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가 내 삶의 주인이 될
때 사무엘상 18:6-16
스무 살에 혜성처럼 나타난 미국 뉴욕발레단의 천재 무용수가 뉴저지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약물과다중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에 한 여인이 찾아와서 너무나 처절하고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 여인은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얘야, 너를 죽인 것은 바로 이 어미구나. 너희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부을 때 그것이 나의 상처가 되어서 그것이 너를 기를 때 너를 때리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구나. 알고 보면 네 아버지도 네 할머니의 희생자란다. 내가 화가 나고 짜증난다고 그렇게 너에게 욕설하고 때리지만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슬픈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몸부림치고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월터 패트릭 비쉐’라고 하는 천재 무용수였습니다. 그 어머니 패트리샤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로 봉사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아이에게 화가 나면 던지고 때리고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시켰던 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칠 때 신세를 한탄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이유 없는 매질을 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기대했던 이 아들은 기대했던 부모로부터 받은 모욕적인 사실과 고통과 갑작스런 매질 앞에 외로움과 고독 가운데서 약물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유서에는 ‘나는 약물로 망가지고 있다. 될 대로 되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할까? 왜 이렇게 행동할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마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습관과 행동, 불행한 길로 가는 줄 분명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 내 속의 저주스런 어떤 것이 내 마음과 행동을 몰고 가는 것이 있지 않은가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행동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격 때문에, 또는 기질이 달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섬세하게 우리 자신들을 들어다 보면 과거에 받았던 어떤 한 사건으로 인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내 마음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이것을 ‘상처’라고 이야기합니다. 상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형성되어 남아있게 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상실했을 때 우리에게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실패로 끝났을 때, 내가 가장 사랑 받기를 원했던 그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 그리고 남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자신이 짓밟혔을 때, 자기가 가진 귀한 것들과 존재가 위협받을 때도 우리 마음 속에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상처는 그냥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습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 성격의 일부, 인격의 일부가 되어 남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데도 내가 모르는 이유는 이미 그것이 생활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주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상처가 있는 사람은 화살처럼 꽂혀있는 자신의 상처의 화살을 뽑아서 화살촉을 더 뾰족하게 만들고 거기다 독을 묻혀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부터 닥치는 대로 화살을 쏘아댑니다. 그것은 독화살입니다. 자기가 받은 상처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살게 됩니다. 자기뿐 아니라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상처와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 상처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함께 본 사울 왕, 이 사람은 인격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다가왔던 한 사건으로 인해 사울 왕에게는 상처가 남고 그 상처로 인해 그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의 역사를 보면 사울은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는 블레셋에 골리앗이라는 맹장(猛將)이 있어서 그를 꺽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늘 공부 잘하던 사람, 늘 승리하던 사람이 못하면 자존심이 굉장히 상합니다. 그런데 그 때 나타난 어린 목동 다윗이 나타나서 골리앗을 처치하면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실패할 줄 알았던 사람들, 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사울을 환영하며 찬양을 했는데 그 찬양의 가사가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라’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사울은 화가 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오늘 우리는 사울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사울이 ‘불쾌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감정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내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이유 없이 미워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꼭 꼬투리를 잡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웃는 것도 싫고, 나를 칭찬하는 것도 싫게 됩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 불쾌하게 여겨져 내 감정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 사람만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을 가까이 하는 사람과 그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도 싫어집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감정이 상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길을 지나가면 내 마음 속에 이렇게 떠오릅니다. ‘허구헛날 땅바닥만 쳐다보고 다니니까 인생이 그 모양이지.’ 