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경공부 자료실

서신서

힐링&바이블센터 2008. 4. 14. 21:10
 신약시대 이후> 성령강림과 초대 교회의 태동
예수께서 승천한 후 오순절날 예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시온산 지역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함으로 복음은 순식간에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소아시아까지 퍼져나갔다. 특히 오순절을 맞이하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자기 나라의 말로 설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행2:1-13의 기록을 보면 이들은 서쪽으로 로마에서부터 갑바도기아와 본도를 거쳐 동쪽의메데와 엘람까지 이르고 북부 아프리카까지의 지역을 명단에 올리고 있다.
신약시대 이후> 성령강림과 초대 교회의 태동>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행7장)
사도들에 의해 초대교회가 급속히 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헌납하자 사도들은 구제와 공궤하는 일을 위해 따로 안수하여 집사를 세웠다. 이때 처음으로 7명의 집사를 임명한 사람 가운데 한사람인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누명을 받고 고소당하여 공회에서 설교를 하던중 돌에 맞아 순교당하였다.
 신약시대 이후> 성령강림과 초대 교회의 태동> 빌립의 전도사역(행8장)
사도들에 의해 예루살렘에서의 전도가 성공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초대교회의 집사인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였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오히려 복음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중에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인 빌립은 사마리아로 올라가  귀신을 쫓아내며 마술사 시몬이 세례를 받고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등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파송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파송된 베드로는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한 시몬을 크게 책망하기도 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크게 확산시킨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를 만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아소도(아스돗)와 주위의 여러 성을 다니며 가이사랴에 이르렀다(행8장).
신약시대 이후> 베드로의 전도여행(행8:14-11:18,15:1-14)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벳새다 출신으로 본명은 시몬이었는데 예수를 만난 후 그물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베드로라는 이름 대신에 아람어인 게바로 개명하였다. 베드로는 급한 성격 때문에 물위로 걸어가다가 빠지기도 하고, 스승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칼로 베기도 하였으며,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기도 했으나 예수께서 승천한 후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체험을 한 후에는 능력있는 설교로 한번에 수천명을 회개시켰으며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수많은 병자를 고치며 예수의 수제자로서 초대교회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 신약시대 이후> 베드로의 전도여행(행8:14-11:18,15:1-14)> 1차 전도여행(행8:14-85)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 지역에 전도가 시작되었는데 사마리아인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알려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송했다. 사마리아에 도착한 베드로는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했고 안수받은 자는 다 성령을 받았다. 이를 본 마술사 시몬이 돈주고 성령을 사려고 했다가 책망받고 회개하였다. 그후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의 여러 촌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 신약시대 이후> 베드로의 전도여행(행8:14-11:18,15:1-14)> 2차 전도여행(행9:32-11:18)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베드로는 얼마 후 2차 전도여행을 떠나 룻다에 도착하여 8년 동안 증풍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애니아를 고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소문이 룻다와 사론과 욥바에까지 퍼졌다. 그래서 욥바에 있는 제자들은 선행과 구제에 힘쓰다가 죽은 다비다(도르가)를 살리기 위해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자 베드로는 욥바로 가서 다비다를 살려주었다. 이로 인해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고 베드로는 해변가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 시몬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지붕에 올라가 식사를 하려고 할 때 비몽사몽간에 하늘에서 내려온 큰 보자기 안에 땅에 있는 짐승과 각종 새들이 있는 환상을 보았으나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일에 대해 생각할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올 것을 계시받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 찾아온 그들을 따라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올라갔다.
고넬료를 만난 베드로는 그로부터 환상을 본 것과 자기를 청하라는 환상을 본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때 다른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고 세례도 받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할례자와 함께 음식을 먹은 것에 대해 예루살렘에 돌아와 힐난을 받았으나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여 오해를 풀었다 .
