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기다리는 사람 (1): 요한
1. oops! 평형을 뒤집어라
2. ugh! 모순을 분석하라 오늘의 주제는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 삭개오, 베드로 모 이런 식이었죠.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해요. 하나님을 만나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대단한 거거든요. 하나님을 만나고 그 감격과 기쁨을 알고도 예전처럼 살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분명히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다고 180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분명히 달라요. 그리고 무식한 어부가 세상을 바꾸는 전도자가 된 베드로처럼, 사람들에게 지탄받던 매국노 삭개오가 모든 사람의 기억에 자신의 재산을 나눠준 예수님의 제자로 남은 삭개오처럼, 사람을 피해다니던 결혼에 네번이나 실패한 한 여인이 온 마을을 전도한 전도자로 변한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변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오전설교 말씀처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변화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를 맛보며 사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에요. 성경은 거의 2000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씌여졌지만 예수님은 단 3년만을 활동하셨거든요.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또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아요. 신약에 바울처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보고서 회심을 했다는 이야기는 바울 딱 한명밖에 나오지 않아요. 바울 사도는 분명 기독교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도 중 한분이세요. 성경에도 가장 많은 성경을 쓴 한 사람을 뽑으라면 7권에서 13권을 쓴 바울사도를 뽑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바울사도처럼 될 수는 없어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회심의 모델로 바울을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180도 바꾸길 원해요. 바울은 어떻게 보면 멋대로 살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으로 인해 180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거든요. 예수를 핍박하다가 갑자기 최고의 복음전도자가 된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을 오해해서 그랬지 그도 메시야, 즉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십년이 넘게 전도자가 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어요. 바울이 그 십년간 이집트로 내려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바울이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요. 바울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고 연단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에요. 여러분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못해요. 얼마나 기다리지 못하면 음식도 “패스트푸드”를 먹어요. 빨리 빨리... 신앙도 그러길 원해요. 무언가 갑자기 변했으면 좋겠는거에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영성이 부족한 거에요. 신앙생활을 하되 소나기처럼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해요. 식물이 자라려면 뿌리까지 적시도록 물이 스며들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생명의 강수가 지나가긴 하는데 그저 표면만 스치고 지나가 버리는 거에요.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한시간, 아니 단 십분도 집중해서 기도하지 못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고 해요. 3. aha!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예수님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특히 오늘 읽은 누가복음 1장과 그래고 내일 읽을 2장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해요.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아들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어요. 주의 천사가 나타나 하신 첫마디도 바로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에요. 너의 기다림을 하나님이 보셨다, 들으셨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기대하지 않았던 임신을 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아이를 기다렸어요. 그것도 찬양함으로 기도함으로 기다렸어요. 당시에는 분명 지탄받고 돌로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마리아는 기다렸어요. 아기 예수를 처음 찾아온 자들도 들에서 아침을 기다리던 목자였어요. 천사의 음성을 들었고 그들은 온 유대인이 기다리던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고 경배하는 축복된 자가 되었어요. 매년 그들을 기리는 연극이 온 세계에서 거행되요. *^^* 특히 2장에 보면 시몬과 한나라는 두명의 노인이 나와요.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에게도 내리고 세례요한에게도 내렸어요. 그런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성령이 임하셨다고 나오는 첫번째가 바로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그리고 두번째가 바로 이 시므온이에요.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신 거에요. 여러분 시험이 쉬워요? 아니면 훈련이 쉬워요? 시험이 쉬워요. 교무실에서도 시험 몇주전에 바빠지죠? 시험문제 내느라구요. 여러명이 내지만 솔직히 혼자 내도 하루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다 모아놓은 다음에 한시간만 있으면 시험이 끝나요. 그리고 채점하고 커트라인 정해놓고 60점 이상이면 합격 아니면 불합격 판정만 내리면 되요. 하지만 훈련은 어때요? 한번에 모든 사람이 60점을 넘을 수 있어요? 없죠. 그래도 끊임없이 하나씩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몇번이 걸리더라도 다 60점을 넘게 하는게 바로 훈련이에요. 그러니까 훨씬 더 어렵죠. 4. Whee 복음을 경험하라 여러분 신앙생활은 시험이에요? 훈련이에요? 훈련이에요. 그런데 다들 쉬운 시험만하고 있어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뭐 저래?” “오늘 설교가 왜 저래?” 판단하는 거에요. 시험보는 거에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신앙은요 시험이 아니에요. 만약 신앙이 시험이라면,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시험을 보신다면 우리는 한명도 통과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 시험이 죽고 난 다음이라면 아마 평생을 안달하며, 전전긍긍하며 살 수밖에 없을 거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안은 절대로 느껴볼 수 없을 거에요. 그러나 신앙은 훈련이에요. 이미 구원은 받았어요. 그러나 기다리는거에요. 때론 그 기다림이 끊임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기다리는 거에요. 훈련하는 거에요.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이보다 큰 자가 없다라고 말하실 정도로 가장 위대한 선지자에요. 그러나 실은 세례요한도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였어요. 우리는 성경에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면서 세례요한이 한 말을 잘 알고 있어요. “오히려 제가 세례를 받아야죠” “나는 당신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첫번에 보고 그가 기다리던 자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요. 