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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를 만든 세여인

힐링&바이블센터 2008. 11. 5. 14:51

딸이 혼혈아 낳자 은행 비서로 일하다 부행장까지 [조인스]

어머니는 꿈을 주고, 아내는 현실을 일깨워줬다
오바마를 만든 세 여인

미국 대선이 종반전에 접어들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민주당 후보로 나선 버락 오바마가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7~8%포인트 차이로 앞서고 있다. 오바마의 백악관 행이 성공하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다. 오바마를 낳고 키워준 세 명의 여인을 중앙SUNDAY가 집중 해부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엄부(嚴父) 밑에서 자란 사람이 많다. 조지 W 부시와 존 F 케네디가 대표적이다. 이번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나선 존 매케인 역시 아버지·할아버지가 해군 제독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대통령도 있었다. 앤드루 잭슨과 빌 클린턴은 유복자다. 제럴드 포드는 17세가 돼서야 생부를 처음 만났다.
민주당 후보인 버락 오바마의 인생에도 아버지가 부재했다. 케냐인 아버지는 오바마가 돌도 안 됐을 때 하버드대에서 공부한다며 아들 곁을 떠났다. 오바마의 어머니와 이혼한 뒤엔 케냐로 귀국해 버렸다.

하지만 그에겐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준 세 명의 여성이 있었다. 모두 개성이 강하고 가치관이 확실했다.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은 싱글맘으로 오바마를 키워 내며 세상을 보는 눈을 물려줬다. 외할머니 메들린 페인 던햄은 딸이 인도네시아로 떠나자 열 살인 외손자를 떠맡아 중·고교까지 가르쳤다. 오바마의 부인 미셸(44)은 대권 고지를 눈앞에 둔 지금 최측근 참모이자 인생의 동반자다. 이들은 오늘의 오바마를 만든 동력이었다.

오바마의 굴곡 많은 인생역정은 여성 유권자의 모성애를 자극한다. 여성 표심이 매케인보다 오바마 쪽으로 쏠리는 변수가 된다.

아내, 똑똑한 현실주의자

오바마는 종종 “나는 모르는 것에 대해 아내 미셸에게 물어본다”고 말한다. 미셸은 오바마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가장 많이 의지하는 사람 중 하나다.

미셸은 오바마의 47년 인생 중 16년을 동행했다. 어머니가 14년, 외할머니가 9년간 오바마를 보살폈음을 감안하면 가장 긴 시간이다. 어머니를 닮아 몽상가적 기질을 가진 오바마가 땅에 발을 딛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 현실주의자다.

오바마는 시카고의 한 로펌에 다니던 중 직장 변호사 미셸에게 끌려 결혼을 신청했다. 미셸은 시카고의 전통 흑인 거주지역 사우스사이드에서 나고 자랐다. 오바마는 미셸의 ‘안정감’에 매력을 느꼈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인도네시아·하와이·LA·시카고를 떠돌던 오바마에게 미셸은 ‘뿌리’와 함께 흑인 사회와의 연결 끈을 제공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축가를 부른 사람은 미셸의 어릴 때부터 단짝 친구인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의 딸이었다.

요즘 노동자 계층 여성들, 아이를 키우는 이른바 ‘월마트 맘’의 표심을 잡기 위해 뛰고 있는 것은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미셸이다. 힐러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 지지 유세에 나서는 데 비해 공화당의 세라 페일린 부통령 후보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유세하고 있다. 결국 오바마 캠프는 여성 표 공략의 대부분을 미셸에게 의지하게 됐다.

선거 막바지에 미셸은 보통 사람의 삶에 밀착한 친근한 모습을 보여 주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그러면서 미래의 ‘퍼스트 레이디’다운 모습을 과시한다. 선거 초반의 ‘전사’이미지를 버리고 ‘겸손’ 모드로 돌아섰다. 그는 경합 주(州)인 버지니아 리치먼드에서 지난달 열린 한 토론회에 참석했다. 청중 가운데 한 명인 78세 과부 할머니가 질문 도중 눈물을 흘리자 연민 어린 표정으로 직접 클리넥스 화장지를 뽑아 건넸다. 그녀는 오바마와 별도로 경합 주를 돌고 있다. 오바마가 외할머니를 병문안하기 위해 유세를 중단한 23∼25일 미셸은 계속 선거 현장을 누볐다.