- 신약시대 이후> 베드로의 전도여행(행8:14-11:18,15:1-14)> 3차 전도여행(행15:1-14, 갈 2:2)
2차 전도여행 후 베드로의 행적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바울이 베드로가 안디옥에 있으면서 외식을 범한 것에 대해 책망을 한 내용에서 베드로가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 신약시대 이후> 베드로의 전도여행(행8:14-11:18,15:1-14)> 베드로의 순교 전승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사도 중 3명인 베드로, 바울, 요한이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오리게네스(Origenes)에 의하면 베드로는 세 사람 중 가장 늦게 로마에 왔으며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 신약시대 이후> 바울의 전도여행
바울(Paul)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BC1년에 출생하였다(행7:58,9:11). 베냐민지파 출신인(행22:3) 바울의 모친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친과 자신은 바리새인이었다(행23:6). 그는 11세때 예루살렘에 내려와 13세부터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율법에 정통한 교법사가 되었다. 또 그는 장막 만드는 법을 배웠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행22:25) 율법과 교회 핍박에 열정을 가져 스데반이 죽을 때에 증인이 되기까지 했다(행7:58,8:1).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사울은 바울로 개명한 후 그의 일생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위해 바쳐진 생을 살았다.
신약시대 이후> 바울의 전도여행> 바울의 회심(행9:22-30)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에 앞장설 정도로 유대교에 열심이 있는 자였으나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를 만나 회심하고 다메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가서 준비기간을 가진 후(갈1:17) 다시 다메섹에 돌아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배교한 바울을 죽이려 하자 그의 제자들은 광주리로 바울을 탈출시켰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다소로 갔고 얼마 후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 내려와 교회에서 1년간 무리들을 가르쳤다.
 신약시대 이후> 바울의 전도여행> 1차 전도여행 (행13:1-14:28)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받고 전도목사로 파송받은 바울은 마가 요한과 함께 실루기아로 내려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에 있는 살라미에 도착하여 유대인의 여러 회당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 섬을 가로질러 바보에 이르렀다. 바보에서 바울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는 유대인의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소경이 되게하고 총독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드리게 하였다.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지역의 버가에 도착했을 때 동행했던 마가 요한은 바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바울은 다시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올라가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귀부인과 유력한 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였다. 그래서 두사람은 그곳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사람들을 믿게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에게 악감을 품게하여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하였고 이에 두 사람은 도망하여 루가오니아 지역의 두 성인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이때 루스드라에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가 바울의 설교 중에 고침을 받았고 이일로 무리들은 바나바를 “쓰스”라 하고 바울을 “헤메”라 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을 신으로 알고 제사를 드리려 하자 두 사람은 옷을 찢고 무리들을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일 후 이고니온과 안디옥(비시디아)에 있는 유대인들이 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치게 하고 성밖으로 끌어내게 했다. 그러나 죽은줄 알았던 바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가서 제자들을 격려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웠다. 그리고 비시디아 지역을 가로질러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서 다시 복음을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으로 가서 자신의 1차 전도여행에 대하여 경과보고를 하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신약시대 이후> 바울의 전도여행> 제2차 전도여행(행15:22-18:22)
첫번째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생긴 할례 문제로 바나바와 같이 예루살렘에 파송되어 예루살렘교회의 결정을 가지고 교회에서 파송한 바사바라 하는 유대와 실라와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은 후 결정사항을 알려 주었다.
수일 후 바울은 두번째 전도여행을 바나바와 함께 가기로 했으나 요한의 동행 문제로 바나바와 헤어져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교회들을 찾아 굳게하였다. 계속해서 더베를 거쳐서 루스드라에 이른 바울과 실라는 디모데를 만나 할례를 행하였다.
이후에 바울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지나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성령이 허락치 않아 드로아로 갔다. 이곳에서 바울은 밤에 마케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보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를 거쳐 마케도냐 지경의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에서 몇일을 보낸 후 안식일에 강가로 나갔다가 루디아를 만나 그의 강청에 의해 그 집에 거하였다. 그러나 귀신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준 사건으로 두 사람은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오히려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도 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두 사람은 석방되어 그곳을 출발하여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가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율법을 강론하였다. 강론을 들은 헬라인의 큰 무리와 상당한 귀부인들이 두 사람을 쫓았으나 유대인들의 시기로 소동의 누명을 받자(행17:1-9)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피신시켰다. 두 사람은 베뢰아에서  더 큰 전도의 성과를 얻었다. 한편 이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내려와 다시 소동을 일으켰고 이에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은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고 먼저 바울을 아덴으로 피신시켰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실

라와 디모데가 도착할 때까지 우상에 대하여 유대인, 경건한 사람, 철학자 에비구레오, 스도이고 등과 쟁론을 벌였으며 죽은자의 부활에 대하여도 전했는데 아레오바고의 관원중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같은 여자는 바울의 전하는 말을 믿었다.
