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막 자료실

[스크랩] 성막을 아십니까?

힐링&바이블센터 2006. 5. 1. 18:36
성막을 아십니까?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매해마다 새해 첫날이 되면 "올해는 꼭 성경 일독해야지" 하는 결심들을 합니다. 그리고는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창세기야 일단 그 내용이 낯익기도 하고 또 굳게 마음먹은 결심도 있으니까 무난히 넘어갑니다만 출애굽기에 들어서면 슬슬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장면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가는데 20장에 십계명 얘기를 지나면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재미가 없어집니다.
25장부터 성막이 나오는데 장이 몇 규빗, 광이 몇 규빗, 고가 몇 규빗 하는 얘기가 전혀 생소합니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책을 읽으면 자기가 읽고있는 내용이 머리 속에 어렴풋하게라도 어떤 그림이 그려져야 이해가 되는 법인데 일단 성막 얘기는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읽어도 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으니 재미도 없습니다. 성경을 읽다 말고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다시 성경으로 눈을 가져오면 자기가 방금 어디를 읽고 있었는지를 몰라서 대충 아무 데나 다시 읽었던 경험들이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막 부분만 빼고 읽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어서 성막 얘기는 그 비중이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성막 얘기는 출애굽기에만 13장이 나오고, 레위기에 18장, 민수기에 13장, 신명기에 2장과 히브리서에 4장 모두 50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신구약 성경이 모두 1,18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막 얘기가 50장에 걸쳐서 나온다는 얘기는 성경 전체의 무려 1/24이 넘는 곳에서 성막 얘기가 거론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애지중지하는 이 성경에는 달랑 한 장으로만 되어 있는 책도 꽤 있습니다. 구약의 오바댜가 그렇고 신약의 빌레몬서와 요한2서, 요한3서 그리고 유다서가 모두 한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막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계시의 상당 부분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결론인데,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기록된 분량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막 설계 과정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만에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6일만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성막의 설계에는 무려 40일씩이나 할애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성경에서 성막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천지 창조에도 단 6일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무려 40일이 할애되어야만 했던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여기에 대한 대답은 분명히 예수일 것입니다. 왜 성막이 예수님의 모형인지 논리적으로 따져서 그 내용에 수긍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이 성막은 우리에게 예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막을 보면 예수가 보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이 보이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보이고, 그를 통해 구원 얻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보입니다.

성막을 조감해 보면 우선 바깥에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를 기준으로 그 내부를 성막 뜰이라고 합니다. 울타리 동편에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번제단이 보이고 번제단 다음으로 보이는 것이 물두멍입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면 그 다음에 있는 것이 성소인데,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떡상과 금촛대 그리고 분향단이 놓여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으로 가로 막혀 있는데, 특별히 휘장 건너편을 가리켜서 지성소라고 합니다. 이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는데 그 언약궤를 덮고 있는 것을 시은좌라고 합니다.
이 모든 가구의 배열은 우리의 신앙 여정 내지는 신앙 성숙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성막이 대체 어느 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성경에서 이마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성막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를 조감도의 순서에 따라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정월 초일일에 성막 곧 회막을 세우고...... (출40:1-2)

정월 첫째 날 - 우리나라식으로 얘기하면 1월 1일 - 해가 시작되는 날에 성막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정월 초하루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12:1-2)

애굽에서 벗어나는 날이 바로 1월 1일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애굽에서 벗어나는 날로 1월 1일을 삼았습니다. 애굽에 억눌려 있다가 애굽의 압제에서부터 벗어나는 날,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식으로 얘기하면 죄의 종으로 지내다가 주님을 영접한 날을 1월 1일로 정하여 그 날을 새로운 해의 시작으로 삼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그들 나름대로의 달력이 있었겠지만 그전에 쓰던 달력을 무시하고 바로 그 날을 1월 1일로 선포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건 간에 지금까지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이제 새로 시작되는 날을 기념하여 그날을 1월 1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날이 바로 성막을 세우는 날이었습니다. 비록 성막 없이 살던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고 이제 성막을 알았으니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활 속에 성막이 들어왔으면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문제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따질 틈이 없습니다. 서울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어느 초등학교를 나왔는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굳이 고등학교를 말하지 않고 초등학교를 거론한 것은 연결이 아닌 단절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기에 어떤 병아리가 있다고 하면, 이 병아리의 생일이 언제겠습니까? 계란으로 태어난 날이 생일인지 아니면 계란에서 병아리로 부화된 날이 생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막을 세운 날이 바로 그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 어미 닭에서 계란으로 태어난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제 병아리가 되었으니까 지금부터 너는 오늘이 1월 1일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너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계란들끼리 모여있을 적에는 계란의 크기나 색깔 등이 문제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병아리가 되면 지나간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만큼 충실한 닭으로 자라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성막이 우리한테 바로 그런 메세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 성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을 것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출애굽기 25장에 나옵니다.

