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Frideric Händel
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
1703년 함부르크의 겐제마르쿠트 오페라하우스에서 바이올린·쳄발로 연주자로 실제 경험을 쌓고, J. 마테존과 친교를 맺어 함께 뤼베크로 가서 D.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 1705년 오페라 [알미라]를 작곡하여 성공하고, 1906년 오페라의 고향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 도착하자 곧 인기를 끌었으며, 1708년 ]부활] [때와 깨달음의 승리] 등을 상연했고, 1709년 말부터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아그리피나]를 27회나 상연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 시대에는 A. 코넬리 및 A. 스카를라티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10년 A. 스테파니 후임으로 하노버궁정 악장이 되어 독일로 돌아갔으나 그 해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떠났으며, 11년 퀸즈시어터에서 상연된 오페라 [리날도]가 대성공을 거두자 영국을 활동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12년 목가극 [충실한 양치기], 13년 [테세오] 등의 오페라가 런던에서 상연되었고, 17년 7월 17일 조지 1세가 마련한 템스강 음악회에서 [수상(水上) 음악]을 연주하였다. 19년 오페라 단체 <왕립음악원>을 설립한 뒤 약 10년 동안 창작의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 무렵 오늘날까지 상연되는 오페라 [라다미스토, 1720] [오토네, 1723] [줄리어스 시저, 1724] [타메를라노, 1724] [아드메토, 1727] [리처드 1세, 1727] 등을 작곡하였다. 27년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하여 [대관식 앤섬]을 상연하였고, 영국 국적을 얻었다.
그러나 28년 J. 게이의 대본과 J.C. 페푸슈의 작곡에 의한 [거지 오페라]가 링컨스 인 필즈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그의 아카데미는 큰 타격을 받았다. 29년 아카데미를 재건하고 오페라 [포로, 1731]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33년 경쟁상대인 G. 보논치니의 [귀족 오페라]에 밀려 두번째로 극장문을 닫게 되었다. 34년 새로 단장한 코벤트가든극장으로 옮겨 [아리오단테 Ariodante, 1735] [알치나(Alcina, 1735] 등의 오페라와 [알렉산드로스의 향연, 1736] 등의 오라토리오 상연으로 경영에 나섰으나, 37년 건강 악화와 경제파탄이 겹쳐 작곡가 겸 경영자로서의 지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 무렵 오라토리오 막간에 그의 독주에 의한 오르간 협주곡을 연주하는 습관이 정착되어 인기를 얻어 38∼51년까지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하였다. 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서사시적 드라마 [사울]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이 초연되고, 41년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42년 4월 13일 더블린에서 초연되어 성공하였고, 45년에는 오라토리오 [벨샤자르]를 상연하여 영국 중산계급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49년 4월 27일 아헨의 평화조약 체결을 기념한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이 연주되었다.
53년 백내장으로 완전히 실명하였지만 계속 지휘와 오르간 연주를 하였고, 조수의 도움으로 작품 개정에 힘썼다. 59년 4월 14일 런던에서 죽었고 웨스트민스터성당에 묻혔다.
그의 음악은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바탕하여 다이내믹하고 간결, 명쾌한 표현으로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며, 그 선율은 단음악의 방향을 지향하여 고전적 균형과 간결성을 갖추고 있다. 오페라 46곡, 오라토리오 32곡 등의 대규모 극음악 외에 작품 6의 합주 협주곡, 작품 4 및 7의 오르간 협주곡, 작품 2 및 5의 트리오 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 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종교곡으로는 [챈도스 앤섬] 11곡 외에 유트레히트 및 데팅겐의 전승을 축하하는 [테데움] 등이 있다.