이후 아덴을 떠난 바울은 고린도에 이르러 장막업을 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부부와 같이 장막일을 하며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말씀을 강론하였다. 한편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서 내려와 바울을 만났으나 유대인들의 대적으로 디도유스도의 집에 있으면서 1년반 동안 말씀을 가르쳤다. 그리고 배를 타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고린도를 떠나 겐그레아에서 서원한 대로 머리를 깎고 에베소에 도착하여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과 변론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아마 예루살렘인 듯) 교회의 안부를 묻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신약시대 이후> 바울의 전도여행> 제3차 전도여행(행18:23-21:17)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은 얼마되지 않아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차례로 다니며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하고 에베소에 돌아와 2년동안 말씀을 전파하는 가운데 마술사가 자신의 책을 불사르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데메드리오는 자신이 경영하는 다이아나(Diana)의 은감실 제조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자 그는 경건과 애국심을 가장해 소요를 일으키고 폭도들을 시켜 바울을 잡아 죽이려 했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 관원의 변호로무사히 위기를 넘겼으나 바울은 거의 죽을 상태에 이르러(고후1:8-9) 오순절도 되기 전이 에베소를 서둘러 떠나야 했다. 에베소를 떠난 후 마케도냐 지경을 다니며 제자들에게 말씀을 권하고 계속하여 헬라 지경에 이르러 3개월 동안 머문 후 배를 타고 수리아로 직행하려 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 암살계획이 있음을 알고 동료와 함께 마게도냐를 경유하는 육로를 택하여 빌립보까지 갔다(이때 아덴, 베뢰아, 데살로니가를 거쳤을 것이다.).
빌립보에서 배로 5일만에 드로아에 도착하여 먼저와있던 동료들 만나 7일을 머물렀는데 마지막날 곧 안식후 첫날에는 밤늦도록 말씀을 강론할 때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렸다. 이튿날 바울은 육로를 통해 앗소로 가서 배타고 형제들을 만난 후 다시 배로 미둘레네, 기오섬, 사모섬를 거쳐 밀레도에 이르렀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 그곳 장로를 초청하여 만나 설교를 한후 작별을 나눈 다음 바다라를 거쳐 그곳에서 배타고 구브로를 바라면서 항해하여 두로에 도착하였다. 배가 정박하는 7일 동안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방문하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지 말 것을 강청하는 제자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돌레마이를 거쳐 하루를 지낸 후 가이사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 빌립의 집에서 여러 날 지낸 후 죽을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다.
 신약시대 이후> 바울의 전도여행> 로마행(행27:1-28:31)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전도여행에 대한 보고를 들은 장로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나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오히려 율법을 훼방했다고 모략을 하였다. 결국 바울은 잡혀 천부장에 인계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고 공회 앞에 선 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여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과 그렇지 않는 사두개인 사이에 논쟁이 일어 나게 했다. 날이 새자 바울을 죽이려는 결사대까지 조직되었고 바울은 생질의 도움으로 공회에 넘겨지지 않고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보냈졌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벨릭스에게 2년간의 투옥 당한 후 그의 후임자인 베스도(Festus)에게 인계되었다. 베스도에게 인계된 후 바울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도록 베스도에게 요구한 대제사장들의 살해 위험을 느끼고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임을 내세워 가이사에게 재판받을 것을 호소함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에 베스도는 그의 호소대로 가이사에게 재판 받도록 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에게 맡겨져 시돈을 거쳐 배를 타게 되었는데 배는 바람으로 인해 구브로 해안을 따라 행선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알렉산드리아 배에 옮겨졌다.
바울이 탄 배는 니도와 살모네 앞을 지나 파도를 피해 그레데 해안을 따라 간신히 미항에 정박하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선장에게 출항하지 말것을 권했으나 선장은 듣지 않고 항해 하다가 뵈니스 해변을 얼마 남기지 않고 유라굴로라 하는 광풍을 만나 생명까지 위협받는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바울의 예언대로 배만 손상되고 인명의 피해없이 풍랑을 만난지 14일째 되는날 밤에 멜리데라는 섬에 도착하였다. 섬에 도착한 선원과 바울은 섬의 우두머리인 보블리오의 친절한 대접을 받았으며 바울은 그의 부친의 열병과 이질을 고쳐주고 그밖의 병자도 고쳐 주었다. 그리고 3개월쯤 거한 후 다시 배타고 수라구

사, 레기온을 거쳐 보디올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7일을 지내고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갔다.