출25: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종의 작업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8절을 보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우리하고 함께 계신 분입니다. 본래부터 함께 계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함께 있는 것을 상징하는 어떤 특별한 장소를 택하여 함께 계심을 친히 보이시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라고 하여 "거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이 "거한다"는 말은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는 표현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너희 인간들이 장막(구약시대의 주거 공간, 지금으로 치면 집)을 치고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 한복판에 나도 너희하고 같이 장막을 치고 너희들과 같이 살겠다" 하는 뜻이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는 표현이나 결국은 같은 맥락입니다.

또 성막을 만들라는 지시가 출애굽기 25장 9절에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요즘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면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공부하게 될 내용이지만, 성막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성소에 창이 없습니다. 어떤 건물을 지으면서 창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것은 분명히 넌센스입니다. 중대한 설계 착오입니다. 그리고 울타리 동편에 있는 문도 그렇습니다. 가로 세로가 100규빗(45.6m)과 50규빗(22.8m)인 작지 않은 규모의 성막에 굳이 문을 하나만 만든 것도 그렇고 또 그 문의 크기도 울타리의 크기에 비해서 너무 크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내용이 한 둘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어느 만큼 잘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어느 만큼 잘 순종하느냐 하는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에는 쓰임 받지 않는 물건이 없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출애굽기 35장 20-29절에 자세히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무릇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무릇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자는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무릇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자는 가져왔으며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낳고 그 낳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을 가져왔으며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털로 실을 낳았으며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왔으니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출35:20-29)

금이나 은같이 값비싼 패물에서부터 심지어는 염소털이나 나무토막(조각목)까지 모든 종류의 물건이 총동원되어 있습니다. 결국 능력이나 자질이 없어서, 혹은 갖고 있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사업에 동참할 수 없다는 말은 순전히 핑계에 불과합니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동참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떨기나무에 붙은 불로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하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아이구, 하나님! 그래도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제가 아니면 어느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나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는 본래 말재간이 없어서 그런 일에는 적합치 않다고 한사코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되게 하고, 또 손에 문둥병이 발했다가 도로 낫게 하는 이적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완강하게 도리질을 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이것이 모세의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이때 모세의 생각으로 자기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느낄 만한 여건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나이가 이미 80 고령이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속담에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안 한다는 처가살이를 40년 째 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제 나이가 이미 팔십입니다. 그러니 이 나이로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하나님, 제 형편을 보십시오. 저를 따르는 추종자가 있는 것은 고사하고 저는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말씀드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힘주어 말한 내용이 자기는 말이 어눌해서 못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모세는 단순한 엄살이 아니라 말주변이 없어도 단단히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 저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못합니다" 하는 모세의 말에 하나님께서도 "속보이는 소리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지 않으신 것을 보니, 그가 말을 잘못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도 수긍하신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도중에 그의 말주변 때문에 리더쉽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내내 불평만 하기는 했지만 모세의 말주변과는 전혀 관계없는 불평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면, 당시 모세의 마음을 저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말이 빨랐습니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끔 더듬기도 하고, 발음도 안 좋습니다. 또 말투가 투박하고 퉁명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대학을 졸업하고 5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야할 길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도저히 신학을 시작할 엄두가 안 나는 가장 큰 이유가 저의 말주변 때문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면 노상 해야 하는 일이 설교인데, 말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무슨 수로 설교를 하느냐는 한탄이 항상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도 걱정하고 우려하던 설교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희한한 것은 차마 남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말주변으로 설교를 하는데도 교인들은 전혀 불편해하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갖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쓰십니다.

이제 이렇게 해서 성막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하는데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재료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재료들을 모을 때의 이야기가 이렇게 소개됩니다.

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정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모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36:2-7)

백성들이 성막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너무 많이 가져오는 바람에 오히려 작업에 방해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요즘말로 옮기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예배 중에 광고하기를,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 교회에 헌금이 너무 많이 들어옵니다. 제발 헌금들 좀 그만 하십시오. 여러분이 내는 헌금을 정리하느라고 교회에서 다른 일을 전혀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헌금 좀 자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구약 시대와 지금은 시대적인 격차가 크기는 하겠습니다만 도무지 어느 만큼 헌금이 들어오면 이런 광고를 하게 될는지 상상이 안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00년 동안을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다가 이제야 막 자유를 찾은 사람들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해서 전리품을 챙겨 개선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장사를 해서 떼돈을 벌고 금의환향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막을 만들기 위한 금 은 패물이 다 어디에서 났겠습니까? 베실이나 염소털, 조각목 같은 것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노예생활을 하던 사람에게서 값비싼 보석류가 나온다는 것은 분명히 어색한 일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출애굽 직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지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 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출11:1-3)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35-36)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 직전에 미리 금 은 패물을 챙길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대체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설마 400년 동안 종살이를 했으니까 그 동안 밀린 인건비를 받아가라고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이 있으시니까 미리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설명할 때 "우연"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섭리이고 계획이고 예정입니다. 결국 이때의 금 은 패물도 하나님께서 미리 성막을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홍해를 건너기도 전에 "내가 이들로 홍해를 건너게 한 다음에는 시내산으로 인도하고, 거기서 이들에게 십계명을 주고 또 성막을 만들게 해야지" 하는 계획을 세워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비단 소요되는 물품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고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곧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상과 그 기구와 정금 등대와 그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제사직을 행할 때에 입는 공교히 짠 의복 곧 제사장 아론의 성의와 그 아들들의 옷과 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31:1-11)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이전에 이미 성막을 만들 재료와 사람을 미리 준비시켜 놓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도 엉뚱한 일이 성막을 만들기 전에 먼저 벌어지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과 성막 설계도를 받을 때, 모세가 없는 틈에 백성들이 사고를 친 것인데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32:1-6)