George Frideric Händel (1685∼1759)
중부 독일 할레(Halle)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세상을 떠난 '헨델'은 바흐와 더불어 바로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음악가이다.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 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때 할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0세 때 오페라 [알미라 Almira, 1705]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 하노버궁정의 악장(樂長)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7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 [테세오 Teseo]를 작곡, 상연하고 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Chandos Anthoms] 11곡을 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Radamisto] [오토네 Ottone] [줄리어스 시저 Giulio Cesar] [타메를라노 Tamerlano] [로델린다 Rodelinda] [아드메토 Admeto] [톨로메오 Tolomeo] 등을 작곡하였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 [에스테르 Esther]를 작곡하였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 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갔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계급이 궁정적 ·귀족적인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28년 대사(臺辭)에다 민요선율을 곁들여 당시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C.페푸시 작곡의 [거지 오페라 The Begger’s Opera]가 상연되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1733년 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거지 오페라]의 협공을 받고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으며, 17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예찬되고 있는 [메시아 Messiah]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 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Israel in Egypt]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1741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精髓)를 순수하고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다. 그러나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며, 접속하는 칸타타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 ·윤리적인 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켜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함께 1746년의 작품 [마카베의 유다 Juda Macabaeus] 등이다.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 Samson] [벨샤자르 Belshazzar]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으며, 1751년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실명한 후에도 오라토리오의 상연을 지휘하는 한편 조수의 도움으로 구작(舊作)의 개정에 힘썼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하였지만 기악방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모음곡 [수상의 음악 Water Music]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외에, 작품 6의 합주협주곡, 작품 4 ·7의 오르간협주곡, 작품 2 ·5의 트리오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협주곡, 그리고 17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용의 모음곡 등은 모두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종교곡으로는 앞서 말한 11곡의 [찬도스 앤섬] 외에도 유명한 작품으로 위트레히트와 데팅겐의 전승(戰勝)을 축하한 [테 데움 Te Deum] 등이 있다. 1726년에 영국에 귀화하였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 매장되었다.
'헨델'은 바흐와는 달리 국제적인 작곡가였다 .'헨델'의 음악은 독일적인 진지함, 이탈리아적인 산뜻함, 프랑스적인 장대함을 모두 갖추고 있다. 바흐의 작품은 반세기 동안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반면, 헨델은 생전에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헨델'의 두가지 중요한 업적은 바로크 말기의 음악 보급에 기여했다는 점과, 18세기 중엽의새 양식에서 중요한 요소 가 되는 많은 것들을 예시해 주었다는 점인데 심지어 낭만파 음악까지 예시해 주고 있다.
'헨델'은 일반 청중들에게는 오라토리오만 작곡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생애 동안 많은 수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영국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자주 상연하였다. 합창 양식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면모를 보여 주었으며, 이 밖에 무대음악, 수난곡, 종교곡,세속 합창곡,성악곡,관현악곡 등이 존재한다.
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
영국 작곡가. 독일 할레 출생. 어릴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9세 때 성 마리아교회 오르가니스트 F.W. 차호브 밑에서 작곡·연주의 기초를 배웠다. 1702년 아버지 희망에 따라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며 캘빈파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그 무렵 G.P. 텔레만과 교유하였다. |
1703년 함부르크의 겐제마르쿠트 오페라하우스에서 바이올린·쳄발로 연주자로 실제 경험을 쌓고, J. 마테존과 친교를 맺어 함께 뤼베크로 가서 D.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 1705년 오페라 [알미라]를 작곡하여 성공하고, 1906년 오페라의 고향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로마에 도착하자 곧 인기를 끌었으며, 1708년 ]부활] [때와 깨달음의 승리] 등을 상연했고, 1709년 말부터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아그리피나]를 27회나 상연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 시대에는 A. 코넬리 및 A. 스카를라티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10년 A. 스테파니 후임으로 하노버궁정 악장이 되어 독일로 돌아갔으나 그 해 휴가를 얻어 런던으로 떠났으며, 11년 퀸즈시어터에서 상연된 오페라 [리날도]가 대성공을 거두자 영국을 활동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12년 목가극 [충실한 양치기], 13년 [테세오] 등의 오페라가 런던에서 상연되었고, 17년 7월 17일 조지 1세가 마련한 템스강 음악회에서 [수상(水上) 음악]을 연주하였다. 19년 오페라 단체 <왕립음악원>을 설립한 뒤 약 10년 동안 창작의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 무렵 오늘날까지 상연되는 오페라 [라다미스토, 1720] [오토네, 1723] [줄리어스 시저, 1724] [타메를라노, 1724] [아드메토, 1727] [리처드 1세, 1727] 등을 작곡하였다. 27년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하여 [대관식 앤섬]을 상연하였고, 영국 국적을 얻었다.