$128 - 신약시대 이후> 바울의 전도여행> 로마에서의 바울과 서신(행28:16,30-31)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압비오저자와 삼관까지 마중 나온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마음의 담대함을 얻었으며 4일후에는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시간이 나는대로 그들에게 말씀을 강론하였다. 이렇게 2년동안을 비교적 자유스럽게 자기 셋집에 거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행28:16,30-31). 그러면서도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이 세운 교회를 생각했고 옥중에서도 그들을 위해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써서 전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로마에서 자유를 얻어 동방으로 여행할 수 있었는데 그는 이 여행에서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두었고(딛1:5) 병든 드로비모를 남겨두고 잠시 밀레도에 들렸다(딤후4:20). 그리고 마케도냐로 가는 도중(딤전1:3)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했는데(약 65-67년) 여기서 디모데에게 두번의 편지를 보냈으며 디도에게도 보냈다. 그후 바울이 디모데에게 두번째 서신을 쓸 때는 다시 로마에서 투옥되어 한차례 겨울을 감옥에서 지냈다. 그리고 아피가 가도에서 참수형에 의해 순교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12 - 신약시대 이후> 초대 시대의 교회
교회(Church )는 히브리어 큐리아코스(“주의”, “주에게 속하는”)에서 유래되었는데 영역본 신약에서는 헬라어의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자유로운 도시국가에서 정규적으로 모이는 전체적인 시민회의를 가르키는 말로 “불러낸다“는 뜻을 지녔다. 그리고 70인역에는 하나님이 부르신 이스라엘을 가리켰으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교회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셨다(마16:18).
- 신약시대 이후> 초대 시대의 교회> 소아시아 7개 교회(계2:1-3:22)
교회는 부활 후 오순절날 성령강림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후 소아시아와 멀리 아프리카 북부까지 교회가 세워졌으며 특히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 당했을 때 이미 세워진 소아시아의 7교회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1.에베소 교회 2.서머나 교회 3.버가모 교회 4.두아디라 교회 5.사데 교회 6.빌라델비아 교회 7.라오디게아 교회
- 신약시대 이후> 초대 시대의 교회> 그 외 성서에 나오는 교회
예루살렘 교회(행2:44-46,21:18, 갈1:9)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행11:19-30,15:36-39)
비시디아의 안디옥 교회(행13:14,13:14-43)
알렉산드리아 교회(행2:10) 아덴의 교회(행17:16-34)
고린도 교회(행18:2,18,26, 고전16:19)
골로새 교회(행19:10, 골1:7,4:12-13, 몬1:1-10)
데살로니가 교회(행17:1-9, 살전2:2,4:3-8)
빌립보 교회(행16:11-15,20:2-6, 빌1:1)
-  신약시대 이후> 로마에 대한 반란
- 신약시대 이후> 로마에 대한 반란> 로마에 대한 1차 반란
헤롯이 죽자 로마 치하의 팔레스틴은 아그립바 1세에 의해 37-44년까지 통치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로마 집정관에 의해 4년간 맡겨진 후 다시 아그립바 1세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 통치권이 넘어가 44-66년까지 다스렸다. 그러나 아그립바 2세의 통치기간 중 로마에 대한 첫번째 반란이 마사다를 손에 넣은 므나헴에 의해 시작되었다. 므나헴은 마사다를 점령한 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66년 8월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므나헴이 반대파 유대인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한 뒤에도 폭동은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은 구브로와 마케루스 요새를 점령하였고 이러한 반란의 물결은 전국에 확산되어 유대인들은 유대 전역의 헬라 도시들을 공격했다.
한편 유대를 담당하고 있던 수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C. Callus)가 예루살렘의 폭동소식을 듣고 해안길로 진군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성전벽 앞에서 저지 당하여 퇴각 도중에 벧호론 통로에서 공격을 당하여 로마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갈루스의 패배는 폭동을 전면적인 반역으로 발전시켰다. 결국 로마의 즉각적인 개입의 위협에서 벗어난 반란도들은 예루살렘에 정부를 세우고 나라를 7개의 군사지역으로 구분하고 각지역에 지휘 사령관을 두었다.
