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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움`과 `채움`으로 완성되는 거룩

힐링&바이블센터 2007. 2. 24. 14:21

'비움'과 '채움'으로 완성되는 거룩


루터, 칼빈, 웨슬리는 성자가 아닌가? 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는 성자가 아닙니다
최익철 신부, 김기홍 박사, 지형은 박사의 글을 종합해 보면.
1. 가톨릭 교회의 기준을 따라 시성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언된 분들은 아닙니다.
2.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를 전혀 짓지 않은 분들은 아닙니다.

3. 예수님과 같이 완전한 거룩을 소유한 분들은 아닙니다.
4. 자신의 공덕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가진 분들은 아닙니다.
5. 많은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인정받은 분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결은총을 경험했으며, 믿음의 본이 된다는 의미에서는 성자입니다.

조종남 박사, 한철하 박사의 글을 종합해 보면,
1. 칼빈과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성화되는 과정에 대해 경험하고 증거하였습니다.
2. 구원은 중생과 성화를 포함할 때 그 의미가 완전해집니다.
2. 성화는 영화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과정이지만, 순간적인 성결체험을 포함합니다.
3. 성결의 체험은 마음에서 죄적인 모든 것을 추방하는 소극적 측면과, 완전한 사랑의 적극적 측면이 있습니다.
4. 성결 곧 완전성화는 동기의 순수성이며, 순간순간 회개와 믿음으로 유지되는 완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고형화된 완전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의 은혜를 바라보게 하는 완전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거룩입니다.

그렇다면 성결은총 즉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개혁자들은 성결체험을 하신 분들입니까?

1. 열쇠는‘비움’과 ‘채움’입니다.
무엇이 비워집니까? 영 속에 뿌리박힌 죄성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영속에 뿌리박힌 원죄입니다. 웨슬리가 말한 소극적 측면의 성결 즉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영 속에 뿌리박힌 죄성으로 인해 불순하던 마음의 동기가 이로써 순수해집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는 이 체험을“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는 예수님을 영접하자마자 받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이러한 이치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4장 9-1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게 된 것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할례를 받은 것은 믿음으로 받은 의를 인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고, 후사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85세에 칭의 경험을 했습니다. 99세에는 할례를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의롭다하심을 실제로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표현에서, 이 은총이 사람
의 능력이나 선행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 채워집니까? 성령의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고전 13장에서 말하는 큰 은사요, 사랑의 능력이요, 웨슬리가 말하는 성결의 적극적 측면 곧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완전은 행위의 완전이 아닙니다.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의 생명이, 죄성이 제거되고 비워진 마음에 채워짐으로써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할례받은 심령에 좌정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회개하고 간구함으로만 유지되는 능력입
니다.
그러므로 성결은 성도들의 행실에 흠이 전혀 없고 실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고 성결을 체험한 성도라 할지라도 영화에 이를 때까지 계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직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도 이 증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와 루터 역시 마음의 할례를 영적 성장의 완성점에 이르는 중요한 요소로 봅니다. 웨슬리는「Works」13권에서 성화의 목표점인 성결 은총에 대해 적극적 측면과 소극적 측면으로 설명합니다. 적극적 측면은‘완전한 사랑’으로서, 마음과 영혼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죄를 추방한 영혼에 담기는 거룩한 사랑이며, 이 사랑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영혼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결의 소극적 측면인 ‘마음의 할례’가 요구되는데,「Works」5권과 8권에서‘마음의 할례는 죄에서의 해방으로 모든 죄에서 정결케 되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또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간직한 부패와 질병 즉 인간의 불순물을 태우는 연단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영 속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입니다.

루터(M. Luther) 역시「마틴 루터의 강론」에서‘육적 할례가 부끄러움과 고통을 수반하는 것처럼 육체적 탄생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단절하는 마음의 할례는 아프고 고통이 심하다. 그러나 이 마음의 할례를 통하여 죄의 세력이 뿌리뽑힌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진 않지만 그의 성화론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칼빈 역시 성화의 단계에 도달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칼빈 주석」을 보면, 로마서 8장을 해석하면서 구원의 여정을 예지-예정-부르심-칭의-성화-영화의 단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접붙임’이란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접붙임을 자신의 본질에서 그리스도의 본질로 옮겨지는 실체적 연합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는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의 이런 실체적 연합을 신비한 결합이라고 말하고, 이 신비적 결합을 영적인 결혼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루터, 칼빈, 웨슬리는 성결은총을 받은 분들이며, 우리의 본이 되는 성자들 즉 믿음과 말씀으로 성화된 복음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성자라는 말이‘믿음으로’,‘은혜로’가는 이 길에 조금이라도 걸림이 된다면 다른 이름이어도 좋겠습니다.‘빛을 따라 산 성도들’,‘성화된 성도들’,‘좁은 길로 간 하나님의 사람들’,‘십자가를 따라간 성도들’,‘생명의 능력으로 살아간 하나님의 자녀들’,‘하나님과 합일된 성도들’…. 더 복음적인 이름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황하는 이 시대에 정확한 분별력으로 믿음의 방향을 제공해줄 분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이 믿음으로 걸어갔던 삶의 경험을 우리네 삶으로 다시 가져올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자료는 na-da 홈페이지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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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하늘과 바다의 꿈
글쓴이 : 푸름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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