그러나 28년 J. 게이의 대본과 J.C. 페푸슈의 작곡에 의한 [거지 오페라]가 링컨스 인 필즈극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그의 아카데미는 큰 타격을 받았다. 29년 아카데미를 재건하고 오페라 [포로, 1731] 등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33년 경쟁상대인 G. 보논치니의 [귀족 오페라]에 밀려 두번째로 극장문을 닫게 되었다. 34년 새로 단장한 코벤트가든극장으로 옮겨 [아리오단테 Ariodante, 1735] [알치나(Alcina, 1735] 등의 오페라와 [알렉산드로스의 향연, 1736] 등의 오라토리오 상연으로 경영에 나섰으나, 37년 건강 악화와 경제파탄이 겹쳐 작곡가 겸 경영자로서의 지위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작품은 42년 4월 13일 더블린에서 초연되어 성공하였고, 45년에는 오라토리오 [벨샤자르]를 상연하여 영국 중산계급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49년 4월 27일 아헨의 평화조약 체결을 기념한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이 연주되었다.
53년 백내장으로 완전히 실명하였지만 계속 지휘와 오르간 연주를 하였고, 조수의 도움으로 작품 개정에 힘썼다. 59년 4월 14일 런던에서 죽었고 웨스트민스터성당에 묻혔다.
그의 음악은 바로크적 협주양식에 바탕하여 다이내믹하고 간결, 명쾌한 표현으로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며, 그 선율은 단음악의 방향을 지향하여 고전적 균형과 간결성을 갖추고 있다. 오페라 46곡, 오라토리오 32곡 등의 대규모 극음악 외에 작품 6의 합주 협주곡, 작품 4 및 7의 오르간 협주곡, 작품 2 및 5의 트리오 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 협주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종교곡으로는 [챈도스 앤섬] 11곡 외에 유트레히트 및 데팅겐의 전승을 축하하는 [테데움] 등이 있다.
George Frideric Händel (1685∼1759)
20세 때 오페라 [알미라 Almira, 1705]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 하노버궁정의 악장(樂長)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7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 [테세오 Teseo]를 작곡, 상연하고 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Chandos Anthoms] 11곡을 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Radamisto] [오토네 Ottone] [줄리어스 시저 Giulio Cesar] [타메를라노 Tamerlano] [로델린다 Rodelinda] [아드메토 Admeto] [톨로메오 Tolomeo] 등을 작곡하였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 [에스테르 Esther]를 작곡하였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 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갔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1733년 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거지 오페라]의 협공을 받고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으며, 17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예찬되고 있는 [메시아 Messiah]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 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Israel in Egypt]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1741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精髓)를 순수하고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다. 그러나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며, 접속하는 칸타타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 ·윤리적인 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켜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함께 1746년의 작품 [마카베의 유다 Juda Macabaeus] 등이다.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 Samson] [벨샤자르 Belshazzar]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으며, 1751년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실명한 후에도 오라토리오의 상연을 지휘하는 한편 조수의 도움으로 구작(舊作)의 개정에 힘썼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하였지만 기악방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모음곡 [수상의 음악 Water Music]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외에, 작품 6의 합주협주곡, 작품 4 ·7의 오르간협주곡, 작품 2 ·5의 트리오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협주곡, 그리고 17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용의 모음곡 등은 모두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종교곡으로는 앞서 말한 11곡의 [찬도스 앤섬] 외에도 유명한 작품으로 위트레히트와 데팅겐의 전승(戰勝)을 축하한 [테 데움 Te Deum] 등이 있다. 1726년에 영국에 귀화하였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 매장되었다.
'헨델'은 바흐와는 달리 국제적인 작곡가였다 .'헨델'의 음악은 독일적인 진지함, 이탈리아적인 산뜻함, 프랑스적인 장대함을 모두 갖추고 있다. 바흐의 작품은 반세기 동안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반면, 헨델은 생전에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헨델'의 두가지 중요한 업적은 바로크 말기의 음악 보급에 기여했다는 점과, 18세기 중엽의새 양식에서 중요한 요소 가 되는 많은 것들을 예시해 주었다는 점인데 심지어 낭만파 음악까지 예시해 주고 있다.
'헨델'은 일반 청중들에게는 오라토리오만 작곡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생애 동안 많은 수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영국은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자주 상연하였다. 합창 양식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면모를 보여 주었으며, 이 밖에 무대음악, 수난곡, 종교곡,세속 합창곡,성악곡,관현악곡 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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