그러나 자기와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지나가면 ‘저 사람은 항상 묵상하고 다니면서 진지하게 사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정이 상하면 생각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이 다윗에 대해 사울은 감정이 상해 있어서 언제나 기분이 나쁩니다. 자기를 위해 음악을 연주해도 싫고 다윗이 자기 앞에 있는 것도 기분이 나쁩니다. 여러분은 어떤 특정인을 볼 때, 또는 그 사람에게서 특정한 모습이 나타날 때 왠지 기분 나쁨이 있고, 그 행동을 볼 때 계속 감정이 상하게 됩니까? 한 사람에 대한 기분 나쁨이 계속 남아있다면 그것은 이미 상처가 마음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또 8절 말씀을 보면 ‘심히 노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람에게서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감정입니다. 분노를 내어야 할 사람에게, 내어야 할 시간에, 내어야 할 만큼 내는 것은 건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내지 말아야 될 사람에게, 내어서는 안 될 시간에, 내어야 할 만큼 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이 화는 수그러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멀리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을 가까이 놓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있어서도 시도 때도 없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늘 화가 납니다.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싸운 후 그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아서 그 때문에 고통스럽고, 무엇인가를 깨뜨려야 해결되었다면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그날 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했다는 것은 ‘아완인’, ‘눈’입니다. 의심의 찬 눈으로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jealous eye'입니다.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야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상관없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그 일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되어 자유함이 없고 피곤하며, 과도하여져서 신경쇠약에 빠지게 됩니다. 상처는 의심의 눈으로 대상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부부간에 상처가 있어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고정시키면 의부증이나 의처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인은 잘 모릅니다. 부인이나 남편이 의심스러우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십시오.
10절 말씀을 보면 ‘악신이 사울에게 임해’라고 나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악한 영들이 그 상처를 교두보로 삼아 그 사람을 계속 괴롭힙니다. 섭섭한 것만 생각나게 만들고 자기가 실패한 것만 떠오르게 만듭니다. 외로운 것만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나 자신을 가치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 세상 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생각하도록 충동질합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게 만드는 유혹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만들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사울은 나라를 구하고 자기를 지켜줬던 다윗을 죽여야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혹 앞에 쉽게 넘어집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자주 나타남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행하며 백성을 돌아보고 살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자기가 관심있는 것만 보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 못합니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어머니가 어머니 노릇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녀를 돌봐야 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관심있는 것만 바라봅니다. 바둑이면 바둑, 마작이면 마작, 노름이면 노름, 술이면 술, 자기가 관심을 가진 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기 때문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가장의 역할을 팽개치게 됩니다. 자기가 관심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제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자기 맏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불가능한 일, 블레셋과의 전투를 벌이게 만듭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라이벌을 소유로 삼으려고 별 짓을 다 합니다. 그것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 죽이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사울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상처가 여러분의 삶에 많은 부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상처가 나를 움직여 가도록 내버려둔다면 나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평안하고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고통과 괴로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이 상처가 있을 때 이것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 상처는 어디서 옵니까? 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됩니까? 오늘 이 사울의 상처에 대해서 성경은 몇 가지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면서 가족들에게 근심의 대상이 아닌 축복의 사람으로 될 수 있을지, 마음의 자유함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말입니다.
