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 공간/성경공부 자료실

구원론(성령론)

힐링&바이블센터 2009. 1. 24. 09:20

구원론(성령론) (The Doctrine of Salvation)
박혜근 교수(칼빈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본 자료는 박혜근 교수의 강의 내용을 녹취한 내용이다.

<박혜근 교수소개> 
영남대학교 전자공학과(B.E.)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1. 소개(Orientation) 및 학습목표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의 조직신학 하(下)권은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성령론이 없는 이유는? 구원론(성령론)을 조직신학자들이 구원론1.과 구원론2.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구원론1.은 그리스도의 지상의 생애인 사역에 관한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믿는 택자들을 위한, 즉 우리를 위하여 십자상에서 이루신 지상의 사역이다. 구원론1.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인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내용의 전부이다.

구원론2.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부활, 승천하시고, 이미 이루어 놓으신 그 예수님의 사역을 개인의 각 신자들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적용)사역이다. 따라서, 성령론은 구원론2.의 한 부분에 속한다. 성령론을 구원론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시면 보다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강조하면, 성령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된 사역을 한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사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령론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은 이 성령론을 은사론으로만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성령론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성령의 사역은 근본적으로 기독론적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하신 사역에 근거하여 바로 그것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고 그 성령의 사역을 다루는 것이 바로 성령론이다. 따라서, 그 성령론은 구원론에 속해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여 독자적인 성령의 사역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수업제목을 우리가 이번학기에 배우는 성령론을 구원론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구원론1.을 먼저하고 구원론2.을 공부하였으면 좋겠으나, 학교 커리큐럼 형편상 부득이하게 구원론2.을 학습진행 하면서 구원론1.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수업시간에 조금씩 언급하면서 진행하도록 할 예정이다. 아울러, 구원론2.에 관한 강의의 세세한 부분을 전부 다 할 수 없으므로 중요한 주제를 한 학기에 9~10개정도를 발췌하여 강의할 것이다.


성령론 공부하면서 또는 그 후에 가져오는 신앙의 기대효과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교회안에서 다루고 있던 중요한 설교의 주제, 성경공부의 내용이나, 혹은 신앙의 어려움이나, 실생활의 신앙적인 체험 등과 같은 모든 것들이 성령론과 필연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은 깨닫게 된다. 학생 여러분들께서 나름대로 대단히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 기대된다. 일단, 오늘 강의 순서는 성경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을 소개함으로써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성경에서의 성령의 사역

구원론의 내용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신학적으로 구원론의 내용이 완전하게 통일된 의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구원론의 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나누고 또 다른 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에서 일반적인 입장이다.

신론에서는 지금까지 구원론을 다룰때, 구원론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즉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인격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의 인격 문제를 신론에서 다루고 신론을 전개할 때, 하나님 아버지에 관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루고 성령의 신성을 다루는 것이다. 신론을 할 때 삼위일체의 인격의 전부를 다루는 것이다. 신론에서만 삼위의 인격에 관한 부분만을 다루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원론1,에서만 하고, 구원론2.은 성령의 각 개인에게 적용 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다루고 있다.
 
성령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이 성령론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어느정도 자신의 윤곽이 들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앞으로 조직신학 또는 기타의 구원론에 대한 책들을 볼 때에 저자가 그 내용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느냐 하는 다루는 방법에 관한 내용만 잘 살펴보아도 그 저자가 어느 신학적인 입장을 밀접하게 견지하고 있는 지를 잘 알 수 있다.

구원론을 다루는 역사적인 방법의 유형은,

가장 보편적인 첫 번째는‘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그리스도인 됨과 생애를 분리하여 다루는 방법’이 있다. 예를들면, 구원론을 표현하는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즉 성화론인 것인데, 믿는 사람의 삶이 어떻게 거룩하게 되느냐?(성화론), 어떻게 의롭게 되느냐?(칭의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양자론) 어떻게 거듭나느냐?(중생) 이러한 믿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문제를 다루지 않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만 집중적으로 먼저 다루고 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그 다음의 순서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됨과 생애를 분리하는 방법이 있다.
 
다시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문제는 일체 다루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만을 다루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사건적 의미속에 성부 아버지와 성자, 성령의 사역의 언약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이슈, 그러한 일은 다루지 않는다. (James Garrett, William Shedd ⇒ 구원 >성령)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인 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도록 사역을 하시는 분이다. 다시말하면, 성령의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사역과 같은 말인데, 즉 성령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사역을 하는 것이다. 성령은 믿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사역을 감당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구원론1.에서 다루는 곧, 성자의 사역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양자되고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하고 예정하며, 계획하고 집행하시는 사역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역이 각각 다르다. 이것을 신학적인 전문용어로 Salutics Pactum, 또는 Pactum Salutics (팍툼-계약,언약, 살룩티스-구원) 즉,‘구원의 협약(구속언약)’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위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하나님의 기능적인 역할에 관한 언약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선택하고, 그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대로 집행하시기 위한 분이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 예정하시는 행동에 있다. 즉, 우리가 보통‘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때, 그 사랑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기도 전인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불러 주시는 바로 그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다. 영원전에 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 사랑을‘영원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 사랑은 이 세상의 종말이 완성된 뒤에도 계속되는‘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다. 독생자 아들을 그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아들이 직접 자신의 피를 쏟아 죽으셔야 만 했다.
 
구원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은 독생자 아들이 자기의 피를 흘리셔야만 하기 때문에 친히 사람이 되시었고 그 작정한 바대로 영원 전에 예정해 놓으신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기 위하여 예정되어진 바, 그 계획에 의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찢어 피를 쏟음으로써 그 근거를 나타난 것이었고 자신의 사랑을 확증케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모든 것을 만드신 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 구원의 객관적인 모든 근거를 다 성취하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구원의 저자’라 부르기도 한다. 그분이 없으면 구원도 없는 것이다. 바로 그 분이 구원을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렇게 만들어진 구원의 근거, 즉 성취된 구원의 효과를 하나님이 작정하신대로 한사람 한사람에게 적용하고 그 구원의 열매를 맺어 양자의 영광에 들어가는 날까지 쉬지 않고 우리들의 삶에 함께하고 사역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들은‘성령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축도할 때에 반드시 제일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 은혜는 우리를 위해서 이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기의 피를 쏟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만들어 주시고 그 구원을 값없이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은혜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 그 작정하시고 예정하시는 사랑에서 출발된 것이다. 성령의 충만과 교통하심이 - 우리 속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것으로써 충만하게 거하실 때, 우리의 마음의 마음의 문이 열리고 우리의 영으로 죽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요! 아버지의 사랑이요! 성령의 충만과 교통하심!이다. 이것이 바로 “Salutics Pactum”이다. 이것은 영원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약속하신 것이다. 각자의 역할을 하시는 삼위 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여기 첫 번째 구원론에서는 그리스도인 됨과 사역을 구분한다. 이것이 제가 강의 진행의 목표를 두고 있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법은 그리스도인 됨과 사역을 함께 다루는 것이다. 이 방법은 챨스 핫지, 어거스틴 스트롱, 버스 웰 등이 주장하고 있는 방법이 있다.
 
세 번째 방법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구원론에서 제외하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인 됨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원론이라는 제목하에서 모두 다루는 방법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인격을 제외하여 버리고 나머지 예수님의 사역 그리스도인 됨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원론이라는 제목하에서 전부를 다루는 방법이 있는데, 윌리암 쉐드(William Shedd) 라는 신학자가 이러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네 번째 방법은 그리스도 인격과 사역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생애보다 먼저 다루되, 후자를 성령론 이라는 제목으로 다루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구원론2.이라고 하지 않고‘성령론’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방식이 있다. 이 방법은 윌리암 클락(W. Clark)이 주장한다. 다섯 번째로는 그리스도인 됨과 삶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나누는데, 그리스도인 됨과 삶을 먼저 다루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중에 다루는 방법이 있는데, 데어 무디(Dale Moody)라는 신학자 이러한 방법을 취한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로 그리스도인 됨과 삶은 아에 다루지 않고 지나치는 유형이 있는데, 구스타프 아우렌(Gustaf Aulen)이라는 루터파의 신학자가 이 방법을 사용한다. 독일의 신학자 햄믈릿 틸리케(성윤리의 저자)도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방식들이 있는데,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첫 번째 유형인데, 이 유형의 대표적인 경우는 제임스 가레트(James Garrett) 신학자이다.

이러한 나누는 방식의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됨과 사역의 삶의 문제를 서로 나누고 그것을 구원론이라는 통합된 틀에서 다루는 것은 만약 성령론 이라고 별도로 다루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는다는 암시를 주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성령론을 그리스도의 사역과는 독자적인 분리를 가져올 수 있는 상존적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는 성령론을 은사론으로만 취급하여 왔다. 성령받으면 예언하고 방언하고 신유의 은사를 갖게 되는 것이 성령체험의 기본적인 요건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것은 성령론에 대한 위험한 탈선이다. 성령의 사역의 제일 주된 목적인 그 사역의 본질은 방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떠한 은사적 체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한 사람의 구원에 있다.
 
환언하면 성령받은 가장 최후, 최고의 증거는‘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에 있고, 구원 받아 아들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에 있다. 따라서 에언, 방언, 신유 등은 확고부동한 성령 받은 증거가 될 수 없다. 성령의 임재의 증거는 특별한 은사를 받을 수는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은사가 반드시 성령임재의 증거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은 원칙적으로 이러한 은사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인간의 생명이나, 힘 그리고 행복에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을 가장 근본적 원리로 전제(Presupposition) 한다. 인간의 행복, 구원, 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전제 하여야 개혁주의 구원론이 제대로 전개되는 것이다. 전제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전제가 없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개혁주의 구원론에도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 전제(Presupposition)는 인간의 구원, 행복, 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을 전제하는 것이다. 즉 관계의 전제성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 관계(Relationship)의 전제이다.
 
다시말하여 누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그 분의 자녀가 되어야 구원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원수되었던 것이 풀렸다는 것은 관계의 개선을 말하고 있다. 이 관계의 변화는 우리들이 의식하고 있던 것의 이전 것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들이 감지하고 느끼고 있었던 것보다, 소위 사람의 인식 이전보다 휠씬 더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 개인의 삶과 구원과 행복에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하는 이 전제하에서 보면, 두가지 강점이 있는데, 첫째는 긍정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하나님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밝은 면이 있다. 그러나, 어두운 면은 그런 관계를 추구할려고 하는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 관계에는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이 두가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서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고, 가치중립적인 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에 부정적인 측면은 그러한 관계를 맺으려고하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속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러한 대립적인 이해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적극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반드시 요구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 하며, 아버지라 부르며, 그 분을 순종함으로써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원의 명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이러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너무나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멀리하려고 하고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이 구원론의 문제에서 바로 이 두 가지 대립사이에 개혁주의 구원론이 서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언제나 이 두 가지 원리하에서 움직인다.
 
첫째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다. 또 한편은 인간은 하나님을 언제나 멀리 하려고 하는 자연적 속성, 육체적 원리를 갖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항상 유지되고 말해져야 하는 것이 개혁주의 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할 때, 즉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해석할 때에도 이 두 가지 원리가 그 말씀아래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성령론에서는 구원의 성취(구원론1.) 또는 구원의 획득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성취된 구원이 성령님을 통하여 어떻게 각 개인에게 적용되고 사용되어지느냐? 를 다룰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의 사역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에 있어서 이번 학기의 강의의 주요 초점을 맞출 것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는 원래 3가지 분야를 다룰 예정인 바, 첫 번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에 적용의 문제(구원론2.)를, 둘째는 성령에 의하여 각 개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가시적 적용으로 보여주는 성례전에 관한 문제를, 세 번째로는 구원의 종말론적인 완성을, 즉 육체의 부활, 영광, 영생과 같은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학습시간 여건상 첫 번째 까지에서 멈출 것이다.

웨슬리안 신학자로서 윌리암 버 포프(William Burt Pope) 라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은 ‘구속사역의 적용’이라는 말을 매우 회피하였다.‘적용’이라는 말 속에서 예정론의 오류 혹은 은혜에 따른 선택이라는 보증된 목적에 따라 개인에게 적용된다 하는 주장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아,‘적용’이라는 말을 예정론과 결부되어 있음으로 이‘적용’이라는 단어 사용을 거부하였다.
 
‘적용’이라는 단어는 쉽게 예를 들면, 영화관의 영화 표가 한정되어 있는데,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 이 극장표를 한정된 사람에게만 나누어 주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선택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적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예정론 자체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든 사람이 모두 구원받게 되어 있다면 굳히 적용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웨슬리안은 원래적부터 예정론을 믿지 않으므로써 성령의 적용을 극구 부인하였다. 성령의 적용이라는 결과로 믿고 회개하고 중생하고 거듭나고 의롭게 되고 양자의 영을 받고 성화되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까닦에 웨슬리안적인 즉 알미니안은 이러한 예정된 적용을 믿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전에 선택되어진 예정적 작정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와 같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는 사랑인 것이다. 창세전에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계시록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랑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전에 작정된, 우리 인간의 어떠한 행동도 있기 전의 그 사랑이 바로 이 선택적 사랑인 것이다. 이 예정은 창조보다 먼저 있는 것이고 이 처음 사랑은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있어진 그 위대한 사랑인 것이다.