실은 세례요한은 죽기전에 감옥에서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요. “기다리던 이가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건 세례요한이 믿음이 없어서 한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딱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라면 세례요한이 실수한 것이겠죠? 하지만 신앙은 삶이거든요.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 했고 끝까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사명을 다 한거에요.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다리라고 하셨고 준비하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온 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기다리고 준비했던 거에요. 기다리던 분이 왔는데도 기다리고 준비한다는 말이 어떻게 생각되세요? 어리석어 보이세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 기다림을 통해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셨어요. 세례요한은 요단강가에서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았어요. 하지만 그는 기다렸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말씀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실 때도 여전히 광야에 머물러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금식하고 “회개하라!”고 외쳤어요. 예수님과 만나서 메시야의 길을 토론하거나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려고 하지 않아요.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떠나가는 중에도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요. 그저 기다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렸어요. 그리고 마지막이 다 되어서 제자들을 통해 물어본거에요. “정말 당신이십니까? 제 기다림이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정답이 아니라 선문답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요한도 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을 타파하고 바른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할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래서 그는 광야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에요. 만약 요한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내가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꼭 무슨 의원같잖아요. 사람들 치료한다는 이야기잖아요. 하지만 요한은 그 기다림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어요. 아마 요한은 예수님의 이 대답을 이해했을거에요. 그리고 요한은 얼마후에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해요. 동아리에서 합숙을 가면 저한테는 밥을 안 맡겨요. ... 자꾸 열어보는 거에요. 그러면 밥이 익나요. 아래에서 타는 냄새는 나는데 위는 생쌀이고 이상한 냄새나는 가운데 밥을 먹을 수밖에 없어요.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자라나게 되어 있어요. 목회자가 해야하는 일은 기도와 말씀 묵상일거에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거에요. 교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만드시기를 기다리는 거에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책 한권 읽은 사람”. 무서워요. 막무가내죠. 절대로 다른 사람말은 듣지 않아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만은 맞다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책이 틀렸다고 하나하나 비판하고 평가해야 하나요? 아니에요. 기다려야해요. 두권읽을 때까지... *^^* 비판하고 평가하면 오히려 그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아요. 그러나 기다려주면 그가 스스로 깨달아요.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하는 거에요. 믿음이 없으면 기다릴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끝내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다릴 수 있어요. 5. Yeah 결과를 예견하라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주시면 좋잖아요. 여러분 명문가의 조건이 있어요. 무엇인줄 아세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기다림”을 가르치는 거에요. 선물을 주되 바로 주지 않아요.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자녀는 그 선물의 의미를 깨닫게 되요. 소중하게 여기게 되요. 반대로 졸부나 망하는 집안은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바로 사줘요. 아이를 돈과 선물로 매수하려고 해요. 그 아이는 그 선물을 귀하게 여길지 몰라요. 의미는 커녕 부모의 사랑도 몰라요. 오히려 “돈이면 되는구나”만 배워요.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머리로만 아는 것이아니라 가슴까지 내려가 느끼게 되요.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느끼게 되요. 체험이 있는 신앙이 되는 거에요. 영적인 깊이가 있는 신앙이 되는거에요. 그러면 누가 기다릴 수 있습니까? 종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 기다릴 수 있어요. 이상하죠? 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다면 왕의 마음을 품어야 할 것 같은데 종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니까 말이에요. 왜일가요? 하나님이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이에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기 때문에 그래요. 종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순종”하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은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순종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어요. 세상은 순종을 말하지 않아요. 적당히 비판하고 적당히 지혜롭게 살라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하나님은 순종하라고 말씀하세요. 누가복음 전에 민수기를 읽었잖아요. 민수기에는 이스라엘이 40년이나 광야를 헤메게 되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들은 40일이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길을 돌이켜 광야로 돌아갔어요. 왜인줄 아세요? 그들은 너무 똑똑했어요. 광야가 너무 뜨겁습니다. 밥이 없네요. 저들이 우리보다 강해보여요. 우리는 할 수 없어요. 비판하고 불평하고 자신의 지혜로 평가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어요. 이해가 가지 않아도, 두려워도 가겠습니다. 광야에서의 40일길이 분명 힘들고 뜨거웠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실 곳을 기다리겠습니다. 했어야 해요. 분명히 저들이 우리보다 힘세고 커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다. 했어야 해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시다가, 예배중에 주시는 말씀이 있다면 순종하세요. 그리고 믿음으로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세요.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때로 왜 오시지 않을까? 말씀하시지 않을까? 라며 불평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비판이 아니라 불평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왜냐면 미래가 불안하고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기다림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고난 중에 있더라도 찬양하게 됩니다.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던 천사의 노래처럼 온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다리며 나아가는 이번 한주가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