사울에게 다가왔던 상처의 원인은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났다고 이야기 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울과 함께 계실 수 없어 떠난 것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죽여버리라고 하셨는데, 전쟁을 치른 후 좋은 양과 소들이 너무 아깝기 때문에 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물어보았을 때 이 좋은 것들은 버리기 아까워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남겨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사울이 도착하지 않자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기가 지낼 때에 사무엘이 왔습니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나에게 가르쳐 준 율례와 법도 대로 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옳은 대로, 내 상처가 말하는 대로, 주위에서 말하는 대로 행동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울을 떠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내 맘에서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2000년 5월 25일, 명문대 고려대에 다니는 한 대학생이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해서 시체를 토막내서 버린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대통령 영부인을 꿈꾸는 명문여대 출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위에서 신앙이 독실하다고 평가되는 신학교를 나온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연세대 이윤구 박사님이 그 일기를 보고 발췌한 것을 연구해서 책을 냈는데,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계보는 법 맞으며 배운 것-유치원 때, 운동화 끈 리본 못 묶는다고 맞고 운 것-초등학교 때, 새 컬러TV 조정스위치를 없앴다고 맞은 일, 대변 검사하는 것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밤중에 쫓겨날 뻔한 일-초등학교 3학년, 밥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을 던진 일, 유리창 금감-초등학교 4학년, 다리에 피멍이 들도록 맞은 일, 무슨 영문인지 모름-초등학교 3학년, 책가방에 동화책 있다고 형과 비교해 혼난 일-초등학교 4학년, 무릎꿇고 잠언 등 성경 낭독한 것-초등학교 3학년, 전화받은 것 전달도 못한다고 즉흥적으로 구타-초등학교 후반, 중고등학교 전반, 따귀, 손바닥, 과천고등학교도 못 갈 거라며 형과 비교해 문책, 키가 작아 사회생활 하기 힘들것이라고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고3, 집안 형제들과 비교하여 인격적 모독-현재까지......」
이 아이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요?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으면 그 한마디만 들었더라면...’ 여러분, 어쩌면 이 어머니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나 영부인이 되겠다고 꿈을 꾸고 군인과 결혼했는데 꿈을 접게되자, 좌절된 꿈을 그 아들이 이뤄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기대에 못미칠 때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고 자신도 모르게 미워지고 그것이 자신을 죽이고 자기 아들을 죽게 한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신학교를 나왔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그 자녀를 길렀습니까? 에베소 6장 4절은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이 자기에게 주어질 때 그 말씀대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의 상처와 한으로, 자기가 생각한 대로 옳은 마음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고 자기 인생을 대할 때 그것은 자기에게도 상처요 남에게도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성경은 다윗에 대해서 14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다윗은 정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자기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사랑을 기대했던 사람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십여 년 이상 쫓겨다닌 상처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상처가 자기에게 시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데, 내가 판단한 대로, 상처 입은 대로, 느끼는 대로, 경험한 대로 하지 않고 그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에 내 생각을 검증해 보고 그것이 아니었을 때 과감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던져버렸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을 향해 ‘지혜롭게’ 행했다고 말씀합니다. 상처를 받았습니까?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난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흐르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법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 속, 내 손과 발, 내 가슴과 머리 속에 나타나게 하십시오. 내 속에서 아무리 옳고 경험적으로 확신하는 이야기들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아니라고 할 때에는 과감하게 포기하십시오. 안될 것 같은데 됩니다. 그것을 성경은 ‘지혜롭게, 지혜롭게’ 살았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사울이 상처를 받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position)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이것을 표준새번역에는 ‘이 말에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랐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 하고 투덜거렸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관심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 내가 어떤 자리에 앉느냐? 그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자리에 관심이 있으면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누가 내 자리를 위협할까봐 두려워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한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더 적합하다고 할 때 내 마음 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오게 됩니다. 자기보다 더 왕처럼 존귀함을 받는 다윗이 나타났을 때 사울은 불안했던 것입니다. 자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내가 그래도 누군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한 자리에 있는 것을 요구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분노가 생기고 속상하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현장입니다. 대접받지 못할 때 화가 납니다. 그 자리를 탐내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집니다.