펠라기안니즘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실 근거를 마련하였음으로 이제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는 순간에 그는 구워네 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전적으로 구원은 결단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펠라기안니즘의 최고의 슬로건은‘결단하라’이다. 이와 비슷하게 알미니안도 자유의지를 강조하는데, 구원의 방식에 있어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집단을 만들었고 그 집단으로 예정하였다고 주장한다. 무슨말인가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 몇몇을 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정체(indentify),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즉 구원받을 택자의 각각을 예정하지 않고 단지 집단으로만 예정되어 있으므로 그 집단에 속해있는 사람이 믿기로 작정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단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도 믿기를 거부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펠라기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약간의 차이점이 있지만, 자유의지를 강조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죤 웨슬 리가 알미니안주의자로서 알미니안의 월간지를 편집하는 편집장까지 지낸 바 있다. 근본적으로 웨슬리안 주의는 이러한 선택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특정한 예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원전에 아시고 영원전에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개인적인 구원의 예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적용’이라는 말의 정확한 표현은 이렇게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며 인격적인 특정한 예정을 전제할 때, 적용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지명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성취하고 난 후에, 바로 그 사람에게 적용할 그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표현하면, 크리스마스 선물때, 선물 꾸러미를 가족들에게 왕창 묶어서 준비하지 않고 각각 이름을 명기하여 큰애, 작은애 것을 표시하여 선물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예정론은 이처럼 개인적이고 특정적이며, 제한적이며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써, 하나님의 이 예정은 특별히 배타적으로 예정된 사람을 위한 특별 은총을 마련하여 놓으신 것을 성령이 주신다는 뜻으로‘적용’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성취된 구원을 나에게 적용해 주셔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바란다. 윌리암 버 포프(William Burt Pope)는 이 적용이라는 단어 대신에‘구속의 시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시행이라는 말은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건전한 용어가 아니다. 오히려 적용이라는 말이 가장 바람직하다. 루이스 벌코프도 적용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교회론은 성령의 사역을 다룰때 반드시 논의 되어야 한다. 루터는 로마교회적 사제제도적 관점을 가지고 교회를 이해한 반면에, 개혁주의 관점는 교회를 구원의 연합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하이 아키(high-arcky)한 체계로써 교황, 추기경, 대주교, 신부 등의 계급적 서열(사제)제도에서 구성된 조직의 틀을‘교회’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교회는 가시적인 외형의 교회안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의 방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유대주의와 로마교회는 유사한 교회의 구원론적 유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들면, 로마교회는 성찬식에서의 은혜의 주입(gratia infusa)인 화체설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개혁주의 성찬식이 갖는 영적인 적용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또한 성령의 구속의 적용인 것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을 다룰때 반드시 교회론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칼빈의 개혁교회는 교회를 구원받은 각 성도(개인)의 모임을‘교회’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 건물을 교회라고 보지 않는다. 어떠한 조직체도 교회로 보지 않는다. 오로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코람데요(Coram Deo)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개혁주의자들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건물에 들어가든지 나오던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요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앞에 대면하는 성스러운 자리가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말에 따르면, 은밀한 곳에 누울때에도 교회는 거기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 서는 살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하는 일이 거룩하고 그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성속(聖俗)과 교회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했다, 개혁주의 신앙인들은 자기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앙적 삶의 태도는 개혁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령의 올바른 이해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는 것이고, 바로 그 교회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순서상 왜 교회론을 성령론 아래의 한 부분으로 두어야 하는 이유는 구원받은 각 개인, 개인이 성령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결과물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교회론 안에서 다루어야 할 부분이 은사론인 것이다. 이것은 은사가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단지 교회론적 은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은사는 구원받은 자가 교회로써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과 선물에 불과한 것이다. 은사는 구원받은 자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 예로써 방언은 구원받은 자의 필수 불가결한 필요충분 조건이 아닌 것이다. 다만, 교회로써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은혜로우신 선물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령론 안에서 조직신학을 많이 다루지 안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조직신학을 작성한 찰스 하지 또는 워 필드 같은 분들은 조직신학을 전개할 때 성령론안에서 교회론을 다루지 않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된 모습을 낳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교회론은 성령론 할 때 심도 있게 지적되고 다루어야 할 중요한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조직신학의 순서상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은사론의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2. 성령사역의 목적 
 
성령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다. 성령론의 연속성을 파악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구현해 나가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모든 구원행위를 관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 때문이라는 관점을 잊어서는 않된다. 예를들면,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말하는 성경구절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사도행전 7장 55절~56절에서‘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라고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이 스데반의 그 순교의 웅장한 모습을 소개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그 사건을 통하여 전달하려고 하는 것에 그 의도가 있다. 그런니까, 스데반의 인생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셨다면,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두 이루어진 인생이다 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무엇을 경험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어떠한 자리에 서 있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고자 하는 영광을 이루어 가시느냐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성령의 목적이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령을‘영광의 영’이라고 불렸다.

사도들은 성령이 이땅에서 무엇을 위하여 사역을 하시는 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성령의 사역 하시는 일차적인 목적은 성도의 구원에 있었고 그러나 그것은 구원 받고 천국가는 것에만 일차적으로 전체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까지 돌아가야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 성도의 구원이다.
 
구원 받고난 이후의 삶을 말해야 하는 필연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라는 것과 영화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다만, 성화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성화를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하는 이유는 그 성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영광이 돌아가는 바로 그것이 내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였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삶에 닮아 가도록 징계하고 갱신시키고 연단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삶 위에는 아픔과 좌절이 있고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다. 죄인라는 육체적인 원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돌아가는 것에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영광을 구하는 데에 가장 큰 원수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육체적인 원리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 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성화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시는 것이고 우리들 자신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하기 위해서 사역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담이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은 인간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대변하는 자로 창조되어 진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에덴을 넘어서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주시는 것이다. 온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내도록 세우신 자가 아담인데, 고전 11장 7절에서도 사도 바울 역시 인간을 하나님의 현시로 간주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떠한가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하여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볼려면,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바로 그 사람을 보면 된다는 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속에서‘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이라는 의미는 그 여자가 남편이 어떠한 가를 보여준다는 것으로써 성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시가 드러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는 사람을 통하여 계시되고, 남자가 어떤 분인가는 그 여자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위에서 지으셨는데 사람이 타락해서 하나님의 의도가 좌절되었는데, 결국 그것은 깨진 거울과 같은 하나님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데, 즉 사람이 하나님을 현시하지 못하므로 그 결과로 구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적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실천적으로 말하면 왜 성령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시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성화와 영화에로 이끌게 하는가 하면, 그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지었기 때문에 그 영광을 반영하는 완전한 거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의 영을 부어 주신 까닭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위에 온전히 잘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라는 사실이다.
 
구원받고 천국 가는 그것으로만, 그렇게 이기적인 관점으로만 구원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 곧 구원 받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성령은 우리를 통하여 어째든 하님의 영광이 있는 굴절되지 아니하고 그대로 드러나게 하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르려고 하는 상태가 신학적으로 말하면, 바로‘영화’인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그대로 나타내 주는 상태가 영화로운 상태, 영광에 이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에 이를때 까지의 상태라는 말은 금빛 찬란한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의기양양한 상태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나의 상처받은 고난에 동참한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어 지는 그 날, 그 시간까지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 말하는 복된 날을 누리는‘웰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과 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울 갖추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겠다. 바로 이것이 성령충만의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부귀 또는 명예 등과 관련된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될지언정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가 아닌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지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는 것에 우리의 분별력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한국교회의 기도내용과 다른 부분 한 예를 소개하자면, 중국에서 조선족교회의 대표기도 내용에서는, 그들은 대표기도 중에 절대‘복을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에 보듯이 설교후의 기도내용은 언제나 ‘말과 행실을 통하여 저희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대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 어렵더라도 뒤로 물려서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키게 해 주시옵소서!’‘복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한다. 한국교회에서의 대표기도와는 다른 차원의 기도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도 주시고 은도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건강도 주시고 권세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는 자에게 선물로, 은사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주실 때에는 어떤 특별한 목적과 용도를 가지고 주시기 때문에 받은 자의 안위를 위해서 결코 주시는 것이 아니다. 받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잘 사용하면, 더욱 더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영광을 받지만은 그걸 받은 가운데 욕심으로 탐욕가운데 받아 혼자 누리고자 하면,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슬픔이 되고 사슬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원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나를 예정할 때에 나를 통하여 받고자했던 하나님께서 품고 있던 그 영광을 나의 생애를 통하여 그 영광을 거두시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영광과 기쁨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영원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갖고 있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 있고 자기의 영광을 온전히 거두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영광의 성령을 보내신 것이고 구속의 사역에 적용 하게 하시고 적용한 바대로 구원받게 하고 성화되게 하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성령이 사역은 영광을 위한 사역인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광에 돌리는 일에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돌리는 일에 수고스럽게 하였던 일에 동참한 기록인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로마서 1장 23절에 보면, 어떤 특정한 하나님의 법을 어길 경우의 죄인된 관점은 율법적인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반역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돌릴 의식도 없고 돌릴 마음도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가 죄인의 상태인 것이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이 죄는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고자 하는 그 구원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상태, 영적인 심적인 상태 전부다 죄인 것이다. 타락의 더 큰 비극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죄인의 상태인 것이다.
 
예를 들면, 박애주의자들 조차도 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아무리 그들이 선한 일을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성경이 죄인됨의 상태를 더욱 분명히 말하고자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 성도가 해야 될 지의 여부는, 사도 바울이 행한 바와 같은 사랑의 원리하에서 실족에 대한 행동 기준은 이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도록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결국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성경의 구절에 이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선악간의 기준이 말씀의 원리를 쫓아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담배 피우지 말라’라는 것을 오히려 반문하는 사람은 그 묻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언제나 구체적인 행동에 성경의 기록여부를 묻는 것이다. 그런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의식이 없이 사닌까 언제나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살아갈 궁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기다려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릇됨이 없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자에게 바른 지식을 주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아버지의 뜻을 알리라 라는 말에서 보듯이 주님의 방식은 순종의 의지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이 나중에 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에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 달라는 가증스러운 기도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떼쓰는 기도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처럼의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전혀 못 들은 체, 주무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 하지 않으셔도 우리속에서의 성령께서 그 분의 뜻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중요한 컨텍스(Context)는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인 것이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삼으시고 자신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 바로 이것이 성령사역을 이해하는 바로 기본적인 출발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후에 그분의 육신이 하늘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 있고 그분의 육신은 우리의 육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이고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과도 함께 있을 수 있는 육체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몸과 영혼이 하나님께서 완전히 드러내신 상태인 것이다. 이 부활은 우리가 장차 어떤 영광에 이를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도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도 굴절되지 않은 그대로 계시하시는 데에 까지 나아가는 사건이 바로 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인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이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는 몸은 다시 사는 리바이블 한 것이지만, 다시 산 것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해 가는 것이다. 더 나은 상태라 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제 더 드러낼 수 있는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다 갖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에서 18절까지 보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들로 하여금 바라보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영광을 바라보도록 지시한 성경 말씀이다. 주의 영이라는 것은 성령인데, 그 성령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 영광의 상태를 하나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 영광의 상태에 도달하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이 성령 사역의 목표인 것이다.
 
로마서 8장 11절에서는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 이미 암시가 되어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새 생명을 소유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새 생명을 입고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 영광가운데로 우리가 이끌려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의 상태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성령의 사역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서의 성령의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 성령론 강의를 할 때 이제 주목해 보는 것은 각 단계인 적용하는 것, 성례전, 종말론, 교회론 등 다룰 때 모든 긍극적인 지향점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개가 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고, 어떻게 성령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우리를 동원해 가시는 가를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성령의 사역을 관통하여 아는 것이 성령 이해의 가장 직접적인 목표인 것이다. 이 처럼의 이해가 바른 성령이해의 바른 관점이고 요지이다. 따라서 성령사역의 초점은 포괄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위에서 완전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이를 때에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마땅히 부활해야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야 되며, 완전한 상태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여기에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나의 구원이 마지막 날까지 성령의 인도아래서 이룰 줄 확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여기에서 출발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나의 영광을 다른 신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자기의 영광이 우리안에서 구현될 때까지 우리를 절대 놓으시지 않으신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그래서 구원확신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돛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은 자기의 영광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 확신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를 가져온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구원에 관한 아무런 체험이나, 감정변화나, 특별한 경험과 이상이 없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라면,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구하시는 성령의 손 안에서 확고하게 붙들려 있다는 사실이다. 성화의 주체가 성령이고 영화에 이르게 하실 자가 성령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구원은 곧 하나님 자신의 일이요 나의 구원은 곧 하나님 자기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반제(antithesis)가 아니다. 즉 인간의 구원과 언제나 동시적이다.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간의 구원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구원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내가 고통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려면 인간이 최고의 행복으로 누릴 수 있어여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자기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은 언제나 동시적이며, 함께 한다. 한 죄인의 완전한 구원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자신의 최고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 두 개는 서로 반제, 양립되는 것이 아니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구원과 동시적인 것이다.


1강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온전히 거두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사랑의 목적에 주님 나 자신을 받쳐지길 원하오니 주께서 원하시는대로 빚으시고 또한 원하시는대로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게 하시고 매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우리들 머리위에 태양같이 빛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또 말을 통하여 나의 마음과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 구원의 계획

후크마의‘개혁주의 구원론’은 그의 생전에 칼빈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한 책이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이 철학적이며, 학문적인 요소가 많은 반면에, 이 책은 쉽게 저술되어 성령론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구원의 계획이 있느냐? 는 질문에 대한 답은‘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구원의 계획’이라는 말을 아주 심각하게 다룬다. 이 말을 사용하는 당위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모든 일에 의지와 계획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인격의 특징이다. 우리가 집을 설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지으시고, 지으신 세상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 세계에 거하는 모든 피조물들과 특별히 그 가운데 인간들을 위한 계획이 있다. 오늘 이 구원의 계획을 다룰때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우리를 향하신 자기의 계획을 갖고 있었고, 그 영원전의 계획을‘예정’또는‘작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으신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철학적인 추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계획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즉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겠다는 의미는 즉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주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계획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원의 계획 속에 이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는 것과는 일정한 연관이 있고, 하나님께 우리에게 자기의 형상을 주시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를 구원계획 하실 때 가지고 있던 구원의 목적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창세전’에 라고 하는 구절이 계속 나오는데, 사도행전 2장 23절, 4장 28절의 성경적인 근거 구절을 확인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님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바 되었다는 구절이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이 어떤 모양으로 어떤 과정을 겪고 죽으시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 또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속에 정하신 바가 된, 그 계획의 결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죄가 십자가의 역사적인 원인이다.
 
십자가의 있었던 원인은 우리의 죄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인과관계의 역사적인 원인은 사람이 제공하였는데, 인과관계 전체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계획에 이다.‘십자가의 원인은 죄다’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우리의 죄가 원인이 아니고 본래적으로 십자가는 세워져야만 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의 죄가 아니라도 십자가는 세워져야만 한다는 주장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은 원래적으로‘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한다. 삶이 죄를 짓지 안했더라도‘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오셔서 죽으셔야만 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신학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몰트만이다. 십자가의 사건은‘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한다’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강조하건데, 이 말에 현혹되면 결코 아니될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떠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성품의 결과 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이단이다. 분명코 말하자면,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죄 때문에, 바로 그 죄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이고 결정적인 근본 이유이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안했더라면, 십자가는 이 땅위에서 세월 질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고 다른 어떠한 이유도 아니다. 이 공식을 넘어가면 전부 이단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확실한 기준이다.

