케 마옵소서"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고서야 비로서 자기 중심의 모든 생각을 끊어 버리고 모든 사람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고 , 또 자기를 위해서 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또는 모든 사람의 종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신실한 종은 주인보다 더 지혜로울런지 모른다. 그러나 신실한 종이라면 역시 종으로서 마땅한 정신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장 연약하고 가장 볼 것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오히려 우러러보며 그들을 존경하고 섬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그리스도의 정신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작은 자 즉 다시 말하면, 피차의 종이 되는 것을 만족케 한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김과 존경 받음을 볼 때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자기는 오히려 천대받고 무시당해도 참을 수 있다. 이는 그가 마치 바울 사도와 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그 정신을 배웠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사람은 마치 예수님께서 자기의 기쁨을 위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존귀를 구하지 않으신 그 마음울 받아들인 것이다.
동료들의 실수와 죄를 보고 날카로운 말로 책망하고픈 유혹을 받을 때에도 겸손한 사람은 "서로 참으며 서로 용서 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해 주신 것같이 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신 이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 임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주 예수를 옷입어야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앤드류 머레이
갑술년, 개의 해, 수 많은 견공들이 신문이나 TV에 버젓이 출연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진돗개 한마리가 대구에서 고향집까지 찾아가 화제가 됐던 적도 있습니다.
연예인들과 함께 출연하여 재롱을 부리는 개, 사업가 모모씨 집에서 귀부인 못지않게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는 개, 드라마나 퀴즈프로에 나와 사람 보다 뛰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개...
개의 해이니 만큼 개를 강조하고 개의 특성을 알리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를 여러마리 씩이나 데리고 나와 전국의 시청자가 보는 앞에서 마구 끌어안고 쓰다듬고 뽀뽀까지 하는 장면은 지나쳐도 한참이나 지나치다는 생각입니다. 아직 우리 주변에는 어려운 이웃들이 많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여럿입니다. 아프리카나 방글라데시같은 데서는 하루 한끼를 못먹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충성심이 많고 아무리 귀여워도 사람이 다스리도록 지음 받은 가축에 불과할 뿐입니다.
개 미용실이 성행하고 개 먹이가 고급화되고 개 한마리 값이 수백만원이나 된다는 기사내용보다 불우한 이웃돕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참하고 있는가를 보도해야 하는 기자정신이 아쉽기도 합니다.
개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입니다. 개와 인간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다양합니다. 감동실화도 있고 감격적 사건도 많습니다.
그러나 개는 개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우선 순위는 분명 사람이 먼저임을 잊지 맙시다.
낮은 울타리
사탄이 내게 오는 것을 환영한다. 내 믿음을 위해 나는 악마와의 대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탄을 마음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소개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사탄에게 말씀하신다. "사탄아 어거스틴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좋다. 그러나 너와 싸울 상대는 나 예수이다 " 라고 하시며 못자국이 있는 손을 내밀어 보이신다.
내가 다른 나라 말을 완전히 익히고 그 나라 사람처럼 얘기할 수 있어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익히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졸업증서와 학위증을 받고 모든 현대적 기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주님의 사려 깊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당당히 싸워 이기고 그들을 조롱할 수 있어도, 주님의 호소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강한 신념과 위대한 이상, 그리고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땀흘리고 피 흘리고 울며 기도하고 애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갖지 못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다른 이웃에게 옷과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내가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집과 친구를 떠나 전도 사업에 몸을 바친다 하더라도, 하루하루 번거로움과 전도 사업에 대한 경멸을 참지 못하여 참을성 없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버려서, 일상생활의 권리와 여가, 사소한 계획을 포기할 만한 사랑을 갖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면 내게서 미덕이 사라지는 것이라. 내가 모든 아픔과 질병을 치료한다고 하더라도, 친절한 주님의 사랑에 굶주려 상처받은 마음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어떤 기사를 쓰거나 책을 출판해서 갈채를 받는다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뜻을 그의 사랑의 말로 전달할 수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신앙 다이제스트
배가 좌초 되었다. 생존자는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 사람은 파도에 밀려 인적없는 작은 섬에 당도했다. 궁지에 빠져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열심히 외쳤고 다른 배가 보이지 않을까 하고 날마다 지켜보았다. 어설픈 오두막을 하나 지어서 좌초된 배에서 건진 물건을 몇가지 들여다 놓았다.
어느날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오두막이 불에 타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슬퍼서 어쩔줄 몰랐다. 오두막이 금새 재로 변했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왔다! 다음날 일찍 배 한척이 다가왔다. 섬에 고립되었던 사람은어떻게 자기를 구하러 왔는가 하고 물었다. 선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이 낸 연기를 보았읍니다."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아야 하듯 그마음도 매일 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한번 소제했다고 언제까지나 방안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도 한번 반성하고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늘 우리 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 먹은 뜻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를 떠나고 만다.
마르틴 루터
인간들의 사랑 속에는 언제나 사심이 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하얀 것, 순수한 까만 것, 순수 악과 순수 선이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한 것입니다. 남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나의 행복을 구한다 든지, 그 사람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구합니다. 사랑을 주고받음에 있어서 우리는 무서운 착취를 하게됩니다. 사랑과 애정과 인기와 존경을 수입하고 그 사람과 상하 관계를 만들어 버리거나 주종 관계를 만듭니다. 예를 들면 백원의 사랑을 주고는 자기 장부에는 받을 것을 천원이라 적어 놓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그만 사랑을 베푼 후에는 그 사람을 자기의 정신적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짐지우고 또 그것이 세상에 선전되기를 바라며 그 보답이 어디선가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계산을 하고 타산을 합니다. 순수하고 사심 없이 사랑하기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힘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무슨 척도가 있어서 인간의 사랑을 시금석으로 분석해 보면 역사에 알려진 위대한 영웅적인 사랑의 행동에도 불순한 것이 30퍼센트, 어떤 것은 40퍼센트,어떤 것은 90퍼센트, 혹 어떤 것은 세상의 선전 효과를 노린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기심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 외에도 여러 가지 것이 있을 줄로 생각됩니다. 위선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심 없이 사랑했습니다. 순수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사랑의 부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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