마가복음 10장 32절부터 45절까지 보면 제자들이 길을 갈 때 싸우게 됩니다. 그 싸움의 원인은 ‘누가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 자리에 앉느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는가는 중요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시는 잔과 내가 받는 세례를 받는 자,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이 자리는 언제든지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드릴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귀한 위치, 동등된 위치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가 인간의 몸으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 선생의 자리도 포기하고 내려와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의 자리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최후의 고통과 아픔을 겪을 때 자기에게 밀려오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편 강도 중에 진실로 주님을 의지하는 우편 강도를 향해서 구원의 마지막 사역을 베푼 것을 봅니다. 자기가 아무리 고통스런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스스로 그것을 감당하셨던 주님, 주님께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연연하게 될 때 상처와 아픔이 내 삶 속에 찾아옵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아버지인데....... 내가 어머니인데...... 나를 이렇게 대접해? 나를 이것 밖에 안 봐?' 그 속에 분노가 오고 내가 무시당하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쫓겨다닐 때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제가 전방 군대에 집회하러 가서 사단 참모장을 만났습니다. 그 참모장은 하나회 출신이었습니다. 하나회는 육사를 우수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그룹에 속합니다. 김영삼 정권 때 하나회 출신을 한명도 진급시키지 않았는데 그는 거기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육군본부에서 군 생활을 해서 아는데 군인들의 진급에 대한 고민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력이 가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분이 그런 형편에 처했습니다. 매년 진급심사 때마다 얼마다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이 분이 여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군인은 전쟁도 목적이지만 진급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진급에 관심이 없어요. 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어떠한 위치에 처했던 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그 얼굴 속에 편안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 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 장로 투표와 권사 투표를 하면 교회가 술렁거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것 때문에 상처가 된 것입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처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리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때로 가난한 자리에 처할 때도 있을 수 있고 남이 짓밟는 자리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도 있고 병중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 부요한 자리, 위대한 자리, 그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내게서 이뤄지기를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때론 우리가 주님처럼 종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짓밟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윗처럼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사울이 상처를 받았던 이유는 자신의 가치와 평가의 기준을 사람의 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 말에 사울이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이 왕의 자리는 누가 세워주는 것입니까?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9장과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습니다. 무명의 한 소년, 이름없는 산골의 소년인 사울을 지명하여서 네가 왕이 될 것이라고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뽑혔습니다. 주관적인 증거와 객관적인 증거를 동시에 주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고 확신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이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왕권이 백성들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노래에 따라서 왕이 되고 안 되고, 가치가 높아지고 낮아질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교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비교의식은 괴롭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오게 만듭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쫓겨 다녀도 당당했습니다. 짓밟혀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그 하나님을 믿고 당당하게 고난을 헤쳐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다보면 부모가 ‘너 참 가치없는 놈이다, 나보고 너 생겨도 어떻게 이렇게 생겼냐? 왜 형보다 못하냐?’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실패할 수도 있고 두번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잘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저 인간은 안됐어’하는 그 이야기에 여러분의 인격과 가치가 좌우됩니까? 여러분을 누가 이 땅에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자기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나를 존귀하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실패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병들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가난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위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 주보를 백만원짜리 수표라고 보십니다. 