그런데 성경의 에베소서 1장 말씀에서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또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에서 하나님의 그 정하심과 예정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죄가 십자가의 원인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죄가 십자가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데, 이 구절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과 그것 때문에 십자가의 세워짐을 포함한 전체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에 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신학적으로 인간이 죄를 지고 타락하심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말은 그렇게 말했다고 하여서 죄를 방관한 것이 아니고 이 모든 전체가 하나님의 계획아래 정하신 바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죄의 원인자 또는 조성자는 절대 아니다. 이것을 인간의 이해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죄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어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실 것을 아셨지만, 그리고 그 죄를 짓고 난 뒤에, 미리 예정하신 사람들을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죄를 조성하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결단에 따른 죄의 허용은 하시지만, 그러나 죄의 원인자는 아니시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말씀은 말하자면,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담의 타락이고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속죄의 사건인 십자가이다. 그 두가지 중요한 사건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도, 십자가의 사건인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이 모두가 성경이 역사 전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예정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만한 어떠한 우발적인 사건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일이 한번이라도 일어난다면, 하나님은 전능, 전재하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어떠한 사건이든 하나님의 전능하심, 전재하심을 방해할 만한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이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모든 사건의 저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 하심속에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십자가 사건도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매우 포괄적이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지 그 방식의 양식까지와 그 죽음이 가져올 결과, 죽음 이후의 사건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할 때의 성경의 말씀은 유대인과 로마인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써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그들이 서로 공모하여 한 것은 그것도 미리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으며, 심지어 가롯 유다가 배신한 것도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둘러싼 모든 사건과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건도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벗어나지 않는다. 루터가 말하기를 사단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탄이라고 말했다. 사단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경륜, 하나님의 작정을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예정 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영원한 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영원한 작정, 영원한 예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그 경륜은 모든 것을 포괄한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경륜속에 벗어나 있지 않다.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다. 왜 영원한 것이냐면, 영원 이라는 말은 과거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작정은 영원한 과거에 있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성경을 읽을 때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베드로전서 1장19절부터 20절까지 보면,‘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이‘창세전부터’란, 헬라어는‘프로기노스코’라는 말로‘프로’라는 말은‘앞에’라는 의미로 겐나우는‘낳다’라는 말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도 겐나우로 쓰이고, 어떤 일을 새로 만들어 시작하는 것도 겐나우 로 사용한다.어떤 일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인 물리학적인 천체적인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알리신 바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실 것 또한 그 때 이미 작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의‘프로기노스코’는 영원한 과거에서부터라는 말이다. 즉 이말은 오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있기도 전에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있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혼자 계실때에, 모든 만물이 있기도 전에 라는 말이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속에 있었다. 그래서 이 구원의 계획은 사실은 죄인의 구원 계획이다. 결코 사람의 구원 계획이 아니다.
 
영원전에 사람들이 범죄하기도 전에 그런데 죄인의 구원이 되는냐는 것은 성경에서의 만물이 있기 전에 의인도 악인도 있기 전에 사람들이 있기도 전에 그 때 이미 하나님이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을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때의 어린양은 제사장적 용어이다. 이 용어는 속죄의 양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실 것이 언제 작정되었느냐면, 창세전에 여러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물이 태어나기도전에 하나님께서 속죄의 양을 준비하신 것이다.
 
 이 말씀구절의 능동적인 주어는 하나님이고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나, 의인도 죄인도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신 것이다. 참으로 구원은 우리의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계시로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에 관한 계시를 특별계시라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우리의 구원을 땅에 기는 구더기에게 교육하는 것과 같이 마치 구더기에게 수학적 미분, 적분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일이다. 성경에서 야곱과 에서에서의 선택교리는 롬8장 28절의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의 성경 전체구절이 그 다음 구절인‘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미리 정하신 이 말은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있다는 것이다. 프로기노스코 라는 말과 미리 정하신 것 과는 같은 의미인 것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작정하신 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나서 누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의 계획은 이 땅이 지움받기도 전에, 창세전에 미리 작정하심의 하나님의 예정속에 계획되어 있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건은 과거의 하나님의 과거의 작정속에 있던 것이 오늘 나의 믿음으로 구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구원 받은 것이다. 누구도 우연히 믿은 것이 아니고 누가 믿은 것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셨는데 억지로 떼를 씀으로써 믿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데로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안전하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구원이다. 왜냐하면 그 구원은 모든 만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작정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들의 정체성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누리는 자가 아니라, 과거부터 영원전부터 영생을 누리기로 작정된 데로 믿고 영원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영생을 누리는 이 특권은 어느 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만물도 짓기 전에 우리에게 영생하기로 원하던 뜻대로 믿고 영생의 약속을 받은 것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실체적이며 초월적인 드라마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것이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구원의 초월적인 드라마인 것이다. 이 말씀의 구절은 예수님의 제사장적 기도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기도의 한 부분중,‘때가 이르렀사오니’에서의 그 때는 시간으로 도량할 수 있는 물리학적인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때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던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 때라고 인격적이고 계획하신 바로 그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 작정의 시간이 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때가 되었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가 죽으실 때를 알고 있는 것인데, 자신이 어떤 모양으로 죽어야만 하는 사실도 하나님의 경륜속에 있음을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비겨가게 해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 하셨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은 자기가 어떤 모양으로 죽어야만 한, 그 때를 이미 알고 있으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인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아셨고 반드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만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내가 사흘 뒤에 부활하신다고 한 말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을 세울 때에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고,“Pactum Saltis”를 수립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분이 함께 계셨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때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동시에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사건이 바로 그 유일한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가 하면, 자신이 십자가 상에 높이 들리움으로써 십자가를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사건으로 알고 있고, 아들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사건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자기 이해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자기가 영화롭게 되는 사건으로 비록 고난과 수치의 죽음이지만, 구약의 모세의 장대의 놋뱀 사건과 같이 높이 매달리는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뜻이 그대로 완전히 이루워진 십자가 사건의 최고조의 이르렀다는 영화로운 그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그 최고조의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것이고 영화로운 사건인 것이다. 아들은 집행자로 아버지는 계획하시는 분으로 그 작정하심이 완성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의 절정이며, 최고조의 경륜이다. 요한복음 17장 8절, 21절, 23절, 25절에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5절에 보면, 아버지여 창세전에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영광이라는 주제가 창세전에 라는 말로 귀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에 보면, 창세전으로 거슬려 올라가는데, 영광이라는 말이 이 본문에서 십자가를 의미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 사건은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죄인의 구원 계획은 죄인이 만들어지기 이전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나를 돕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기능론적) 아니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도울 수 있습니까?(본질론적) 라는 질문에 본질론적인 기독론이고 다른 하나는 기능론적 기독론이다. 전자는 기능론적 기독론이고 후자는 본질론적 기독론이다. 본질론적 기독론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나를 도우실 수 있고 나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능론적 기독론은 나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나는 모른다. 그분이 어디서 오셨는지 그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나는 모르지만, 다만, 내가 한가지 아는 것은 그분이 나로 하로금 눈을 뜨게 하고, 나로 일어나 걷게 하고, 나로 하여금 구원의 빛을 보게 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과연 어느 것 인가?

둘 모두 맞는 말이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 때문에 나를 돕는 다는 고백과 가르침이 있지만, 그 보다 더 많은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잘은 모르지만, 그분이 나를 돕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둘 다 포함하고 있다. 한쪽만 가지면 않된다.사실은 성경에서는 본질론적인 기독론은 30%정도 밖에는 않되고, 기능론적인 기독론은 70% 정도를 차지한다, 기능론적인 기독론이 휠씬 많은 부분을 할당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여 주는 것인가 하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예수님이 이미 영원전에 작정하신대로 오셔서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정체에 관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문제인 것이다.

기능적인 기독론의 철학적인 구조는 이원론적인 인식론이다. 이것은 좀 어려운 말인데, 순수하게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서 나는 그분을 나는 잘 모르는데, 그분이 어떻하든지 도와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의 정체성을 단순히 받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도 성경이 인정하고는 있지만, 기능론적인 인식론인 기독론만 가지고는 참된 신앙을 나타낼 수는 없다.
 
계시로 드러난 본질론적인 기독론이 필요하다. 이것을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기능으로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본질과 효과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효과 때문에 예수의 본질로 가는, 실제적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많다. 믿는 사람의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효과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이것 말고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본질로부터 효과로 가는, 이 본질에서 출발는 본질론적인 가르침은 꼭 필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이 병들기 쉬어진다. 왜냐하면, 구속론적인 효과에서부터 언제나 그리스도 에게로 항상 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성경에 병나는 기사가 있을 때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은 병 나음을 체험해도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경우가 있다. 10명의 문둥이가 병나음이 있었지만, 9명은 각기 자기 갈 길을 가고 단 1명만이 돌아온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돌아온 그 사람은 효과 때문에 돌아왔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그가 얻었던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돌아 온 것이다. 사실은 그는 효과 때문에 돌아 온 것은 결코 아니다.
 
결론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해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된 것 중의 하나가 기도함으로써 병났고 방언하고, 신유은사 받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기본적인 은사의 체험인 효과적 현상이 항상 바른 본질적인 믿음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근거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라는 본질에 관한 질문은 즉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예수님의 본질에 관한 질문은, 절대로 효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본질에 관한 지식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효과를 통해서 본질로 도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이 효과가‘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바른 본질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시가 필요하다. 즉,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이것 없이는 하나님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유인즉 사실은 예수님의 본질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모든 존재의 이성적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하나님의 이해는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계시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우리의 이해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즉 성령의 감동, 감화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도저히 알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어떤 사실을 분석하고 분석한 결과로 결론에 예수님 누구신가를 이룰수 없다. 우리가 믿는 것은 기적중에 기적이다. 이것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전 과거에 사람이 죄도 짓기도 전에 의를 행하기도 전에 만물도 지움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세우는데, 그 죄인의 구원을 세울 때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셨던 그 작정하신 사람이 바로 우리였다는 사실이고, 그 작정의 결과에 따라 오늘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영원전에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전에 가졌던 그 인격적인 언약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구속언약이라고 하는데, 은혜언약, 행위언약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구속언약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각자의 무엇을 하실 것인지 역할을 분담하신 사건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아버지가 누구다' 라고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 뿐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역사를 보지 않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는 누구냐 하면, 영원전에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고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인간이 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자이다. 아들은 영원히 아들만이 죽으실 수 있는 분이다. 아버지도 죽으실 수도 없는 영이고, 성령도 죽으실 수도 없다. 아버지도 성령도 사람으로 오실 수 없다. 오직 아들만이 사람으로 오실 수 있다.
 
영원히 이러한 것이다. 아들은 사람의 몸으로 가지고 태어나실 수 있고 지금도 이러한 몸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가 영으로 계신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원자라고 표현한다. 성령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기 위하여 믿는 자들 가운데 교통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영원히 이러한 것이다. 그분도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기능이 각기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축도를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 아버지 사랑, 성령의 교통 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삼위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구속사적인 기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가 작정하시고 아들이 그것을 이루시고 성령이 그것을 적용시키는 이 삼위 하나님의 협력하시는 사역의 결과가 아니면 사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사람이 구원에 이른 것은 삼위 하나님의 수고스러운 사역의 결과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구속언약 가운데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작정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는 성령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쓰어져 있는데, 그리스도의 영 이라는 것은 잘 이해하여야 한다. 즉 이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하시는 것을 각자에게 증거하시고 적용하시는 것 때문에 그 분을 그리스도의 영 이라고 부르는 것 뿐이지 그리스도나 성령을 같은 분이라고 하면 않되고 서로 다른 분이다. 그러나, 본질상 같은 분(Oneness)이다.
 
아버지가 아들이 아니고 아들이 성령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양태론 이라는 것이 있는데,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역사에 나타날 때면, 가면을 바꾸어 쓰는 것이다. 한 분이 1인 3역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지 역사상에서 아버지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들로 나타나기도 하며, 성령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은 세 분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이 아닌 것은 아들이 성령이 아니다. 분명히 세 분은 구분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하늘에서 음성이 있어 가라사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한 것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물속에서 세레 받고 있는 분은 아들이며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은 성령이 따로 계시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들에게 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주님께서 가서 얼른 성령으로 변화하여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양태론적 표현은 예수님을 거짓말쟁이(pretending)로 만드는 무지함의 극치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사실이 아닌데, 예수님의 가장된 1인 3역의 연극을 행하는 것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성경이 언제나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언제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세례를 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라고 세례를 주는 것이다. 세분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족하겠나이다 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말씀 하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Oneness)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제일 치열하게 논쟁되었던 것이 바로 삼위일체 논쟁인데, 바로 니케아 공의가 최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논쟁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세 분이냐 아니면 한 분이냐 라는 양단간에 결정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니케아 공의이다. 그런데 이 논쟁의 대표는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이다. 오늘날, 총회장급의 지위가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아타나시우스는 시골교회 목사정도의 지위 이었다.
 
아리우스는 주장은 성자는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신(God)은 신(God)인데, 아버지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동일한 본질이 아니고 차별된 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성자는 권위나 영광이 하나님보다는 낮다고 보고 있다. 아리우스는 유사본질을 강조 하고 있다. 이것은 아나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아들은 같은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에, 아리우스는 유사본질(homousios)을 말하는데,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신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그와 유사한 신성을 가지고 있는 열등한 신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유사본질을 인정하나, oneness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세분으로 계신다는 것만 인정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결국 그 하나님 되심의 본질에서는 하나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아타나시우스의 이러한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주장 때문에 자신의 망명을 5번에 걸쳐 시행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의 논쟁은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러나, 세 분으로 구분된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사실적 본질로 마감되었다. 신학의 본질적인 삼위일체의 논쟁은, 즉 하나님은 한 분으로 계시느냐, 아니면 세 분으로 계시느냐는 것은 그 논쟁의 핵심은 구원론 논쟁에 있었다.

그들의 논쟁의 감추어진 입장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이해차이 이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이해하는 그것도 결국에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아야 하는가 하는 구원의 방법하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추상적으로 사변적으로 관념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예를 들면,‘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나는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성경책을 어느 것이 맞는 지를 답을 구한다면, 그 사람은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 Who God Is? 이렇게 묻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야야만 되는가? 하는 구원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범하는 그 순간부터 몸과 영혼이 썩는 과정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너는 죽는다 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라는 의미도 있지만, 죄를 범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의미가 있다. 그 과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육체적 죽음이다.
 