사실 미셸이 갖고 있는 집요함·투지·총명함 같은 특징은 힐러리 클린턴을 연상시킨다. 16개월 먼저 태어나 역시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미셸의 오빠는 “어렸을 때 모노폴리 게임을 하면 동생은 자기가 이길 때까지 계속하자고 우겼다. 지는 것을 너무도 싫어했다”고 털어놓았다. 미셸은 어릴 때 단칸방 중간에 천으로 커튼을 만들어 오빠와 방을 나눠 썼고, 대학 재학 땐 화장실 없는 기숙사 방에 4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살았다. 넉넉한 가정형편은 아니었지만 미셸은 자신의 능력으로 장벽을 넘어섰다. 프린스턴대 우등 졸업, 하버드대 법대 졸업 뒤 시카고대 의대 부속 병원 부원장으로 연봉 30만 달러를 받는 성공적 커리어 우먼이 됐다

힐러리와 미셸의 다른 점은 힐러리가 초기부터 정치적 야망을 품은 데 비해 미셸은 정치를 싫어했다는 점이다. 가정과 두 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셸은 남편이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다는 사실을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당선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요구해 꼼꼼히 살펴본 뒤 결국 남편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이제 미셸은 최초의 흑인 퍼스트 레이디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럴 경우 의료보험 개혁과 교육 문제에 대해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휴머니스트 몽상가

“어머니는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틀에 갇혀 지내는 인생이 편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은 ‘몽상가’였다고 오바마는 자서전 『아버지로부터의 꿈』에서 말한다. 어머니는 안정감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배려와 인간애를 가르쳤다.

미국 절반의 지역에서 흑백 간 결혼이 금지됐던 시절, 18세 나이에 케냐 출신 흑인의 아이를 낳고 결혼한 사실, 그 후 인도네시아 남성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이국적 면모에 끌리는 모험심 강한 여성’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앤은 박사학위를 받은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인도네시아어·자바어·프랑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으며, 아프리카·남아시아를 돌며 연구와 봉사활동에 매진한 여성이었다.

앤은 오랫동안 자카르타에 있는 포드재단에서 일했고, 빈곤층을 위한 소액대출 운동을 펼쳤다. 오바마의 생부와 이혼한 후 하와이대에서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 소에토로와 사랑에 빠져 인도네시아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앤은 오바마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새벽 4시에 그를 깨웠다. 그는 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과 머핼리아 잭슨(흑백차별 철폐운동을 펼친 흑인 가수)의 음반을 사와 자녀들에게 들려주었다.
오바마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특히 자신감, 추진력, 경계 허물기 같은 품성은 어머니를 빼닮았다.

인도네시아 남편과 이혼한 후 오바마를 데리고 하와이 친정으로 돌아온 앤은 오바마가 14세가 됐을 때 박사학위 논문 완성에 필요한 현장 조사를 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간다. 오바마는 외가에 남기를 원했다. 그는 오바마에게 더 이상 이사와 전학을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방학 기간만 되면 만났고,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오바마는 95년 난소암으로 사망한 어머니의 임종을 하지 못한 것을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로 꼽는다.

외할머니, 바위 같은 안정감

“어머니가 세계를 보는 눈을 키워준 날개(wing) 역할을 했다면, 외할머니는 바위 같은 안정감과 미국인으로서의 뿌리(root)를 심어준 사람이다.”

시카고 트리뷴이 오바마의 인생을 소개하면서 쓴 말이다.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85)이 없었다면 오바마는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딸이 혼혈아를 낳자 매들린은 외손자의 양육을 위해 하와이은행에서 비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대학 졸업장도 없이 여성으로서는 처음 이 은행 부행장에까지 오른다.

오바마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LA 옥시덴털대에 입학한 79년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의 외가에서 자랐다. 던햄 부부는 입고 쓸 돈을 아껴 오바마를 하와이의 명문 사립인 푸나후스쿨에 입학시켰다. 오바마는 중·고교 과정을 그곳에서 마쳤다. 딸이 인도네시아로 떠난 뒤엔 외손자의 엄마 역할까지 해냈다.

오바마에게 외할머니는 자신의 ‘백인 뿌리’를 입증하는 존재다. 오바마 진영은 “외할머니는 오바마에게 캔자스의 정신적 가치를 가르쳐 주셨다”는 TV 광고를 내놓기도 했다.

매들린은 혼혈 외손자를 위해 희생했지만 그 역시 인종적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그는 오바마와 함께 외출했을 때 버스를 타지 말고 걷자고 한 적이 있었다. 외할버지로부터 ‘그것이 흑인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주먹으로 명치를 가격당한 것처럼 아팠다’고 오바마는 회고했다.

오바마는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유세를 중단하고 하와이로 날아갔다. 그는 8월 전당대회 당시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오늘 밤은 외할머니를 위한 밤이기도 하다”는 말로 감사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