수표를 구겼습니다. 이것은 얼마짜리입니까? 이것을 바닥에 던져서 밟았습니다.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짜리입니까? 내가 때로는 구겨질 때도 있고 찢어질 때도 있습니다. 이 수표를 발행한 사람이 취소시키지 않는한 그 가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내 인생이 때로 구겨지고 부서진다 할지라도 나를 만드신 주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천사나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외쳤던 바울, 그는 고통과 고난이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마음의 상처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어느 식당 뒤편에 개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개들은 주방장이 남긴 찌꺼기를 먹고 음식에 대한 평가를 했습니다. 개들이 ‘야 그 주방장 참 맛없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주방장은 그 말이 신경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방장은 개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에게도 주고 개에게도 주었습니다. 얼마 뒤 그 주방장은 결국 자리에서 잘리고 말았습니다. 나를 진정 평가할 그분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합니다. 개가 말하는 것에 신경을 썼던 주방장이 쫓겨난 것처럼, 심지어 부모가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분명한 믿음을 가져 보십시오. 사람이 너는 실패했다, 가난하다, 머리 나쁘다, 너는 끝장났다 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의 확신에 거하십시오. 다윗은 전쟁 중에도 잠을 잤으며 담을 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자체가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이미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은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처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파멸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도 내가 생각하는 지식과 기준, 옳다고 판단하는 것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속에 떠오는 생각을 검증하고 순간순간 주님의 뜻에 따라 내 삶을 맞춰나가고 고쳐나갈 때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나의 진정한 관심은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 가난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약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남이 이야기한다고 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치를 매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귀하다고 여기시는데 누가 나에게 가치 없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제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십시오. 이제 그 상처에서 놓임 받기를 원하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성령의 법이 여러분 마음을 자유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스무 살에 혜성처럼 나타난 미국 뉴욕발레단의 천재 무용수가 뉴저지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약물과다중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에 한 여인이 찾아와서 너무나 처절하고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 여인은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얘야, 너를 죽인 것은 바로 이 어미구나. 너희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부을 때 그것이 나의 상처가 되어서 그것이 너를 기를 때 너를 때리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구나. 알고 보면 네 아버지도 네 할머니의 희생자란다. 내가 화가 나고 짜증난다고 그렇게 너에게 욕설하고 때리지만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슬픈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몸부림치고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월터 패트릭 비쉐’라고 하는 천재 무용수였습니다. 그 어머니 패트리샤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로 봉사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아이에게 화가 나면 던지고 때리고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시켰던 것입니다. 피곤하고 지칠 때 신세를 한탄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이유 없는 매질을 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기대했던 이 아들은 기대했던 부모로부터 받은 모욕적인 사실과 고통과 갑작스런 매질 앞에 외로움과 고독 가운데서 약물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유서에는 ‘나는 약물로 망가지고 있다. 될 대로 되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할까? 왜 이렇게 행동할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마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습관과 행동, 불행한 길로 가는 줄 분명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 내 속의 저주스런 어떤 것이 내 마음과 행동을 몰고 가는 것이 있지 않은가 생각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행동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격 때문에, 또는 기질이 달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섬세하게 우리 자신들을 들어다 보면 과거에 받았던 어떤 한 사건으로 인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내 마음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이것을 ‘상처’라고 이야기합니다. 