사람이 육적적인 죽음이 죽고난 후에도 그 썩음의 과정이 멎추지 아니하고 사람이 영혼이 썩어가는 과정에 계속해서 굴복하여 결국 영적사망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영적 사망을 영혼이 썩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영혼이 썩어지면 사람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썩어가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썩어가는 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늘 이 시간 구원 받아라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려면, 우리의 썩어가는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걷어내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절대 무결한 본성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체인지(change)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아타나시우스는 '행복한 교환(happy exchange)' 이라고 하였다. 행복한 교환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다. 그런데, 행복한 교환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똑같은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죄에 오염되지 않은 어느 누구도 아담으로부터 오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왜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으로 되어야만 하는가? 아담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동정녀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잉태되어여만 하는데, 왜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야만 하느냐? 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사람의 본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더 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 하는 것인데, 그리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그 하나님이 자기의 본성을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 우리의 썩어질 인간의 본성을 가져 가셔서 대신 죽어 주셔서 구원받는다, 라는 이것이 교부들이 갖고 있던 구원론이다. 그러니까, 아타나시우스가 이 구원론을 바르게 전개했느냐, 아니냐는 이 문제는 놓아두고 이 논쟁의 핵심은 구원론이다. 아타나시우슨 사람이 구원 받으려면, 그렇게 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완전하신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면, 사람을 구원 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인데, 만일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사람의 본성도 완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는 믿었던 것은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3분으로 계시는데, 니케아공회에서 싸웠던 논쟁은 하나님이 3분으로 계시느냐? 않계시느냐? 라는 논쟁이라기 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분으로 계시느냐? 라는 oneness 논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렇게 oneness 논쟁을 하였느냐 하면, 만약에 아들이 하나님이 homo-ousios(호모-우시우스/동일본질)이 아니면, 아타나시우스 자신의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호모(homo)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로 아들의 본성이 사람으로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나 아들이 본래적으로 가져던 신성은 아버지의 신성과 그대로 똑같다 라는 말이다. 만약 똑같지 않는다면, 자신의 구원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니까 아타나시우스가 5번씩 추방되어 망명생활하면서도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포기하지 않은 절대이유는 자신의 구원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교부들이 모여서 이 교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만약에 아들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 아니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죄도 완전하지 않음에 따라, 이 구원을 절대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때부터 완전히 하나님이요,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God-Man)를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하나님이 누구인가?( Who is The God?) 라는 것은 드러 누워서 건빵을 먹으면서 하나님이 누굴일까? 라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태도이며, 이런식의 질문은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신학자들이 행한 하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하나님께 무릎을 끓고 겸손한 자세로 간절히 묻는 것은 곧,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냐라는 질문과 똑같은 것이다.
 
정리하면, 이것은 각 시대별 형상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본질로 한 분이시고 세 분으로 계시는 것이다. 지금도 세 분으로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고 성령이 있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아들이 될 수 없고 아버지가 성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은 영원히 사람이 되실 수 있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도저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서술적으로 묘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샤벨리우스 이단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논쟁의 혼란의 제일 큰 핵심은 oneness" 에 있는데, 양태론도 사실은 oneness" 즉,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하나님이 세 분으로 계신다고 믿었던 이단은 극히 드물다. 문제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원래의 기독교는 유일신인데,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여호와는 하나다’라는 유일신론의 이 개념에 큰 변화가 생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유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여호와 신앙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유일한 여호와 신앙은 모세에게 나타났던 불꽃가운데 만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야훼’라고 불려던 것인데, 그들은 언제나 야훼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코끼가 새끼를 낳은 것이다. 코끼리가 새끼 낳으면 코끼리고 사람이 새끼를 낳으면 사람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종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할때 모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누구인가?. 영원 전부터 있던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일정한 단절이 있다. 어떤 단절이 있는가? 유대교는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고 우리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신다는 것은 아들이 비로소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이다. 비로소 자기 비밀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이것이 큰 비밀이다.
 
아버지는 작정하시고 아들을 이루시고 성령님은 적용하신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이 가르쳐준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논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분이시다 믿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세분이 하나일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하나를 설명할 수 없어서 양태론이 나오고 다른 이단들이 나온 것이다. 이것을 다루는 이유는 구원론이 결국에는 하나님이 누구냐는 지식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약성경에서 구원론의 핵심중에 핵심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저주가 달려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스스로 나신다. 아들의 나심을 우리의 어떠한 비유로도 하나님 아들이 나심을 나타낼수가 없다. 오직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칼빈선생의 탁월한 점은 신학적으로 가야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누구보다 잘 아셨던 분이다.
 
칼빈 선생의 글을 너무 절묘하다.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에게 알기 원치 않는 부분을 아시고 열심히 조직해서 설명해야 할 부분을 설명한다 그러면 이런 부분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이것은 그분의 경건에서 온 것이다. 기도하는 경건에서 온다. 칼빈은 신학할 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이해되는 만큼 인간론, 신론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해놓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지식을 잘 정리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렇지 않다. 칼빈을 공부하면 칼빈주의를 이해할 수 있고 칼빈주의 공부하면 칼빈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근본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해서 하나님의 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탁월한 소양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누구라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요목요목 나누어서 잘 설명하는 탁월한 천재이다. 그냥 천재가 아니다. 자기 신앙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천재다.
 
내속에 있는 진실한 신앙을 언어로 체계적인 순서를 갖추어서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천재이다. 그러므로 뒤에 오는 사람이 그걸 가지고 다시 연구하면 더 깊이 더 풍성하게 더 광대하게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더 깊이 파야 하나?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칼빈은 진실하고 순수한 신앙이다. 늘 기도하면서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어디에서 멈추어야 되는가를 알려준다. 설명은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개혁파에서 가르쳐 왔던 교리가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삼위일체는 인간에게 허락된 신비이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를 가르쳐 주신 의도했던 그만큼은 가르쳐야 한다.

 

 

구원의 서정 (구원의 순서)

구원의 순서는 논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구원이 구약이나 신약에나 구원 받을 때는 일정한 구원으로 경험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을 때 구원의 경험의 공통적 요소가 있는가? 구원의 서정, 구원의 순서를 말할 때 구원의 순서가 중요하냐? 물어야 한다. 예전에는 구원의 순서(소명 믿음 회심 칭의 중생 양자 성화 영화)중에서 어느 것이 앞에 오고 뒤에 오느냐 에 대한 논쟁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교리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찬양이 중요하다고 한다. 찬양이 중요하다고 해도 교리만큼 중요하지 않다. 참된 신앙에 대한 표현은 교리에서 왔다. 교리는 성경에서 왔기 때문에 교리가 잘못되면 신앙이 다 비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의 위기는 바로 곧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동정녀 탄생 인정하고 육체의 부활을 믿고 영생을 소망하는 복음주의 위기는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교리가 성경에서 왔다면 그 교리를 압축하고 가르치는 교리의 진의 여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교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신앙을 주관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곧 체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어떤 효과를 갖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바른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구원의 서정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구원을 받을때 가장 먼저 오는 사건이 무엇인가?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구원의 서정을 다룰때 제일 먼저 오는 것을 칭의를 먼저 강조한다. 그 이유는 구원은 영원전에 작정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신학적 이유와 동기가 있었다. 영원전에 죄인을 칭의하신다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갖었다. 하나님의 칭의 행위는 시간과 공간안에서 실현되는 것은 사실인데 실현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그들이 먼저 의롭다고 칭의하시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칭의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다. 영원전에 작정하였기 때문에 칭의이다 라고 주장했다.

- 윌리암 훅스마는 중생이 소명보다 먼저온다고 주장했고 믿음과 회심이 칭의보다 먼저온다 주장하였다.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판했는데 구원의 실현과 구원의 적용을 혼동했던 결과라고 비판 했다. 훅스마에게의 구원은 믿음에 따른 결과라 보고 있다. 중생이 제일 먼저 온다 라고 했다.

- 존 머레이는 시간적 순서보다 논리적인 순서가 먼저 있다 라고 보고 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논리적으로 믿음을 회개보다 선행하는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임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롬8장28절에서는 믿음이 칭의보다 선행한다고 했고, 갈2장16절 믿음이 선행한다고 했다. 믿어야 구원의 열매 따른다고 했다. 먼저 중생하지 않고 믿어라 라고 했던 것이다. 죤 머레이는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로 그 순서를 보았다. 그렇다면 부르심과 중생의 논리적인 선후 관계는? 그는 롬8장28절에서와 같이 부르심이 있고 중생, 그리고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영화로 그 구원의 순서를 보았다.

- 마지막으로 화란의 신학자 G.C.벌까우어는 조직신학의 전체 권수를 쓰신 분인데,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 것 자체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구원의 서정은 청교도 신학자중, 윌리암 퍼킨슨가 최초로 구원의 서정을 만들었다. 그는 교인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골든체인(Gold Chain)을 만들었다. 원래적으로 칼빈에게는 구원의 서정을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후예들이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청교도 신학자들이 구원의 서정을 심각하게 신학화했다. 구원의 서정을 논하는 것은 잘못이다.
 
벌까우어에 따르면 구원의 서정을 신학적으로 몰입하면 구원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을 해친다 라고 말했다. 즉 구원 자체의 경험의 유기적인 단일성을 그릇되게 해석한다. 롬8장 28~30절 근거로 구원의 서정을 시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롬8장28~30절은 구원의 서정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최종적 완성인 그 확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벌코프도 구원의 서정을 제한한다. 구원의 서정을 나누면 우리가 갖고 있는 구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엡1장4절은 구원의 서정을 말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롬8장 전체의 뜻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상술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사도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신자들이 이르게 되는 구원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확신에 대한 근거는 사람의 성품이나 노력이나 현재적인 상태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로마서 8장의 뜻이다.

왜 내가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인가는 확신에 대한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것이다. 롬8장의 주제는 구원의 서정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구원의 첫번째 오해는 성경의 오해이고 두 번째 오해는 철학적 사고에 있다. 구원의 서정은 청교도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 되었다. 당시에 청교도 청교도 신학자들 사이에 철학적 사고가 널리 퍼져 있었다. 청교도 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자적 사고인 원인과 결과라는 사고 양식이 어느 정도 이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그래서 그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면, 순환적으로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영화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행위 곧 하나님의 은혜는 오로지 불러주신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러주시면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으셔도 도미노 현상처럼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영화로 이루어진다 라는 것은 “구원론적인 이신론”이다. 이신론적인 구원관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법칙을 주어놓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불러주시고 각 단계마다 일일이 인격적으로 관여하지 않아도 구원은 자기 목적을 향해 전개되어 나간다고 믿는 것이 구원의 서정이 갖는 제일 큰 잘못이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르심도 성령의 사역이다. 부르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유효하게 해당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듣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끝까지 듣지 않는 자가 있다. 부르심에도 복음의 말씀도 해당되는데, 사도행전의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의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난 사건에 보듯이 성령이 마음을 열어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하고 중생도 성령의 매 순간마다 관여해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루디아로 하여금 성령이 마음을 열어 루디아 자신이 듣게 하시는 것이다. 부르심을 유효하게 하는 자가 있는데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부르심 되게 하시는 분이 있는 것이다. 즉 성령이 있는 것인데, 그런데 부르심만 되고 나면 자동으로 중생하는 것이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중생 역시도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그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도록 사역하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은 구원의 서정을 가르치게 되면, 가장 큰 심각한 피해(잘못)는 우리의 각 구원의 경험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구원의 매 순간이 성령의 수고로운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바로 이 인격적 간섭을 부정하게되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냥 기계적인 법칙을 의존하게 되는 것인데, 성령 사역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이다.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예정하신 것이 그것이 구원의 실현이 아니다. 예정하신 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면 예정하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예정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인데, 구원하시고자 작정하시고 역사속에서 실현해야 하는 데, 그 객관적인 실현은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실제로 그 사역과 죽으심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하는데, 실제 그 효과를 나타내도록 사역하시고 전개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매 사건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원의 경험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경험(부르심, 중생, 영화 등)들이 원인은 그 전에 있었던 구원 경험이 아니고 바로 성령의 하나님인데, 그 원인자가되는 것인데, 구원의 서정이 원과 결과를 잇는 철학적인 사고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곧 바로 그 결과를 실현하시고 적용하시는 성령님이 매 사건마다 구원의 경험이 얼마나 많든지 구원의 경험의 원인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구원의 경험(칭의,성화,영화, 부르심 등)의 원인은 성령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인 사고는 인과적인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모델은 구원의 경험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을 통해서만 관계가 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사건도 없다. 우리의 구원의 예수그리스도가 절대로 필요하다. 이유는 우리의 모든 구원이 심지어 영화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를 벗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기독교의 종교는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한 종교이다. 이것 없으면 구원 못받는다. 구원은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언약적 관계 안에서만 보장이 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아들, 자기의 백성, 나의 신부라고 부르는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인격적 관계에서만이다. 그러므로 자선 사업가는 구원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약적 관계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위를 이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자기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적 관계를 맺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마무리 기도 

영원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작정하여 주시고 작정하신대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주님, 이 시간 우리가 머리를 숙어 주님의 이름을 찬송, 또 찬송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주님만을 높이며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내 몸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게 하여 하옵소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로 오늘도 우리들 가운데 계시며, 그 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줄 믿사오니, 말씀을 들을 때 마다 우리의 믿음이 합하게 하시고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5구원의 서정 마무리

구원의 서정을 지나치게 집착하면 첫 번째로 인간학 차원의 구원을 판정하는 경향이 생긴다. 다시말하면, 구원을 인간학적인 경향에 귀속시키는 문제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선행되어야 하는데 구원의 서정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집착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 데 그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나 사역을 강조하기 보다는 인간학적인 차원이 지나치게 강조되게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구원의 수요자와 성취자 곧 구원을 주시는 자와 성취자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지위보다 인간의 심리학적이나 인간의 경험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예를들면, 믿음은 선택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믿음은 원칙적으로 받았다가 잃어 버릴수가 없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 안에 있는 현상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사람이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믿음이 참되고 진정한 믿음이라고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확인이 최종적인 것이 되지는 못한다.
 
인간학적인 경험의 차원을 떠나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믿음은 한번 소유하였다가 잃어버린 후 다시 되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강조하건데 근본적으로 선택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의 노력을 요청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이다. 믿음을 일으키는 가장 우선적 원인적 우선 순위는 중생 아니면 부르심이라 사람들은 말한다.
 
믿음은 중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혹은 의심이 있어서 믿음이 있다 라고 말하면서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이 주권적인 행동을 강조하기 보다 인간의 경험하고 있는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라는 것이다. 보통 구원의 서정은 중생, 부르심, 믿음(=회개)라 한다.

성령이 우리속에 들어오면 첫번째 변화는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그것에 가장 직접적인 것은 “생명얻는 회개”를 하게 된다. 고넬료 집에 가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받았다”고 했다. 나중에 예루살렘 공회에 가서 사도들이 그 사건을 접하고 나서 그들이 생명을 얻는 회개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다고 라고 했다. 이것은 성령이라 말하지 않고 생명얻는 회개라 했다.
 
