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내적치유

[스크랩] 내적치유목회의 4가지단계

힐링&바이블센터 2006. 5. 6. 12:48
내적 치유 목회의 4가지 단계


                                                     유진소| LA온누리교회 담임목사


"내적 치유 위원회를 맡아라!”
이것이 내가 내적 치유라는 것과 접하게 된 첫 계기였다. 그 뒤에 내 개인적으로, 그리고 목회자로서 내적 치유라는 것 때문에 갖게 된 엄청난 변화에 비하면, 첫 만남은 참으로 행정적이고 일상적이었다.
지금이야 내적 치유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목회자나 신앙인들이 거의 없을 정도겠지만, 그때는 정말 생소하면서도 참신한 개념이었다. 더구나 그 위원회를 맡아서 내가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세미나 진행과 강의 등 모든 것은 이미 그때 이성훈 집사(정신과 의사)가 다하고 있었고, 정말 잘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나는 할 일이 없어서, 처음에 세미나를 열었을 때는 Opening 찬양과 소개(“이제 이성훈 집사님께서 나오셔서 강의를 하시겠습니다.”)를 하고는 그냥 뒤에 앉아 있었다. 한번은 하도 할 일이 없어서 슬그머니 나가서 참석자들이 무질서하게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냄새를 경험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적 치유와 만났는데, 그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서 생각할 때 나 자신이 내적 치유을 알고 경험하면서 얻게 된 유익은 말로 할 수 없다. 신대원 3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것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완벽한 간섭의 결과이지만…

1. 개인적으로 내 자신 속에 있는 상처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결코 치유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내적인 상처란 그렇게 쉽게 완쾌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완전 치유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내적 치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초보자 아니면, 곧 얼마 안되어서 뒤집을 이야기를 지금은 마치 세상없어도 확실한 것처럼 말하는 그런 상처를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라는 것은 하나의 세력으로서 그것은 마치 몸에 있는 바이러스와 같다.

한번은 입술이 부르터서 집사님이신 어느 의사선생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이렇게 입술이 터졌습니까?” 그분이 말하기를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면서 병명을 ‘Herpes'(포진)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식이 장기인 사람답게, “그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을 좀 주십시오” 했더니, 그분 왈, “바이러스를 죽이는 가장 좋은 약은 청산가리나 양잿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생명이 있는 한 바이러스만은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치료라는 것은 몸의 건강한 생명력을 키워서 그 바이러스가 활동할 수 없게 지키는 것뿐이라고 하면서 “치료된 것처럼 보여도 몸이 약해지면 다시 그 바이러스가 활동해서 그런 병적 증상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내면적인 신앙 세계처럼…”이라고 말하고는 씩 웃는데, 하도 그 말이 이해가 잘되어서 같이 씩 웃다가 입술 터진 데가 더 터지는 바람에 눈물이 찔끔 난 적이 있었다.  


정말로 바이러스와 몸의 비유는 상처와 우리의 내면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가장 좋은 예 중에 하나이다. 나의 내면에서 상처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몸에서 바이러스를 완전히 죽여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어떤 치유집회에서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 준다’는 식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허위 과장 광고라고 생각한다. 분노를 가지고 있는 내가 실제적인 나 자신이다.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의 내면이 실존적인 나의 내면이다. 이것을 분리해서 제거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만일 상처를 완전히 제거한다면, 그 결과 그의 내면 자체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치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몸의 체력을 키워서 바이러스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 바이러스에 의한 병을 치료하는 것인 것처럼, 내 안에 있는 건강한 생명력을 강화시켜서 상처의 세력을 억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적 치유라는 것은 건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상처의 세력, 상처의 경향을 꺾고 상처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다.
따라서, 치유되었다는 것은 상처가 나를 지배하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세력인지 알고 당황하지 않으며, 또 그것과 맞서 싸울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늘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호락호락 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상처의 경향보다는 치유의 능력 쪽으로 마음이 흐르도록 그렇게 결단하고 기도하고 노력하고 체험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 영적 체력이 저하될 때 다시 그 세력이 올라와서 입술이 터지고는 하지만….  

2. 복음에 대하여 이해가 깊어지고 생생해 졌다
내적 치유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발견한 것은 ‘복음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동안 목사이면서도 복음에 대하여 모호했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는데(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내용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적 치유를 통해서 그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생생해 진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죄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 죄라고 하면 그것이 윤리적, 도덕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해 왔다. 강도, 절도, 폭행, 사기, 강간, 치사, 살인 등 이런 무시무시한 범죄부터 시작해서, 이기심, 욕심, 탐심, 음욕 등의 모든 것들이 죄라고 말은 하지만 정말 이것이 죄가 될까 싶은 것까지, 그 정도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죄는 내게 실제로 존재하는 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과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앞에서 말한 강력 범죄부터 뒤에 말한 그런 이기심, 탐심 등등의 죄악에 의해서 사실 나 자신은 그렇게 고통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때는 정말, 감옥에 있는 죄수가 부러운 적이 있었다. 농담이 아니다. 복음을 제대로 경험하고 싶은 실존적인 갈망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라는 찬양을 부를 때 실감이 날 것은 아니겠는가 싶어서…
그런데, 내적 치유를 통해서 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거절감, 분노, 두려움, 열등감, 죄책감 등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은 내게 지금 현실적인 고통을 주는 죄들이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죄가 실감나고 나니 복음도 실감나게 되었다. 그런 고통스러운 상처에서 나를 회복시킬 수 있는 주님의 능력,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지만, 그것이 내적 치유를 통해서 이렇게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므로 상처에 의해 엉망이 되었던 내면이 용서와 사랑의 회복으로 바뀌는 체험을 하면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되는 구체적인 복음의 체험을 실감나게 한 경우가 많았다. 그때의 고백은 ‘복음은 정말 복된 소식이다’라는 것이다.