상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형성되어 남아있게 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상실했을 때 우리에게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실패로 끝났을 때, 내가 가장 사랑 받기를 원했던 그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 그리고 남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자신이 짓밟혔을 때, 자기가 가진 귀한 것들과 존재가 위협받을 때도 우리 마음 속에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상처는 그냥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습관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 성격의 일부, 인격의 일부가 되어 남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데도 내가 모르는 이유는 이미 그것이 생활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주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상처가 있는 사람은 화살처럼 꽂혀있는 자신의 상처의 화살을 뽑아서 화살촉을 더 뾰족하게 만들고 거기다 독을 묻혀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부터 닥치는 대로 화살을 쏘아댑니다. 그것은 독화살입니다. 자기가 받은 상처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며 살게 됩니다. 자기뿐 아니라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상처와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 상처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함께 본 사울 왕, 이 사람은 인격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다가왔던 한 사건으로 인해 사울 왕에게는 상처가 남고 그 상처로 인해 그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은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의 역사를 보면 사울은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는 블레셋에 골리앗이라는 맹장(猛將)이 있어서 그를 꺽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늘 공부 잘하던 사람, 늘 승리하던 사람이 못하면 자존심이 굉장히 상합니다. 그런데 그 때 나타난 어린 목동 다윗이 나타나서 골리앗을 처치하면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실패할 줄 알았던 사람들, 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사울을 환영하며 찬양을 했는데 그 찬양의 가사가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라’이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사울은 화가 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오늘 우리는 사울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사울이 ‘불쾌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감정이 상했다는 것입니다. 내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이유 없이 미워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꼭 꼬투리를 잡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웃는 것도 싫고, 나를 칭찬하는 것도 싫게 됩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 불쾌하게 여겨져 내 감정을 상하게 만듭니다. 그 사람만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을 가까이 하는 사람과 그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도 싫어집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감정이 상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길을 지나가면 내 마음 속에 이렇게 떠오릅니다. ‘허구헛날 땅바닥만 쳐다보고 다니니까 인생이 그 모양이지.’ 그러나 자기와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지나가면 ‘저 사람은 항상 묵상하고 다니면서 진지하게 사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정이 상하면 생각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이 다윗에 대해 사울은 감정이 상해 있어서 언제나 기분이 나쁩니다. 자기를 위해 음악을 연주해도 싫고 다윗이 자기 앞에 있는 것도 기분이 나쁩니다. 여러분은 어떤 특정인을 볼 때, 또는 그 사람에게서 특정한 모습이 나타날 때 왠지 기분 나쁨이 있고, 그 행동을 볼 때 계속 감정이 상하게 됩니까? 한 사람에 대한 기분 나쁨이 계속 남아있다면 그것은 이미 상처가 마음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또 8절 말씀을 보면 ‘심히 노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람에게서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감정입니다. 분노를 내어야 할 사람에게, 내어야 할 시간에, 내어야 할 만큼 내는 것은 건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내지 말아야 될 사람에게, 내어서는 안 될 시간에, 내어야 할 만큼 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이 화는 수그러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멀리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을 가까이 놓고 생각합니다. 시간에 있어서도 시도 때도 없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늘 화가 납니다.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싸운 후 그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아서 그 때문에 고통스럽고, 무엇인가를 깨뜨려야 해결되었다면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그날 후로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했다는 것은 ‘아완인’, ‘눈’입니다. 의심의 찬 눈으로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jealous eye'입니다.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야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상관없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그 일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되어 자유함이 없고 피곤하며, 과도하여져서 신경쇠약에 빠지게 됩니다. 상처는 의심의 눈으로 대상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부부간에 상처가 있어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고정시키면 의부증이나 의처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인은 잘 모릅니다. 부인이나 남편이 의심스러우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십시오.