사람이 회개하는 것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불세례 그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니까 방언하고 예언하고 사람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 그것이 성령받음에 대한 일차적인 사도적 증거가 아니다. 사도들이 인정했던 성령받는 것에 첫 번째 증거는 영생을 얻는 회개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그들의 삶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로 간절히 원하는 심령의 변화, 그것이 바로 성령받은 변화이다.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없던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없던 마음이 생기면서 과거의 나의 지난날 아프게 생각하고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아서야 겠다는 강한 마음이 생기고 말과 행실에 변화가 오고 교회를 가까이 하게 되고 이제는 설교를 듣는 귀가 열리는 것 이것들이 불세례다. 이것이 사도들이 말하던 성령이다. 성령은 오관을 통해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느끼거나 보거나 만지거나 듣는 것으로 성령을 확인할 수 없다.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심의 임재의 확실한 증거는 회개이다 즉 확실한 회개이다. 그 마음의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성령받은 첫 번째 증거, 최종적인 증거, 사도들이 인정하는 증거는 회개이다. 성령을 받으면 종교적 변화가 오고 윤리적 변화가 반드시 온다. 모든 사람은 다 종교인이다. 하나님께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종교적인 내용의 변화가 온다. 돈과 세상과 육체를 섬기다가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과 그의 영광을 사모하는 참된 종교로 변화되는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종교에서부터 참된 종교로 변화가 온다.
 
그 변화가 무엇이냐? 그 변화가 일으키는 고의 현상이 성령의 역사다. 그것으로만 성령의 임재를 볼 수 있다. 믿음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이다. 중생도 부르심도 아니다. 중생과 부르심을 주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특히 물론 방언받은 것이 성령받은 증거도 아니다. 즉 구원의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으로써 교회를 위한 일종의 은사로서 계시의 시대 가운데서 주신 것이다.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시기 위한 수단이며, 그것은 필요에 따른 교회론적인 은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케 하실 때, 우리를 마음을, 즉 정신(이성)을 새롭게 하시는 것인데, 그 이성은 회복된 이성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생된 거듭난 이성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은사는 교회론적인 구속론적 측면에서 은사로 하나님께서 주신 수단인 것이다. 즉 필요에 의해서 주신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받는 자는 주시는 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받는 자에 있지 않는 것이다. 주시는 자의 작정하심에 있다. 내가 달라고 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다. 방언을 가르칠 때, 방언을 받는다고 연습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종교 행위이다. 우리가 구원을 누가 받는가? 하는 것을 물을 때, 구원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이기에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구원을 원하는 자가 받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할 때, 우리가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가 강조해서 받아야 하는 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주시는 자가 받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둘 다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권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면서 또한 성령을 사모하기를 주시는 것이다. 성령받기를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두가지 진리는 참으로 신비롭게도 조화로운 것이다. 이 두가지 진리는 아무 모순이 없이 말씀하고 계신다. 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이미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성령을 사모하라는 말씀이 많이 있다. 원하는 자에게 성령받기를 사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두가지를 조화롭게 설명하기를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 이것은 주시는 자의 작정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이다.
 
예를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했을 때, 사람이 원한다고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주시는 자가 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한다고 해서 회개가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 두가지를 성경에서는 아무런 모순을 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가 동일하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를 완벽하게 조화시킬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 절대 불가능하다.
 
이 둘 사이를 조화롭게 해결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이것이 신학생들의 가장 많은 질문이고 조화롭게 시도해보려다가 결코 불가능함을 목격하곤 했다. 지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이고 참으로 신묘막측하심의 진리인 것이다. 한쪽만을 강조하게 되면, 알미안주의나 펠라기안주의로 빠지게 되고 또 다른 한편을 강조하게 되면, 즉 선택만을 강조하게 되면, 유명론, 관념론적 신앙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둘 다를 믿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믿음을 일으키는 일차적인 원인은 중생과 부르심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지 중생과 부르심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성령론을 제일 먼저 변화시키고자 할 때 첫 번째 성령을 에너지, 곧 능력으로 생각한다. 성령의 첫 번째 변화는 능력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 마음의 변화이다. 마음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인데 마음은 제일 밑바닥에 종교가 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어떠한 식으로 화려한 그물을 짓고 있든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을 볼 때 외모만 보고 붙잡을 때 그 눈에서 피눈물 난다. 그 마음 깊음 속에 주를 믿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구원의 서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학 차원으로 구원을 한정하는 경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서정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일방향성 만을 강조하는 잘못이 있다.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성화, 영화 이다 라고 하는데, 항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시간적인 사고로만 나눈다. 성화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영화는 죽어야만 경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성화와 영화 전의 것은 과거의 것이고 성화와 영화는 경험하지 못한 죽어야만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 된 것이다.
 
성경에 보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이렇게 말할 때, 과거 완료, 현재 완료 되어있지 않고 부정사다. 말하자면 반복을 강조하고 현재 진행을 강조하는 것이다.“마음의 변화를 받아 새롭게 하여“는 완료가 아니다 계속 반복 되어야 한다. 사람이 칭의 되고 난 다음에 성화되어야 하는데 언제나 성화가 나중에 오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성화가 먼저 칭의를 나중에 언급하는 것도 있다. 이렇게 일방향으로만 순서가 진행되면 안된다.
 
성경을 보시면, 고전 6장 11절 보시면 우리는 흔히 칭의 다음에 성화가 온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런 순서를 승인하지 않는다. 고전 6장 11절 ”씻음“과 ”“거룩함”이 의롭다 하심“보다 먼저 온다, 이 본문에서 칭의를 성화보다 나중에 언급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칭의와 성화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서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성경의 저자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냐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인데 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관심사, 직업 등을 성경을 기록하는데 반영되도록 허락하셨다. 저자들의 특색이 반영되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데 자신의 의도대로 기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감독하셨다. 기록하는 말씀이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철저히 감독하셨다. 단어, 선택 문장의 시제 문장의 흐름 모든 것까지 하나님이 간섭하셨다. 성경은 영감되었다. 그러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지성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은 우연이 아니다. 굉장히 중요한것이다. 이 순서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우연히 쓰신 것이 아니다. 이 시간적 순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강조하는가? 이렇게 구원의 순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말하자면, 부르심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성화 영화 이러한 구원의 결론을 가능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강조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다할 때, 이 세 가지를 구원을 얻었느니라 라고 표현하면 된다.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조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토대가 되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중요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해 놓으신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으로 말마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이것이다. 그러므로 강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고전 1장 30절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의도하심대로 성취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대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내 위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 위에 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내 위에 있다. 안 믿는 사람은 그 머리위에 하나님의 진노의 먹구름처럼 가득하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낳고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결국 자살하면 안된다. 또한 우리의 삶은 고귀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인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 뜻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가 우리를 보내주실 때 그가 작정하신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 뜻이 나의 삶을 통해 꽃이 만개하듯이 그 뜻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 뜻이 다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집으로 데려가신다.
 
비록 내 삶이 권태롭고 그 현실이 비참하고 내 삶의 경험이 잔혹하다 할찌라도, 한가지 변치 않는 사실 한가지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낳았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 사실만이라도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감당치 못할 시험이 없다. 다 이길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너희는 즉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너희는 성화한 사람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았다. 여전히 예수를 믿지만 생활의 변화가 없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게 살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 나왔고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 구속함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의 기원 이러한 것이 가능하게 된 그리스도의 사역 그 사역을 가능하게 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 것이다.
 
내 구원의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이 개념이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그 사랑으로 이 땅의 오셔서 자기 몸을 주시고 자기 몸을 쪼개어서 그 피로 우리 죄를 속하시고 구속의 경건을 만드신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교통하심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다.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이러한 구원의 개념을 가능하게 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성령의 교통을 강조한 것이다.

칭의를 오늘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칭의를 지나간 과거의 것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다. 칭의는 성화와 밀접한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칭의는 과거의 한번 경험으로 지나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우리를 계속해서 의롭다고 의롭다고 말씀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전히 변화 받지 못한 육체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자기의 몸이 쪼개지고 그 쪼개진 피로 우리 죄를 친히 간구하심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심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다. 천상에서 오늘도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아버지 앞에 죄 속함을 간구하신다. 그래서 칭의는 완료된 사건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앙가운데서 반복되고 경험되는 사건이다.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한다. 날마다 의롭게 되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은 은혜이다. 아무런 노력도 원치 아니하시고 은혜를 주신다. 믿음은 수단이다.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의 구원의 진리를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구원의 서정을 기계적으로 강조하면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을 일련의 사건을 정렬하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이 소원한다고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갖는 자만이 회개한다. 중생, 칭의도 인간편의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다. 중생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믿음과 회개를 같은 곳(level)에 놓고 이해한다. 다시말하면, 어떤 부분은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것으로 어떤 부분은 사람이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인간이 협동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신인협동설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 반드시 믿음과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이 곧 믿음과 회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의롭게 되었다고 반드시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순간 매순간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하게 되고 믿음으로 거듭난다. 왜 이렇게 말하게되는 이유는 고전 1장에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 구원을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은 그런 순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사역 안에서 강조하시는 것이다. 디도서 3장 5절“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그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중생이 있고 그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새롭게 하심이 있다. 중생의 씻음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아니라, 중생과 씻음은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에 있다. 이 두 가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다.
 
벧전 1장 23절에서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의 구원의 경험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의 도구는 말씀이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의 문이 여시고 열린 마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매순간 있는 것이다. 칭의를 있게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이다. 구원을 순서의 관점에서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회개를 있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다. 구원을 순서에 관점에서 보지 말고 은혜와 믿음이란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이라는 원리만을 강조하는 것이 성령사역이라는 바른 이해가 될 수 있다.

참고로 존 오웬의 “죄의 소멸”를 읽어보기 바란다.

 

 

5.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해하기 위해 언약을 알아야 한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예정한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부른 것이다.하나님과 아담의 교제는 언약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담을 만드시고 정기적인 교제를 하신 것은 언약을 전제로 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관계는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다 라는 특별한 관계이다. 이 언약적 관계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즉 구원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사람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 특별한 관계란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언약적 관계에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곧 구원이다. 구원이란 사건인 동시에 사건보다 선행하는 것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는 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나도 하나님을 알고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나를 자기의 자녀라 부르는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바로 이 특별한 관계에 들어갈 대상으로 우리를 예정해 주셨다. 그리고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한다.
 
지식이 지식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없다면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자고 우리는 유한자다 무한자와 유한자가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것이다 어떻게 맺는가?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는 자녀로 부르고 우리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대화하고 느끼고 그 친밀한 관계속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자와 유한자가 사이의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 한계를 뛰어 넘을수 있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인격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채널이 있어야 한다. 그 채널로서 하니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없이는 기독교의 종교는 없다. 그것이 없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와도 우리를 위해 죽었을 찌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질 수 없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은혜도 알고 감사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줄도 알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땅에 기어다니는 구더기에게 미분 적분방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떠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우주는 너무 광대하다. 우주를 아는 사람만이 우주가 광대하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을 떠받들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관계 안에 우리를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 언약적인 관계는 특별한 관계다. 이것은 전폭적인 헌신하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우리는 그 모든 은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기 원해서 부르신 그들에게 은사를, 언약을 주신 것이다. 우리를 언약적 관계로 만드신 것이다. 구원은 이런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믿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도 우리를 예정하신 대로 언약적 관계로 들어오시게 하는 관계다. 하나님의 형상을 아담에게 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신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3장38절에서 아담을 사람의 조상으로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다.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선택된 사람들이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이 언약의 징표다. 그 사람이 언약에 머무는지 머무르지 않는지 가리기 위한 시험지다. 그것을 따먹지 않은 한 그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안에 있음을 그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세상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 언약적 관계가 파괴되고 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항상 부르신 다음에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람 부르시고 언약을 세우시고 이삭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야곱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계속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모세를 통해서 언약을 세우셨다. 나중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을 파괴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너희들을 회복시키신다 하셨다. 예수님도 유월절 전날 밤 마지막 식사 때 이것은 나의 피로 살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라고 하셨다. 우리가 지금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룻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룻도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있는 언약 안에 들어오는 신앙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올 때 그를 하나님이 복되게 하셨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언약에 들어갈 사람을 불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게 하는 사역이다.

고전 15장 21~22절, 롬 5장 12절~17절 구원에 관한 언약적 배경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아담을 대조하는 것이다. 구원을 이해하는 도표가 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역사에 존재하였던 인물이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다. 구원의 원리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언약의 머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는 아담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미쳐진다는 대표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아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아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말미암는 모든 인간의 후손들이 아담처럼 범죄한 자로 아담처럼 범죄하고 아담처럼 죽는다는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죽는 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죽음이다. 언약을 깨뜨린 자가 겪는 결과이다. 그래서 아담은 결국 자기 자신의 한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죄를 만든 사람은 아담 한 사람이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죄를 범했다. 행위로 죄인된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것이다. 내가 언약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같은 원리로 모든 사람이 의로움에 이른다는 것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때문에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다.
 
새 언약에 들어가는 수단이 무엇인가?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마찬가지로 믿는자가 그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다. 죄인 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케 하므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적 출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적인 출생은 육체로 말미암아 영적 출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다. 구원은 행위로 얻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성령의 아버지 삼위일체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으로써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없다. 오직 언약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언약에 참여하는 자만이 구원받는다. 언약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믿음으로 참여한다. 그 믿음이 성령의 중생케 하심을 일으키신다.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기는 한데, 원인과 결과식으로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써 연쇄적인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10장~16장에 보면 언약적 모델로 되어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원의 경험을 원인과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신론적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다. 구원의 서정을 언약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루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성도들을 언약으로 한대 묶는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칭의와 성화처럼 구원의 경험중의 하나가 아니다. 구원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라고 한다. 그리스도 연합안에는 모든 구원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출발한다. 구원의 적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적용이다. 성령은 우리안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엡5장 30~31절 “우리는 그의 몸의 한 지체다...”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되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리 몸이 성전 이라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연합 때문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약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한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언약적 관계이다. 그것이 곧 교회와 그리스도와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공동운명체이다. 교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힘은 바로 성령으로 부터이다. 언약적 관계를 깨버리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깨어 버리면 한 몸 한 지체가 될 수 없다. 약함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회개하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결국 언약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하고 육체를 죽이고 성령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즉 죄를 죽이고 성령께 순종하게 하는 이유는 언약 안에 머무르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목적은 죄를 소멸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소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신부로 그와 연합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이 일반 세상윤리와 다른 것이다. 죄의 소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순결한 신부로 언약의 동반자로 그와 연합하기위해 죄의 소멸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수 없고 그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구원의 경험도 결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안된다면 구원의 경험이 없다. 칭의 회심도 없고, 믿음도 없고 회개도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죄이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이 죄에 끌려가지 않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악한 양심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사죄의 확신을 주시고 우리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케 하신다.
 