- 신약시대 이후> 로마에 대한 반란> 베스파니안의 갈릴리 출정
므나헴에 이어 새 지휘권을 맡은 요세푸스(Josephus)는 여러 반대하는 무리들을 진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였다. 그는 로마식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훈련시키고 갈릴리 주변에 일련의 수비대를 요새화하는 등임박한 로마의 공격에 어느 정도 대비하였으나 그의 노력은 끝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네로 황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휘하의  유수한 장군 베스파시안(Vespasian)에게 3군단을 주어 유대로 파견하였다. 베스파시안은 사령부를 돌레마이에 두고 요세푸스의 방어진을 쉽게 돌파한 후 셉포리스에 도착하였다. 이에 요세푸스(Josephus)는 요타파타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로마군에 포로가 되었다. 잠시 휴식한 뒤에 베스파시안은 갈릴리 전역을 정복하였다.
- 신약시대 이후> 로마에 대한 반란> 베스파시안[Vespasian]의 유대 출정
갈릴리 정복을 끝낸 로마군은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곧장 욥바로 내려가 욥바를 점령하였다. 이어 얌니아와 아소도를 정복하였다. 한편 귀족계급과 이두메인들의 지원을 받고 있던 유대인들은 내분으로 인하여 로마의 공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 신약시대 이후> 로마에 대한 반란> AD68년의 출정
68년 봄에 전투가 재개됨에 따라 베스파시안은 유대땅을 조직적으로 분할하여 한 지역씩 점령해 들어갔다. 그는 봄에 유대의 베레아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어 가도라를  정복하고 가이사랴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아빌라와 율리아스와 베시못을 정복하였고 베레아 전지역에서 마케루스와 그 주변만이 유대인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해 말에 베스파시안은 가이사랴에서 제2차 출정길에 올라 딤나와 룻다 지역을 점령하고 엠마오로 나아갔다. 엠마오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베토가브리스와 카팔토바스(Caphfartobas)를 점령하고 동부 이두메를 괴롭히기 위해 이곳에도 군대를 주둔시켰다. 로마군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마달다로 진격하였는데 이곳은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의 마을로 후에 네압볼리로 개칭되었다.
그후 베스파시안은 여리고를 점령한 후 다시 사해 해변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사해 종파(Dead Sea  Sect)의 중심지인 메삿 하시딤(킬벳 쿰란)이 최후로 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시몬이 있는 거라사를 정복하기 위해 루키우스 안나우스(Lucius Annaeus) 휘하에 1개 기병 여단을 파견하였으며 시몬은 그곳을 떠나 마사다로 갔고 얼마간 주저 당한 뒤에 그곳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시몬은 마사다에서 머물지 않고 본거지를 예루살렘 근처의 자라(Phara)에 옮겨 그곳에서 그의 활동무대를 이두메까지 넓히기 시작하였다. 그는 헤로디움을 점령하고 드고아 근처에서 대적들과 싸운 뒤 알룰루스(Alulus)에서  협정을 맺었다. 또한 헤브론을 점령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열심당 지휘자 가운데 한사람이 되어 그 뒤로  줄곧 패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그의 주요 라이벌은 기스칼라(Gischala)의 요한(John)이었다.
69년 여름에 유대인들은 사해 동쪽의 마케루스와 예루살렘, 헤로디움, 마사다만을 지키고 있었다. 70년 봄

 유대에 출정중인 베스파시안은 로마에서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장자인 티투스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로 파병했고 티투스는 가이사랴에서 두 군단을 합류시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여리고에서 온 10군단과 엠마오에서 온 5군단과 합세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어 로마의 사절인 루킬리우스 밧수스에 의해 헤로디움과 마케루스가 함락되었고 그의 후계자인 실바에 의해 유대인 최후의 항쟁지인 마사다가 함락되었다.
- 신약시대 이후> 로마에 대한 반란> AD68년의 출정
70년 마사다 함락 후 팔레스틴은 로마 치하에서 다스려지다가 동서 로마로 분열된 후에는 동로마(비잔틴) 제국에 속했다. 그러나 638년 예루살렘은 회교도에게 넘어갔고 1071년에는 셀주크투르크에게 소아시아 지역과 함께 넘어갔다. 이에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운동이 4차례(1096-1204년)에 걸쳐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셀주크투르크가 13세기 몽고고원에서 일어난 정복자에 의해 망한 후 팔레스틴은 오스만투르크(1299-1922년)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리고 영국 통치하에 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몰려들었고 마침내 1948년에 현대 이스라엘이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