10절 말씀을 보면 ‘악신이 사울에게 임해’라고 나옵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악한 영들이 그 상처를 교두보로 삼아 그 사람을 계속 괴롭힙니다. 섭섭한 것만 생각나게 만들고 자기가 실패한 것만 떠오르게 만듭니다. 외로운 것만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나 자신을 가치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 세상 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생각하도록 충동질합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게 만드는 유혹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만들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사울은 나라를 구하고 자기를 지켜줬던 다윗을 죽여야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혹 앞에 쉽게 넘어집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자주 나타남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행하며 백성을 돌아보고 살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자기가 관심있는 것만 보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 못합니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어머니가 어머니 노릇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녀를 돌봐야 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관심있는 것만 바라봅니다. 바둑이면 바둑, 마작이면 마작, 노름이면 노름, 술이면 술, 자기가 관심을 가진 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기 때문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가장의 역할을 팽개치게 됩니다. 자기가 관심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제 구실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자기 맏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불가능한 일, 블레셋과의 전투를 벌이게 만듭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라이벌을 소유로 삼으려고 별 짓을 다 합니다. 그것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 죽이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사울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상처가 여러분의 삶에 많은 부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상처가 나를 움직여 가도록 내버려둔다면 나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평안하고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고통과 괴로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이 상처가 있을 때 이것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 상처는 어디서 옵니까? 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됩니까? 오늘 이 사울의 상처에 대해서 성경은 몇 가지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면서 가족들에게 근심의 대상이 아닌 축복의 사람으로 될 수 있을지, 마음의 자유함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말입니다.
사울에게 다가왔던 상처의 원인은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났다고 이야기 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울과 함께 계실 수 없어 떠난 것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죽여버리라고 하셨는데, 전쟁을 치른 후 좋은 양과 소들이 너무 아깝기 때문에 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물어보았을 때 이 좋은 것들은 버리기 아까워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남겨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사울이 도착하지 않자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기가 지낼 때에 사무엘이 왔습니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나에게 가르쳐 준 율례와 법도 대로 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옳은 대로, 내 상처가 말하는 대로, 주위에서 말하는 대로 행동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울을 떠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내 맘에서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2000년 5월 25일, 명문대 고려대에 다니는 한 대학생이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해서 시체를 토막내서 버린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대통령 영부인을 꿈꾸는 명문여대 출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위에서 신앙이 독실하다고 평가되는 신학교를 나온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연세대 이윤구 박사님이 그 일기를 보고 발췌한 것을 연구해서 책을 냈는데,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계보는 법 맞으며 배운 것-유치원 때, 운동화 끈 리본 못 묶는다고 맞고 운 것-초등학교 때, 새 컬러TV 조정스위치를 없앴다고 맞은 일, 대변 검사하는 것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밤중에 쫓겨날 뻔한 일-초등학교 3학년, 밥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을 던진 일, 유리창 금감-초등학교 4학년, 다리에 피멍이 들도록 맞은 일, 무슨 영문인지 모름-초등학교 3학년, 책가방에 동화책 있다고 형과 비교해 혼난 일-초등학교 4학년, 무릎꿇고 잠언 등 성경 낭독한 것-초등학교 3학년, 전화받은 것 전달도 못한다고 즉흥적으로 구타-초등학교 후반, 중고등학교 전반, 따귀, 손바닥, 과천고등학교도 못 갈 거라며 형과 비교해 문책, 키가 작아 사회생활 하기 힘들것이라고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고3, 집안 형제들과 비교하여 인격적 모독-현재까지......」
이 아이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요?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으면 그 한마디만 들었더라면...’ 여러분, 어쩌면 이 어머니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나 영부인이 되겠다고 꿈을 꾸고 군인과 결혼했는데 꿈을 접게되자, 좌절된 꿈을 그 아들이 이뤄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기대에 못미칠 때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고 자신도 모르게 미워지고 그것이 자신을 죽이고 자기 아들을 죽게 한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신학교를 나왔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그 자녀를 길렀습니까? 에베소 6장 4절은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이 자기에게 주어질 때 그 말씀대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의 상처와 한으로, 자기가 생각한 대로 옳은 마음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고 자기 인생을 대할 때 그것은 자기에게도 상처요 남에게도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성경은 다윗에 대해서 14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다윗은 정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자기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사랑을 기대했던 사람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십여 년 이상 쫓겨다닌 상처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상처가 자기에게 시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데, 내가 판단한 대로, 상처 입은 대로, 느끼는 대로, 경험한 대로 하지 않고 그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에 내 생각을 검증해 보고 그것이 아니었을 때 과감히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던져버렸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을 향해 ‘지혜롭게’ 행했다고 말씀합니다. 상처를 받았습니까?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난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흐르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법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 속, 내 손과 발, 내 가슴과 머리 속에 나타나게 하십시오. 내 속에서 아무리 옳고 경험적으로 확신하는 이야기들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아니라고 할 때에는 과감하게 포기하십시오. 안될 것 같은데 됩니다. 그것을 성경은 ‘지혜롭게, 지혜롭게’ 살았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사울이 상처를 받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리(position)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이것을 표준새번역에는 ‘이 말에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랐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 하고 투덜거렸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관심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 내가 어떤 자리에 앉느냐? 그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자리에 관심이 있으면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누가 내 자리를 위협할까봐 두려워합니다. 내가 있는 자리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한다고 이야기할 때, 내가 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더 적합하다고 할 때 내 마음 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찾아오게 됩니다. 자기보다 더 왕처럼 존귀함을 받는 다윗이 나타났을 때 사울은 불안했던 것입니다. 자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내가 그래도 누군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한 자리에 있는 것을 요구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분노가 생기고 속상하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현장입니다. 대접받지 못할 때 화가 납니다. 그 자리를 탐내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집니다.