우리가 미처 회개하지 못한 것도 성령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해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언약의 동반자로서 그리스도의 연합에 머무르지 못한다. 성령의 사역은 외적인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본질적인 그리스도의 형상 만든 요소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명령인 동시에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 연합적 힌트가 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짐승 머리 위에 안수하고 그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물로 드린다. 이럴 때 안수할 때 그 대상인 짐승과 제사를 드리는 제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짐승은 그 죄를 지은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서 그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의 인격적인 개체성을 믿는 믿음 때문에 불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신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죄도 언약으로 사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시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듯이 이것은 정해놓으신 질서이다.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되고 언약으로 죄사함 받는다. 다른 것으로 절대 죄시힘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 동물제사가 많이 행해졌던 것은 언약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다. 그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이다. 우리를 위한 언약에서 대신하신 죽음이다. 실제로 나의 죄가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다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가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그 외에는 죄가 해결되는 방법이 없다.

이사야 53장 4~6절, 이사야 53장 11~12절에서 고난 받는 종의 기사가 나온다. 고난 받는 종의 고통은 그 고난 받는 종에게 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고난이다. 채찍을 맞고 질고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수욕당하고 버림당하고 결국 죽는 그 모든 그의 고통은 그가 고난 받는 종과 붙어있는 모든 사람의 위한 고난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고통 받을 때 언약적으로 내가, 그와 함께 고난을 다 받았고 그가 장사되어 죽을 때 내가, 언약적으로 그와 함께 죽고 그가 부활할 때 내가, 함께 부활하여 산바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마25장40절“작은 소자”를 자기와 동일시(identify) 한다. 언약적으로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가장 작은 자와 억울한 자와 버림 받은 자와 자기와 동일시한다. 구제하는 것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잊혀지지 아니하고 소멸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언약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다. 언약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이다. 내가 헌금한 것이 다른 사람이 오용한다 할지라도 내가 바친 것이 오용된다 할지라도, 바쳐진 것이 무효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받쳐진 것이다. 헌금할 때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 오직 언약적 하나님만 생각해야 한다. 요15장에서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는 한 구원의 경험은 모두 내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모두 내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이 중요한 것이다.


<3강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영원전에 예정하시고 작정하신대로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기를 쉬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계속하게 하옵소서. 우리속에 하나님의 이 사랑이 붙들린 바 된 간절한 심령을 주사 하나님의 종되기를 마음 또한 생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언약에 동참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우리 것으로 받았사오니, 우리가 복받은 사람이요 정말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세상의 재물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모하게 하지 않도록 주님 우리를 날마다 붙잡아 주옵소서. 말씀을 읽을 때 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믿음의 기초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양심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6. 구원과 언약의 관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을실 때, 창 1장 26절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어 주신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뛰어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지식과 경험)를 맺기 위한 신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언어로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교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존재의 동등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존재가 같지 않으면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아무리 동물(개나 강아지 또는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과 인간과는 언어로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교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짐승보다 더 존귀한 존재이다. 존재의 동등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인격적인 관계 안에 들어 갈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이라고 하는 동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관계에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무한자이고, 우리는 유한자이며 하나님은 창조자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는 마치 사람과 구더기와의 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의 동등함을 보장해야 한다.
 
]다시말하여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존재의 동등성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 속에 하나님 자신의 본질에 대한 본성의 한 부분을 우리 속에 반영시키는 게획을 세우셨다. 이것이 여기에서 나오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출 25장 9절에서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성막(holy tent)은 모세가 자기 맘대로 지은 것이 아니다, 장막의 크기, 모양, 색깔과 구체적인 양식과 그 모든 것이 자신이 하늘에 장막을 본 그대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장막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장막의 모형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영원하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이 땅에 있는 것은 유한하다. 이 땅에 있는 것은 사람이 만들었고 하늘에 것은 영원하고 하나님이 만드셨다. 둘 사이는 본질적인 차이는 있지만 지상의 있는 장막은 하늘에 있는 장막의 모형이다. 이 두개는 어떤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이 연속성을 하나님과 사람사이에게도 붙이셨다. 이 연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대로 자신이 하나님의 감동 중에 자기가 본 그대로를 지상에 옮겨놓은 것이다. 실제로 모세의 지상에서의 장막을 본 것은 하늘의 장막을 본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연속성이 있고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사람의 하나님의 본질은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자고 우리는 유한자이고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 비록, 그런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유사성이 있다.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한 본질적 유사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고 우리는 계시를 받아 마음에 믿을 수 있고 반응할 수 있고 그것을 받아 예배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우리는 받을 수 없다. 짐승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한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론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생각하고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들고자 하셨다.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를 바탕위에 언약이 세워졌다. 이러한 언약은 인격적인 관계를 언제나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기 형상을 부어주신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고, 더 나아가서는 인격적인 바탕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인간들 사이의 언약의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언약이란, 쌍방의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책임을 지시고 우리도 그 허락된 구원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의 언약의 관계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속에 주시는 것이다.

 

 

7. 전가의 원리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을 맺게 하기 위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자체가 언약적 개념이다. 사람들을 언약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담언약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가의 원리는 무엇인가? 성경은 아담이 모든 언약의 머리(head of covenant)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담의 행동과 결과는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그 행동의 결과가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전가된다. 그 뒤에 나오는 모든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준다. 그들의 행동과 모든 책임이 아담과 관계된다. 그들이 아담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 아담과 행동의 결정은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는 의미에서 아담은 언약의 대표자 이다.
 
아담이 타락할 때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타락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다. 그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과 수고와 해산의 고통을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다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은 모든 언약의 머리가 된다.

전가의 원리가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언약의 대표자의 행동의 결과를 복이든 저주이든 그 언약의 행동과 행동의 결과를 언약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실제적인 차원에서 물려받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유전적인 특징을 물려받는 것처럼 말이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는 것이 있는데 유전적 요소만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만 물려받는 것을 의미한다. 좋든 싫든 부모로부터 물러 받는 이치이다. 예를들면, 부모로부터 유전적 특징을 물려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 롬5장 18절에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행위언약에 속한 사람)이 원하던 원치 않던 아담의 후손인데, 즉 행위언약에 속한 사람이 되었는데 한 사람 범죄로 인해 정죄에 이른 것과 같이, 아담이 지은 범죄가 그 뒤를 이어서 나온 모든 사람들이(후손들이) 전가되었다.
 
그래서 의에 한 행동으로(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또다시 많은 사람(은혜언약에 속한사람)이 그들이 비록 의로운 생활을 행하지 않았지만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이것은 복음중의 복음이며, 가장 중심적 원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아담의 죄의 본성을 물려받는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14절에서 보면, 여기서 누구의 죄가 전가되는가 살펴보면, 하와의 죄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언약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아담은 그 가정에 언약적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따먹지 말라 하신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이 바로 아담이고 그 모든 책임을 질 사람도 일차적으로 질 사람도 아담이기 때문이다. 그 명령에 따른 아담이 그 책임의 결과를 일차적으로 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속임을 당한 것은 사실 하와이다. 그 속임을 당한 것은 이와(하와)가 먼저이다. 꾀임을 받은 하와가 먼저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지만 아담은 속임을 받지 않했다. 그러나 휠씬 더 심각한 죄를 진다. 아담은 먼저 꾀임을 받지 않았지만, 아담은 자신이 죄 짓기를 원해서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래서 아담의 죄가 휠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의지적으로 죄 짓기를 작정할 때부터 벌서 아담은 그 본성에 타락이 왔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그 완전한 본성이 머무르지 않고 이미 그 타락한 본성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 타락한 본성이, 즉 의지적으로 죄를 짓고자 한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면서 아담이 지었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가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가 반기는 소리를 듣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사람이 태어날 때 사람이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영적으로 사망에 이른 자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에 아담이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고 어머니의 뱃속에 10개월을 지나다가 태어나는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의 타락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우리의 본성이 타락 했을 뿐 아니라, 아담의 타락의 본성위에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저주가 같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엡2장 1절~4절까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 마음도 부패하고 정신도 비뚤어지고 이성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죄인의 특성을 사람들은 모두 가지게 된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하나님 뒤에 숨었다.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식을 간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모든 사물을 설명하고 싶어 하는 적 그리스도적 성향을 가졌다. 이것이 죄인의 특징이다. 엡2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인간은 이렇게 아담으로부터 죄와 허물을 그대로 태어나는 죄의 종으로 태어난다. 자기의 선한 의지도 없는 것이다.
 
루터의 말대로 선한 의지도 없고 선한 것을 의지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선하다고 한 것을 선하다 느끼지 못하고 악하다고 해도 악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가 소원하지 못하고 산다.

사람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높은 경지이다. 사람 안에 있는 의지는 노예의 의지다. 롬6장 17절에서는 너희는 본래 죄의 종이다. 내 마음대로 못한다. 내속에 있는 죄의 충동에 따라 산다. 그래서 아무도 자유인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사람을 두부류로 나누면 성령의 행동하심을 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죄의 지배를 받는 자가 있다.
 
사람은 자연적으로 태어나면서 벌써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갖고 나오고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의 소리를 머리에 안고 태어난다. 그가 제일 먼저 듣고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태어난다. 그래서 그 마음에 절망과 그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 그 마음에 어두움이 있다. 만약에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람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더라면,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의 새 언약의 대표로 오시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일도 없다. 예수그리스도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전가의 원리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만약에 누구의 죄나 누구의 공로가 우리에게 언약적으로 전가되는 것이 하나의 질서로 원리 가운데 없었더라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이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해서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로 있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도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전가되는 일이 없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이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언약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가 나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전가된다는 것이다. 죄를 전가 받았듯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그의 공로가 믿음으로 나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내가 짓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정죄 받는 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항의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약의 속성상 이 언약은 우리에게 물어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권적으로 선포하는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모든 사람들은 언약아래 태어난다. 누구나 언약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의 특징은 언약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언약 안에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언약의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짓고자 하실 때 우리를 자기의 사람으로 예정하실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려고 하는 의지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을 한순간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한번 강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어놓은 그의 공로와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하시겠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를 생각하신 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는 존재로 하나님의 뜻 속에서 작정된 것이다. 전가가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이다.

언약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되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고자 하실 때 언제나 언약을 근거해서 복을 주셨다. 언약을 떠나서 사람을 복되게 하신적은 없다. 언제나 언약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통로가 언약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언약을 파괴했기 때문에 너희가 먼 나라로 쫓김 당하고 도망당하고 살육 당하고 기근이 찾아오고 그리고 회개할 때 다시 언약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언약의 회복을 외친다.
 
왜냐하면 언약이 회복될 때 하나님의 복도 회복되는 것이다. 언제나 언약안의 삶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언약을 존재로 만드신 것은 아담을 복주기 위하신 방편이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언약의 파괴자가 되어서 그 죄의 형벌을 다 같이 받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을 죄인 되게 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안에서 보면, 아담언약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 언약 안에서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언약을 예고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으로 죄인 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계획안에서 보면 아담의 언약 자체도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예고였다.

아담이 죄가 사람에게 전가 되고 사람이 죄인되었다. 이것이 아담언약이다. 이것이 아담에게 전가되는 일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성도가 되는 믿음의 전가, 의의 전가가 없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전가란 말은 언약을 애초부터 생각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목표하셨던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방편으로 전가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의 죄가 전가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전가되는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아담의 행위언약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언약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롬5장 13절를 보면,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이 오실자의 표상이 되었느니라. 아담이 죄를 지어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게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의가 사람에게 전가되고 사람을 성도로 만드는 일에 표상(같은 양식)이다.
 
장차있을 그일에 대해 장차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원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동일한 양식(patturn)인 것이다. 아담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 행위언약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의를 전가 받는 은혜언약을 미리 보여주는 패턴이다. 사람이 어떻게 죄인 되었는가를 설명할 때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미 죄인으로 정죄할 때에 사람이 또한 어떻게 의롭게 되는 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에서 죄인을 심판하실 때에 보여 준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중요한 것은 구원은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행위로 죄인 된 사람은 역사의 아담 한 사람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다 언약적 죄인이다. 역사에서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언약의 속함으로 그가 그리스도의 물려받고 의롭게 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에게는 애초부터 사람이 행위로부터 구원받는 길이 없었다.
 
영원전부터 창세전에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예정 하실 때부터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속에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의를 전가받고 참여하는 의롭게 되는 구원의 길 외에는 다른 어떠한 길에는 제시하거나, 계획하거나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허락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만 오로지 영광이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다. 아무도 구원의 저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의 의와 공로를 덧 입지 않고는 의인되게 하시지 않기 원했기 때문이다.

갈 3장 11절에서 의인이 믿음으로부터 살리라 하신 것은,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을 작정하실 때부터 자기의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 외에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하여 자기의 무능력 때문에 사람을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방울의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슴을 치며 호소한 것이다. 율법은 애초에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이다. 율법이 이론적으로는 지키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율법은 이론적 구원의 길이지만 실천적으로는 구원의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는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 한번도 없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을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자기 행위로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끌어 내리는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전가의 원리를 주신 것이다. 그러닌까 자랑할려는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자기에게 화가 미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다. 전가의 원리를 통해서만이다.

히 8장 7절에서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율법은 원래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선하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이 구원의 길이 처음부터 완전한 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길로서 새 언약의 대표자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반드시 세상에 오셔서 그가 자기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시고 자기의 백성을 불러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의 의로움을 전가 받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 앞에 갈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의롭다고 인정받는 자가 없다.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를 고백하고 언약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구원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원의 배타적인 위치를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배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을 떠나서 죄인이 될 수 없듯이 예수를 떠나서 아무도 의인 될 수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으로 합한 자가 아니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 전가의 원리와 연합의 원리는 같다. 우리가 죄인이 아담과 언약의 관계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연합이란 개념은 언약의 개념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아담과 우리는 전가라는 원리로 묶여있다. 그의 죄가 우리에게 선포되고 그의 죄의 결과로 저주와 죽음으로 해산의 고통으로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이것이 연합이다. 같은 원리로 아담과 하나가 되었듯이 예수님과 언약적 관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 안에 머무는 것이다.

연합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가 이런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그가 부활할 때 부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붙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란 연합한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깨끗한 성품을 물려받는 것이다. 중생은 연합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화는 내가 그리스도안에 연합하고 있는 한 그의 성품을 전가 받았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성화되는 것이다.