3. 설교에 있어서 적용이 더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되었다  
설교가 갖는 영향력은 말로 할 수 없다. 실로 죽을 사람이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살기로 결단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이 설교에 목숨을 걸고, 또 많은 성도들이 이런 설교를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땅에 있는 교회 중에서 부흥하는 교회치고 설교가 능력이 없는 교회가 어디 있는가?  그 만큼 설교는 목회의 모든 것을 떠받치는 기본이요 본질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교가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잘 되어야 한다. 하나는 ‘메시지’이다. 본문에서 뽑아져 나오는 메시지!, 정말 통찰력이 있는 메시지!, 이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둘째는 적용이다. 아무리 설교가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는 그것이 듣는 자들에게 가서 닿아야 생기는 것이지, 허공만 때리게 되면 그것처럼 지루하고 허전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적 치유를 경험하고 나서, 바로 이 두 부분이 달라졌다. 우선, 성경을 보는 각도가 바뀌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내면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처를 감지한 채 성경을 보니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 통찰들인지…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감동에 들어갈 때가 많았다. 아브라함이 이해되고, 야곱이 이해되고, 입다가 남 같지 않고, 다윗의 시편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또 예수님의 말씀들이 어쩌면 그렇게 새로운 각도로 보여지는지, 그 모든 것이 다 내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상처들과 그것의 치유를 위한 말씀들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또한 적용이 달라졌다. 복은 물질과 명예요, 죄는 윤리, 도덕, 종교적인 것이라고 보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서 인간이 가진 상처와 한계,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가슴에 품고 있는 고통과 갈등 등에 그 메시지를 가져다가 부으니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이 메시지에 자극 받지 않을 심령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설교가 신선해지고, 설교가 살아 움직이고, 설교가 능력이 있어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 설교가 설교를 하는 나 자신에게 눈물 날 만큼 은혜가 되었다.

4. 목회의 내용과 패턴이 다양해지고 신선해지게 되었다
목회를 목양이라고 해서 양을 먹이는 것으로만 이해를 하는데, 사실 목회에서 중요한 것은 먹이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먹은 양들이 그것을 잘 소화해서 힘을 얻고, 그 힘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해서 함께 성장해 나가도록 하는 이 모든 과정들 전체이다.  
나중에 내적 치유를 경험하고 나서 목회를 다시 보니까,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 고통, 그리고 그것이 뒤집어지면서 어떤 내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는가를 경험하고 나니까, 정말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그 방법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한 예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내적 치유 세미나’이다. 이 세미나는 2박 3일, 혹은 3박 4일 동안에 모여서 집중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살피고, 이것을 각 테이블에서 서로 나누고,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 내면의 경향이 변하기를 간구 하는 모임이다.  그러면서 아침에는 치유를 위한 Q.T.(경건의 시간)를 가르치고 실습시키며, 저녁에는 기도회를 갖는다. 그리고 마지막날에 치유의 대안으로 던지는 것은 ‘예배’이다. 보통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뒤바꾸는 살아있는 예배, 지성소 예배…, 결국 이 치유세미나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좀더 경험하고 싶은 열망이 나오고, 그래서 이어지는 Q.T. 세미나에 참석하고, 일대일 제자 양육을 받고 싶어하고, 또 필요하면 부부 세미나에 참석하고, 성경 통독 반에 들어가고, 중보 기도팀에 합류하고, 예배 학교에 참석하고, 경배와 찬양을 드릴 때 온 마음을 드려서 참여하는 등등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약하면, 내적 치유를 알기 전에는 ‘먹이는 일’로 이해했는데, 이제는 ‘관계를 관리하고 조정하는 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망하게 하는 것과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 문제들을 해결하는 법을 알려주고 훈련하는 것이 목회가 된 것이다.
내적 치유가 많은 영적인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하니까 많은 목회자들이 이것을 자기의 목회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교회 내에 ‘내적 치유 세미나’를 개설하는 목회자, 혹은 내적 치유라는 주제로 설교를 시리즈로 해본 목회자, 아니면 내적 치유를 한다는 사역자를 고용(?)해서 그 사역을 해보도록 하는 것, 부흥회를 내적 치유라는 주제로 한 경우 등등…, 그러나 그 결과는 다 실패 아니면, 별무소득이었다.
왜냐하면 내적 치유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점의 전환이다. 인간 이해, 복음 이해, 하나님의 성품 이해, 목회 이해 등등의 모든 이해를 바꾸는 관점의 전환이다.

출처 : 주님의 숲
글쓴이 : 주님의 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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