마가복음 10장 32절부터 45절까지 보면 제자들이 길을 갈 때 싸우게 됩니다. 그 싸움의 원인은 ‘누가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 자리에 앉느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좌편과 우편에 누가 앉는가는 중요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시는 잔과 내가 받는 세례를 받는 자,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이 자리는 언제든지 예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 형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드릴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귀한 위치, 동등된 위치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가 인간의 몸으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 선생의 자리도 포기하고 내려와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종의 자리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최후의 고통과 아픔을 겪을 때 자기에게 밀려오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편 강도 중에 진실로 주님을 의지하는 우편 강도를 향해서 구원의 마지막 사역을 베푼 것을 봅니다. 자기가 아무리 고통스런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스스로 그것을 감당하셨던 주님, 주님께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 연연하게 될 때 상처와 아픔이 내 삶 속에 찾아옵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아버지인데....... 내가 어머니인데...... 나를 이렇게 대접해? 나를 이것 밖에 안 봐?' 그 속에 분노가 오고 내가 무시당하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쫓겨다닐 때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제가 전방 군대에 집회하러 가서 사단 참모장을 만났습니다. 그 참모장은 하나회 출신이었습니다. 하나회는 육사를 우수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그룹에 속합니다. 김영삼 정권 때 하나회 출신을 한명도 진급시키지 않았는데 그는 거기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육군본부에서 군 생활을 해서 아는데 군인들의 진급에 대한 고민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력이 가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분이 그런 형편에 처했습니다. 매년 진급심사 때마다 얼마다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이 분이 여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군인은 전쟁도 목적이지만 진급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진급에 관심이 없어요. 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어떠한 위치에 처했던 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그 얼굴 속에 편안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 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 장로 투표와 권사 투표를 하면 교회가 술렁거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것 때문에 상처가 된 것입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처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리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때로 가난한 자리에 처할 때도 있을 수 있고 남이 짓밟는 자리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도 있고 병중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 부요한 자리, 위대한 자리, 그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내게서 이뤄지기를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때론 우리가 주님처럼 종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짓밟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다윗처럼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사울이 상처를 받았던 이유는 자신의 가치와 평가의 기준을 사람의 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 말에 사울이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이 왕의 자리는 누가 세워주는 것입니까?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9장과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습니다. 무명의 한 소년, 이름없는 산골의 소년인 사울을 지명하여서 네가 왕이 될 것이라고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뽑혔습니다. 주관적인 증거와 객관적인 증거를 동시에 주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고 확신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이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왕권이 백성들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의 노래에 따라서 왕이 되고 안 되고, 가치가 높아지고 낮아질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교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비교의식은 괴롭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어오게 만듭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쫓겨 다녀도 당당했습니다. 짓밟혀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그 하나님을 믿고 당당하게 고난을 헤쳐 나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다보면 부모가 ‘너 참 가치없는 놈이다, 나보고 너 생겨도 어떻게 이렇게 생겼냐? 왜 형보다 못하냐?’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실패할 수도 있고 두번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잘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저 인간은 안됐어’하는 그 이야기에 여러분의 인격과 가치가 좌우됩니까? 여러분을 누가 이 땅에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자기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나를 존귀하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실패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병들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가난해도 나의 가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위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 주보를 백만원짜리 수표라고 보십니다. 수표를 구겼습니다. 이것은 얼마짜리입니까? 이것을 바닥에 던져서 밟았습니다.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짜리입니까? 내가 때로는 구겨질 때도 있고 찢어질 때도 있습니다. 이 수표를 발행한 사람이 취소시키지 않는한 그 가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내 인생이 때로 구겨지고 부서진다 할지라도 나를 만드신 주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천사나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노라고 담대하게 외쳤던 바울, 그는 고통과 고난이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마음의 상처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어느 식당 뒤편에 개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개들은 주방장이 남긴 찌꺼기를 먹고 음식에 대한 평가를 했습니다. 개들이 ‘야 그 주방장 참 맛없게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주방장은 그 말이 신경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방장은 개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에게도 주고 개에게도 주었습니다. 얼마 뒤 그 주방장은 결국 자리에서 잘리고 말았습니다. 나를 진정 평가할 그분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합니다. 개가 말하는 것에 신경을 썼던 주방장이 쫓겨난 것처럼, 심지어 부모가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분명한 믿음을 가져 보십시오. 사람이 너는 실패했다, 가난하다, 머리 나쁘다, 너는 끝장났다 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의 확신에 거하십시오. 다윗은 전쟁 중에도 잠을 잤으며 담을 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자체가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이미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은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처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파멸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도 내가 생각하는 지식과 기준, 옳다고 판단하는 것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속에 떠오는 생각을 검증하고 순간순간 주님의 뜻에 따라 내 삶을 맞춰나가고 고쳐나갈 때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나의 진정한 관심은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 가난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약해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나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남이 이야기한다고 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치를 매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귀하다고 여기시는데 누가 나에게 가치 없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제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십시오. 이제 그 상처에서 놓임 받기를 원하며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성령의 법이 여러분 마음을 자유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 선비의 집
글쓴이 : 선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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