지난주에 구원의 서정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야 가능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연합을 떠나서 구원의 어떤 경험도 없다. 구원이란 예수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한다. 존재론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것이다. 새 언약에 참여하고 새 언약의 모든 은사를 내가 모두 받는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새 언약의 백성이 되므로 구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이다. 다른 것에는 구원이 없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새 언약에 들어갈 때 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그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것은 내가 새 언약에 속하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내가 새 언약에 참여하는 복된 백성이 되었음을 내가 믿고 내 양심의 힘을 회복하고 신앙의 소망을 새롭게 하며 믿음이 강해지는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내가 새 언약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놀라운 감격스러운 자세로 참여해야 한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안에서 붙어 있어야 한다. 행11장 23절에서 주께 붙어있으라는 것은, 언약적 개념이다. 말하자면, 주님과 연합한 상태에 머물라는 것이다. 새 언약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끊임없이 구주를 믿는 믿음 가운데 머물라는 것이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믿음이란? 믿음은 정지가 아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본 받고, 붙잡고 그리스도의 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새롭게 하는 방법은? 우리의 구원을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그것의 의에 호소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의의 공로를 찬양하고 그럴 때 마다 우리 구원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의 소망을 얻을 때 구원 얻는다.
 
반면에 날마다 회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만 계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는 것은 내가 행한 착한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붙자는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나의 착한 행실로 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받는 것이다.
 
나의 구원을 결정짓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만을 굳게 붙잡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소망이다. 오직 예수 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오 바위시오 나의 도움이시다. 구원의 방편으로 언약의 전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전가의 원리는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를 믿음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신학을 할 때는 신학은 창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받아 하는 것이다. 무엇을 본받는가? 하면,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것을 본받아 하는 것이다. 이미 신학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신학을 우리가 본받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최초의 신학자이시다. 이미 있는 신학을 다시 우리가 본받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본받아 하는 것이다. 그런닌까 우리에게는 신학함에 있어서 창의성이 없는 것이다. 특히 구원론에 있어서 자기 상상의 세게에 빠지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학은 일정한 한계가 있고 정해진 룰(rule)이 있다.

칼빈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고 그리스도밖에 머물고 있는 한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가 없다.”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전가가 언약의 연합이라고 하는 개념을 구원의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다면,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로 묶여져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사역의 가치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들이 향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의 다양한 경험은 연합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연합으로부터 말미암고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연합으로 구원의 경험이 완성된다. 구원은 그래서 이 연합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비로소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연합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엡1장 4절 11절~12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갖고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 첫 번째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가능한 영원한 관점, 영원한 의미(1장 4절)가 드러난다. 세상에 창조가 있기 전부터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선택하셨다. 말하자면, 전가의 원리 언약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겠다고 하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있었다. 우리가 새 언약 안에서 들어가 있으므로 사영리에 말하는 영접할 때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발견되었는가 하면 우리는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안에 있었다.
 
그리스도안에 있었던 우리가 언약 안에서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그리스도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 안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지식가운데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양자의 영을 선물로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르고 부활의 소망이 가지고 영생을 꿈꾸고 바라본 자가 된 것은 역사 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했다. 어떻게 연합했는가? “우리를 예정하시고(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식)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생각 속에 우리가 처음 떠오를 때 그 때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지금도 그리스도안에 있고 영원까지 그리스도안에 있다.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인 우리가 육신이 쇠하면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흙 속에 굴복하는 존재가 절대 아니다. 우리는 영원 전에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부터 왔고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영광 가운데 있고 장차도 영광 가운데 있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족속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겁내지 맙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믿는 사람의 인생은 위대한 인생이다.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가는 그 사람 안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이 누구를 의지하고 있느냐에 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이 위대한 자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언약 가운데 하나 될 자로 생각되고 있었다. 한번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의식 속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연합하는 것이다. 요17장 2절에서“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영생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창세전에 그리스도에 붙은바 되었다.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 것이다.

두 번째 연합의 특징은 성육신적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특징이다. 우리가 연합하는 것은 머릿속에 관념으로만 연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 안에 인간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를 연합하게 하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셨다. 구원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왜 안되는가?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언약이라는 질서 때문이다.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구원할 수 없다. 아담이 사람으로서 언약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실 두 번째 아담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가 아담과는 달리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종이 되어서 그의 율법을 다 이루고 자기에 속한 모든 사람의 죄를 속하고 그래서 언약의 머리가 되셔야만 그에게 붙은 모든 자가 다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가 몸을 입고 오지 않고는 그가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아담이 없다. 그가 마지막 아담이다. 두 번째 아담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 언약의 대표자요 우리 언약의 머리요 우리 구원의 저자이다.

따라서 우리가 연합하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 머릿속에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위에 오셨다. 그리고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과 자기를 연합하게 하셨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그는 우리의 어려움을 체휼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 그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이 얼마나 그가 아파하는지 그가 아픔을 아신다. 우리가 좌절할 때 우리의 좌절이 그에게 어떤 행위를 갖는지 그가 아신다.
 
그렇게 육체로 오셨다.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 이루신다. 그가 친히 고난을 당하는 자로 오셨고 사람이 내려 갈 수 있는 최저의 자리까지 내려가시고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셔서 우리 아픔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누릴 영광도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우리와 철저히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셨다. 지금은 그가 높이 들려 올려져서 장차 우리와 함께 영광의 있을 일을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히2장 17절에서 “... 충성된 대 제사장이 되어서 그 백성의 죄를 구속.”그가 왜 사람이 되는 것이 마땅한가? 그가 하나님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해서 그가 대제사장 되어서 자기의 백성의 죄를 구속해야 하니까, 그 구속의 공로로 백성들의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철저히 그들과 같아져야만 된다. 그러나 그들과 살아왔던 삶과는 다르게 살아왔다. 그들에게 자기의 공로를 전가하기 위해서 그가 사람이 되심이 마땅하다.

세 번째 특성은 실존적인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은 천사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했을 때이다. 이 처녀가 얼마나 놀라웠을까 하는 것이다. 이 때,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 우리 인류는 절망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하늘과 세상과 모든 천사와 사람이 마리아의 입을 주목한 것이다. 마리아가 계집종의 뜻대로 되리이다 라고 하는 “예” 라고 순종했기 때문에 소망없는 인생이 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순종은 같은 것이다. 성육신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 하여튼 동정녀의 몸속에서 10개월간 아이가 자라고 그가 인간의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은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반드시 그가 우리들 가운데 사람이 되어 오셨어여만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속사역 일으키실 때 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예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남편 요셉도 예스, 제사장도 예수님 자신도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굴복하고 복종하셔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순종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속에..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을 반명제의 개념으로 본다.
 
반명제로 같이 못 구한다로 본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왜 사도바울이 인간의 행위 곧 순종을 믿음의 수단으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중에 행위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가르친다. 행위나 순종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종은 언약과는 관계 상관없이 자기의 순종과 행위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기의의 방편으로서의 순종은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명제(anti these)다.
 
그러나 믿고 난 다음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 믿음 안에 있는 믿음의 요구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순종하라 말하지 않아도 우리 믿음이 가르치는 요구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자가 순종하는 것은 믿음과 반 형제가 아니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성령 받음이 회개와 동일하고 믿음과 순종은 동일 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형제를 사랑한다 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미워하고 정죄하고 돕지 않은 것은 그것은 거짓이다 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절대로 아무런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오해이다.

네 번째로 실존론적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나타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관념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상이 있다.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의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그 연합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현상이 관념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상이 있다. 연합의 현상이 무엇인가? 성도의 삶이다. 곧 순종이다. 그런데 이 현상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느냐 여부를 살펴보는 방법 중의 하나는 점진적인 삶을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판단하는 하나의 현상적 기준이다.
 
 현상적으로 그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지를 판별해 보는 것 조차가 불경스럽다고 오해하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된다. 개혁주의가 한번이라도 이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그 사람 마음속에 믿음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믿음에 대하여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지를 보는 방법 중 하나는 점진적인 삶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알아보는 통상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한번도 이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참믿음이라면 그 삶의 징후가 있다.

고전 6장 9~20절에서 연합으로 말미암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사도 바울이 애정을 갖었던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았다. 비방하고 고소하고 이방인들의 더러운 죄악들이 교회 안에 가득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편지할 때 그들을 형제들 곧 성도라고 불렀다.
 
고전 6장 15절 말씀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 알지 못하느냐 ”지적한 것은 언약적 관계속에 있는 성도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다. 왜 몸을 강조하는가? 그들은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몸과 영혼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에 주신 바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은 그 영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의 한부분이다. 몸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나중에 부활할 때 이 몸의 부활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을 각가지 죄를 다 언급한다. 이 죄를 범해서는 안되는 신학적인 이유로 무엇을 제시하는가? 너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자 곧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본성을 우리가 물려받았고 우리의 고통과 아픔이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이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나의 생각과 나의 숨겨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다 전달되고 나의 아픔이 그에게 전달되듯이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의로움이 나에게 주어짐이 순환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죄를 짓는다면 너희 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말할 수 없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삶과 의식 속에서부터 밀접하게 이 현상이 반드시 나타난다. 이 현상은 믿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부터 우리의 의식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의 결과 이 현상이 없을 수가 없다. 반드시 나타난다.
 
기도할때 이렇게 기도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 아무개 집사님 오늘 여기 오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하게 하시고" 몸으로 안온 것은 결석이다. 몸과 마음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말하면 안된다. 목회 초년생들이 목회를 잘 못할 때 어떻게 잘 못하느냐면,.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십일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꼭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멋있는 말 같다. 하지만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십일조할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바쳐야 한다. 바칠 것이 없으면 주님의 교회에 몸을 바쳐야 한다. 리빙스톤도 헌금을 내는데 돈이 없다보니 헌금 주머니가 돌때 그 헌금 주머니를 밑에 깔고 앉았다. 그리하고는 드릴 헌금 없어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다고 그랬다.

여러분! 내 속에 있는 신앙의 소원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내 신앙의 소원이 없거나 신앙의 소원이 변질 된 것이다.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현명한 목회자는 교인들의 삶에 나타나는 현상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리고 그 현상을 통해서 잘못되어가고 있는 그들의 믿음을 지적할 줄 알아야 한다.
 
한가지 더 예를들면, 심방할 시에, 따라온 아이가 욕하는 것에 대하여 어린아이 이기 때문에 넓은 포용력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적절지 않다. 나쁜 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나쁜 것이라고 알려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나타난 현상은 때로는 우리의 본질에서부터 말하자면 내 믿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결과들은 언제나 거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들의 잘못을 질책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나쁜 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하게 된다면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다..이전 것은 지나가고... 말하자면 이전시대 예전시대에 속한 것은 이제는 지나가야 되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변화가 예전 것이 있던 자리를 채워야하는 것이다. 그 채우는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느냐는 것은. 이전 것에 속한 것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변화가 이전 것에 있었던 곳을 채워야 한다. 채우는 역사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믿어주지 않는다.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내 믿음은 나의 책임이므로 내가 믿어야 한다. 연합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가운데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다고 하여 인간은 수동적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은 내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런후에 내가 믿고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야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 인간의 소원 이 두 개는 같은 진리이다. 이것은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소원에서 성경에는 또 다른 진리가 있다. 똑같은 진리인데,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심속에 있는 자가 구원받는 자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또 한편으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냐 하면,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무리이다. 만약 이 두가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그 때부터 개혁주의 원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이 개혁주의 표지이다. 이 사람이 개혁주의 신앙원리안에 있느냐 없느냐를 알아볼 때, 이 두가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느냐 아니냐로 알수 있다.
 
신학자들은 그렇게 판별한다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평등하게 놓고 그것을 합리적인 원리 안에서 하나로 통일하려고 하면 그것은 알미니안적 펠라기우스로 떨어져버린다. 아니면 추상적 구원을 가르치거나 극단적 칼빈주의로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소원은 같은 진리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구원받기 원하는 자가 구원받는 것이다.

성경에 자세히 살펴보자.“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이 작정하였으니 작정된 자는 다 믿을찌어다. 이렇게 안하고 그냥 회개하라고 말한다. 하나님 작정을 말하지 않고 인간편에서의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자가 구원받는 그것이나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작정하신 자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동일한 진리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믿는 자가 언약에 들어간다. 다시말하지만, 그래서 믿음은 나의 책임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대신 믿어주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의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도 내 책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스스로 내 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안에는 언제나 순종이 요구된다.

고전 1장 30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에 머물러야 되는 쌍방간적인 책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시고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안에 있으므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우리가 나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왔고 아버지께서 예수그리스도께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들을 위해서 의와 거룩함이 되시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고 성경에 보면 우리 역시 아버지께로 예정 받아 이 땅에 올 때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요구하셨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하셨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미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를 위한 의와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또한 예수 안에 있으라고 하는 그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땅에 온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가 아버지께로 부터 받은 그 뜻을 다 이룰 때 연합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냥 되는게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 이 땅에 왔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고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뜻을 다 이룰때 연합은 완전해 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날마다 너희 구원을 힘써 이루라는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실 때 힘써 그리스도안에 머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만을 강조하지 않으시고 역시 우리도 어버지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뜻을 동시에 둘 다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뜻을 다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안에 머물라고 하신 뜻을 다 이루어야 한다. 유혹받지 말고 죄 가운데 들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붙어 있어야 한다. 깨끗하고 정결과 선한 양심으로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실 때 그리스도안에 힘써 머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고전 1장 30절) 이러한 연합은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유효한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

<4강 마무리 기도>

할렐루야! 거룩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놀라우신 이름을 찬송 또 찬송합니다. 우리 구원의 반석이 되고 언약의 대표자가 되셔서 우리와 그리스도를 언제나 연합하게 하시고 구원의 참여하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주님 힘써 그리스도안에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사오니 마음으로 믿어 믿음으로 의로움에 이르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여 정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하나님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 이 공부에 참석하는 모든 종들에게 이 지식이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물지 않게 하시고 내 삶을 바꾸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되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애 전 과정이 그리스도와 연합 가운데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1편 1~4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괴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성령의 사역은 핵심은 방금 읽었던 시편 1편과 같이 믿는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 성령의 사역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에 한마디로 하면 믿는 자들로 하여금 시편1편에 나오는 나무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그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 성령 사역의 가장 중심된 초점이다.
 
그 시편 1편에 나오는 나무가 복된 이유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기 때문에 복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된 자의 삶의 특징이다. 그런 행위가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복된 사람이므로 어떻게 보면 그러한 열매가 있는 것이고 그 나무가 진정으로 복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나무의 존재적인 특성에 있는 것이다. 그 나무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그래서 가뭄중에도 그 나무는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푸르다 하지 않느냐?