모세가 없는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으로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다 경배했다는 얘기인데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노예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무슨 금이 있었겠습니까?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소망하면서 장롱 깊숙이 숨겨두었던 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쓰인 금도 역시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장차 성막을 만드실 계획을 갖고 이 모든 일을 추진하신 것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막을 만든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건강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가 있으셔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물질이 있다면 그 물질도 그렇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니 혹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곳에다 쓰고 있지나 않은지 각자 자기 자신을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고발하는 사건이 바로 금송아지 사건인 것이고, 같은 맥락으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호2:8)

어떤 남자에게 애인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여자에게는 사귀는 남자가 자기 말고도 또 있더라고 하면 그것은 정말로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게다가 자기가 그 여자에게 선물한 물건을 그 남자가 갖고 있더라고 하면 그것은 기가 막히다는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 사이는 깨져야 합니다. 만일 그런 일을 당하고도 그 여자를 계속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하면 그 남자는 분명히 평범한 남자는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바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하나님을 향하여 배역하고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얘기가, 우리가 매주일마다 들고 다니는 성경책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앞에서 성막 가구의 배열은 구원의 진행과 조화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바깥에는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 동편의 출입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그 다음에 물두멍이 있고, 물두멍을 지나면 성소가 있는데 그 안에는 금촛대와 떡상 그리고 분향단이 있습니다. 그 뒤에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고 있고, 휘장 너머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신앙 여정 내지는 신앙 성숙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습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번제단에서 재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있는 물두멍은 구원은 얻었지만 그래도 세상을 살다 보면 죄는 범하게 되는데, 한 번 얻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지만 구원 얻은 신분에서 범한 죄는 계속 회개하면서 자신을 성결케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물두멍입니다. 그 다음에 성소 안에 들어가면 떡상은 영의 양식, 생명의 떡, 예수님을 나타내고, 금촛대는 성령의 조명, 분향단은 우리의 기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상당히 많은 신자들의 신앙이 번제단에서 멈춥니다. 구원은 얻었는데 더 이상 그 신앙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안 믿는다" 하고 신앙의 유무만을 흑백논리로 구분합니다. 예수를 믿되 어느 만큼 믿는지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배우자를 골라도 눈, 코, 귀, 입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만큼 잘 생겼는지를 봅니다. 한글을 깨쳤는지를 보지 않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를 따집니다. 하루 세 끼 밥을 먹을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월수입을 따집니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는 단지 예수를 믿느냐 마느냐만 따집니다. "신앙의 성숙"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물두멍에서 멈춥니다. 지성소까지 나가려는 노력이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에 급급하여 거룩으로 나아갈 줄을 모릅니다. 군대에서 흔히 하는 얘기로 병장이라고 다 같은 병장이 아닙니다. 다음 달에 제대하는 말년병장이 있는가 하면 방금 진급신고를 마친 물병장도 있습니다. 이등병이 보기에는 비슷하게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둘 사이의 군번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것과 교회 안에 있는 것은 물론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더 이상 급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교회 안은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를 따지지 말고 구원 얻은 사람들만을 모아놓고 따지면, 각자의 신앙 여정이나 수준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막을 공부하면서 각자 자기 신앙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성막 안에 무엇이 있는지 성막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울타리만 보일 뿐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람들이 보는 교회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전개되고 있는지 들어와서 직접 확인해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성막 바깥에서는 울타리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교회 밖에서는 교회당이라는 건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고작 우호적으로 평가해 봐야,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조금 선하리라는 정도의 기대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사역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그러니까 일단 성막 안으로 들어온 용서받은 죄인들이 성막 안에 배열된 기구들을 따라 진행하면서 그 신앙이 성숙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의 신앙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구원 얻은 다음에도 계속 자라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계속 자라야 한다는 사실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에 보면 "......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라고 되어 있는데, 제사장들이 매일 서서 일을 해야 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소 안에는 의자가 없었습니다. 성소는 안식의 자리가 아니라 사역의 자리였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 안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에게는 쉴 틈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구원 사역에 쉴 틈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도 역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출처 : 전도종합/3500만명의 영혼구령카폐
글쓴이 : Moses.cane.yo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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