결국 구원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그리스도안에서 연합하는 것에 구원의 완성이 있다. 구원의 시작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가운데 있다. 따라서 성령께서 구원사역을 성취한다고 할 때 그 성령이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결국에는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사역의 촛점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를 구속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중생이 일어난다. 중생은 그리스도와 연합과 함께 동시에 일어난다. 중생은 사실 그리스도와 연합의 결과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같이 죽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부활 하실때 우리도 함께 살아나기 때문에 중생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신자의 생활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느냐에 성령의 모든 관심이 모아져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어떻게 이루느냐에 성령의 특징적인 활동이 나타난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속 머물게 하실 때 언제나 윤리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육체의 원리에 따라 살지 않도록 죄성을 벗도록 한다. 죄에서 이기도록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그 속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죄와의 끊임없는 투쟁에 평생에 헌신하게 한다. 우리를 죄에서 이기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이 그 사역의 목적이 결국 그리스도의 연합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미리 결론적으로 다시 이야기하면 그것은 죄와의 투쟁에 전 인생을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와 투쟁없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때때로는 죄의 복종으로 굴복하여 살기도 한다. 죄에 굴복하는 신자들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 할찌라도 때로는 그 연합을 위태롭게 할 수가 있고 혹은 연합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평강과 위로와 자유함을 맛보지 못하는 신자로 살아갈수 있다.
 
다시 강조하면, 죄에 불복하고 사는 것은 비록 본질적(존재론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고 할찌라도 때로는 그 연합을 위태롭게 할 수가 있고, 혹은 그 연합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평강과 위로와 자유함을 맛보지 못하는 신자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실 때 반드시 기억할 것은 성령이 우리들속에 윤리적 개선과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사역하신다.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에는 언제나 죄와의 투쟁이 일어난다. 연합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주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로서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좀더 지속적이고 온전하게 유지하느냐 것에 하는것에 신앙생활의 관심이 모아져 있다. 최근 한 반세기 정도 50년정도 한국에서 성령론에 대한 논의의 흐름이 인격적인 사역에 모아져 있지 않고, 어디에 모아져 있느냐하면, 기능적 사역! 주로 은사중심의 논의에 성령사역의 중요한 논점이 치우쳐 졌다고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의 핵심은 인격적인 사역이다. 이런 면에서 지금까지 반세기 정도 한국교회에서는 성령론의 흐름이 인격적 사역에 모아져 있지 않고 기능적 사역, 즉 은사적 중심의 논의에 치우쳐 졌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의 핵심은 인격적인 사역이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죄의 원리를 벗어나게 하고 육체의 원리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그 죄의 유혹에서 이겨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계속해서 머물게 하느냐 하는 것에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일평생 신앙인들로서는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게 하는 것에 모든 신앙적 노력의 관심이 거기에 다 모아져 있어야 한다.

고전 12장 13절에서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다 한 영으로 세례를 받았느니라 한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한몸은 나와 다른 성도들이 이루는 연합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전반적 문맥을 볼때, 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는데 그 한 몸을 이루게 하는 일에 역할을 하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을 받았다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신비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없다면. 새 생명의 진보도 없고 그것에 전달과 그것에 완성도 없다.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베드로가 말하는 것을 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을 받으리라 는 베드로의 설교가 있다.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빨리 생각하면, 성령을 받아야만 은사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야 능력을 받는다고, 기능적으로 생각한다.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한 말은 다른 말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곧 구원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구원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연합케 하는 사역을 감당하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이끌어 가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자가 성령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과 신학적으로 동의어다. 성령을 받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소원으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작정하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주시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가 성령의 수요이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성령을 받아야 구원에 이른다,

요15장 5절을 보시면, “나는 포도나무요...”예수님께서 연합의 중요성을 명백하게 암시한다. 너희가 내안에 있고 너희가 내안에 있지 않으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아무것도”란 구원이나 혹은 구원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적어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르는 삶을 즉 말하자면, 구원의 기쁨과 구원의 희락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사실 구원론에 가장 중요한 초점은 어떻게 그리스도와 성공적으로 지속적으로 효과적으로 연합하느냐에 있다. 사실 목회적인 관심사는 성도(교인)들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게 하는냐에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목회자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목회자는 성령을 돕는 어시스트(assist paster)이다. 성령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구원의 원리이다. 따라서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을 계속해서 유지할 것인가?를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청교도 신학은 건전한 신학이라 할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계속해서 유지할 것인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면에서 청교도 신학은 굉장히 건전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청교도 신학자들은 그들이 사역하는 목회지나 사역지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교인들에게 촉구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죄의 문제가 그리스도와 연합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가장 강렬하게 추구했던 것을 나의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가장 미워했던 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으로 내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것으로 나의 기쁨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관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형이상학적 관념에 머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실천적 명령을 담고 있다. 실천적인 명령은 무엇인가? 실천적인 명령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 실천적인 능력이 무엇이냐면, 서신서나 공관복음서에 보면 실천적 명령이 나온다. 그 실천적 명령에 궁극적인 목적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군자로 윤리적 완성을 이룬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바른 삶을 가르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윤리적으로 바른 삶을 추구하고 죄의 원리에서부터 벗어나서 죄를 끊임없이 이기려고 노력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내 자신이 스스로 윤리적 완성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면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윤리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 더 큰 목적이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윤리적 개선 혹은 도덕적인 개선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상태에 나아가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윤리학과 기독교적 윤리관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윤리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윤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개선을 통하여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것에 목적을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윤리 개선 혹은 도덕적인 개선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나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것을 추구하면서 죄의 원리에서 벗어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도 죄를 극복할 수 없다. 윤리적인 개선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하는 그 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성공적인 유효하고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추구하면서 죄의 원리에서 육체의 원리에서 벗어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어느 누구도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말하자면 죄의 속성과 사도바울이 말한 육체의 원리는 바로 이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육체의 원리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본질은 하나님의 거룩하게 한 씨로 새롭게 된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새롭게 되었지만 그러나 죄의 원리가 우리의 육체에 자리잡고 있다. 어디에 남아있느냐 하면 우리의 육체속에 계속 남아 있다. 우리 육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이미 죄가 우리 몸에 학습이 된 것이다. 때로는 이것이 우리 속에 감추어진 새로운 삶의 원리를 정복시킬 만큼 강력하게 역사하는 때가 있다.
 
그렇게 되는 경우에는 대부분, 계속해서 죄를 이기기를 노력하지 않고 그것을 방치하는 경우에는 죄가 결연한 의지로 우리로 하여금 그 죄의 원리에 굴복되도록 만들어 간다. 그러면, 그러한 죄의 원리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소멸시키는데 까지 나가지는 않는다고 할찌라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모든 유익을 박탈하는 지경까지 나가서, 나중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간다. 정녕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원리를 반복적으로 이기도록 우리를 이끌어 간다. 성경에 보면 영으로서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라고 말한다.
 
성령의 능력으로서 말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시간부터 우리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육체의 원리, 즉 죄의 원리와 싸움이 시작된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죄와 싸우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죄의 노예로 살아갈 뿐이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후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와 싸워 가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간다.

갈 2장 20절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이 갖는 실천적인 명령을 요약하면?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지, 그리스도의 선하심, 그리스도의 죄와의 투쟁이 그것이 내 삶의 패턴이 되는 것이다. 빌1장 21절에서보면, “내가 있어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그리스도와 연합에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와 너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연합한 상태에 머물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뒷받침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스도의 연합을 강조하게 되는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즉 구원에 관해서 개혁주의에서는 우리의 모든 노력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개혁주의에서는 구원에 관해서 절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면 할 수록 우리의 모든 노력이 결국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향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순종이 순종 자체에 계획적인 목적에 있어서 순종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종 자체에 어떤 특별한 우리를 더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순종이 그리스도인을 개선시키는 그리스도인을 변화한 상태로 이끄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때만 가능한 것이고 의미가 있다. 우리의 순종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더 나은 자체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 순종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 나은 상태로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때에만 이 순종이 의미가 있다.

이 사실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나의 복음"에서 강조하는 바, 유대인 특별히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율법주의와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차이이다.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율법주의의 핵심이 무엇이냐하면 율법의 선한 행동이 갖고 있는 내적인 가치에 대한 믿음이다. 선한 행동 순종이 우리들로 하여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특별한 효과가 있게 한다고 믿는 오해한 것이다.
 
말씀에 따라사는 윤리적인 행위가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사람에 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율법이 가지고 있는 선한 행동(순종)이 우리들로 더 나은 생활을 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하고 있는“나의 복음”의 핵심에는 우리의 순종에는 그러한 가치가 없고 오직 은혜로운 컨디션 즉 은혜의 결과로 나와지는 조건적 일 뿐인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이다. 이것은 단순히 은혜로운 컨디션일 뿐이다. 은혜로운 컨디션이다. 이것 자체는 이 순종한다고 해서 이 순종이 우리로 하여금구원에 이르게 할 만한 아무런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나 의미가 없다!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컨디션을 허락해주신 것이다. 이 컨디션만 지키면, 그리스도와 연합케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자, 우리의 의(義) 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순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우리의 의로서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하나의 컨디션일 뿐이다. 그래서 이 순종은 은혜로운 컨디션이다. 왜 은혜로운 컨디션이냐 하면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의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없다. 가치가 없지만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조건으로 내 걸고 거기에 따르는 자가 의에 이르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로운 조건(condition)이다.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 하셨다.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따먹지 않으면 영생에 이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안먹고가 한 인간으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할 만큼 중요한 의미나 가치나 영적인 원리를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다. 선악과는 하나의 영생을 주기 위한 컨디션일 뿐이다. 어떤 컨디션이냐? 은혜로운 컨디션이다.
 
창세기의 컨디션은 많지도 않다. 단 하나, 무엇이냐하면 동산 안의 나무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 그 나무 열매 하나만 먹지 말라. 그것만 잘 지키면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 은혜로운 조건, 딱 하나만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 자체는 아무런 사람의 영생을 혹은 사람을 심판을 결정할 만한 그 자체에 내재한 가치나 영적 원리는 없다. 그러나 은혜로운 조건인 컨디션이다.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누누히 강조하는 조건이다. 이것은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 그것을 지키면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는 은혜로운 컨디션이다. 은혜로운 컨디션 하나만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행위 순종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다. 행위는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하지를 못하는 의미 없는 것이다. 여러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계속해서 강조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있잖아요? 순종, 믿음의 행위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무슨 조건이냐?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는 조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기 위한 조건. 그 자체로는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효과가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옛날 사막에 성자와 같이 일평생 금식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모든 악으로부터 떨어질려고 노력했던 그 모든 노력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단 일보도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본성적으로 어떤 것이 있느냐면 한 일주간 금식하고 내려올 때에는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지요. 금식하고 내려올때 보면 곰탕집에 사람들이 깍두기하고 먹고 있잖아요. 속된 것들..
 
자기는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내려와서 더 신령한 것처럼 느낌에 빠지는 것이다. 성경 몇번이나 읽었어! 성경 횟수로 사람을 제압하는 것이다. 여러분! 사람이 성경을 백번 읽어도 하나님 앞에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아무런 질적 효과가 없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일평생 내가 장로로 집사로 헌신하였는가? 그것 자체는 하나님 앞에 나를 인정받게 하는 아무런 유익도 없다. 그것 자체는 단지 그것을 우리들에게 상줄만한 근거로 받아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것이 의미가 있는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강조하건데 하나님 은혜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히스기야가 곧 죽으리라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벽을 향하여 금식하며 울며 기도하기를 내가 주의 법도를 지켰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앞에 인정받을 만한 객관적인 자격 요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금식하며 울면서 기도할때.. "내가 주의 법도를 지켰다" 는 그 법도를 지키고 일평생 선한 일을 한 것이 하나님 앞에 더 인정받을 만한 객관적인 자격요건이 되느냐면 그렇지 않다. 히스기야를 더 살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잖아요. 한 세리가 성전에 나와서 기도할 때, 나는 죄인입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로 기도하죠? 한 바리새인은 내가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자신의 선행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바리새인을 더 정죄하시고 멀리했다는 말씀을 하신다. 바리새인이 거짓말 했습니까? 아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 갖고 있던 도덕적 관념이 뭐냐하면 도덕적인 삶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인정 받을 만한 자격을 구성한다고 믿었고 더 나은 사람 만든다는 믿었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는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의 구원으로서 그리스도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점점 우리의 순종으로 자기의 의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의를 세우는 것, 그런데 이 자기의 의를 세우는 이것은 정말 영적으로 탈선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그런 것들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느 때에 의미가 있느냐.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그 다음 우리의 순종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든 순종이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한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컨디션이다. 이 조건...은혜로운 조건.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 간절히 사모하고 노력할 때, 잊지 말것은 우리의 이러한 죄와의 투쟁 죄를 벗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결국에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안에 들어가는 노력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노력. 그런데 곧 뭐냐하면 성령이 우리를 향한 뜻이이다. 바울이 항상보면 자신이 목회했던 교회를 위해 기도할때 언제나 간절히 구했던 것이 무었이냐면,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지식으로 우리가 가득채워지길 원한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의지의 지식으로 우리가 가득 채워지길" 이 말은 성령이 우리를 향해 갖고 있는 영원한 변찮은 의지가 무엇이냐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의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이고, 머문다는 것은 죄와 끊임없이 투쟁하고 죄와 이기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후서에 자꾸 나오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참된 성경적 순종을 자기 의를 이루는 바탕이 되지 않고, 교만의 재료가 되지 않고, 자기 구원의 확신을 주지 않는다. 이 참된 성경적 순종은 그와 같은 세가지 잘못된 탈선을 방지한다. 그런데 성경적 순종의 가장 중심된 원리가 뭐냐?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오늘 이 시간부터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 사모하길 바란다. 길을 걸어 갈 때에도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머물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성령의 은혜 안에 충만한 기쁨을 유지할 수 있다. 

 

8. 초청과 부르심

“복음의 초청” 이란 “부르심”과는 다르다. 복음의 초청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선포(설교, 성경의) 전도할 때 예수님 믿으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복음의 초청은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것에는 문제가 있다. 사영리를 펴놓고 복음을 전하는데 그러한 제안이 복음의 초청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의 초청이 아무런 구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전도할 때 이 사람이 하나님께 작정을 받았냐, 받지 않았느냐를 물어보지 않고 무작위로 하지 않습니까? 만만해 보이는데로...그냥...이렇게 복음의 초청을 할때, 그 복음의 초청에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만약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영원전에 참되다 하면 작정하심이 신학적으로 사실이라고 하면 어차피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이다.
 
아무리 전해본들 작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궁극적으로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아니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정이 있고, 유기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작정의 문제와 복음의 초청, 복음의 선포 사이의 신학적인 갈등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작정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지면 복음의 초청이 사실은 이것이 위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구원받지도 못할 사람에게 공연히 변죽만 우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에 믿지도 못할텐데...그래서 만약에 작정을 심각하게 신학적으로 다루게 되면 복음의 초청의 문제가 신학적으로 위태로워 진다.
 
"진지하게" 정말로 구원받을 사람, 구원받지 않을 사람을 가리지 않고 진지하게 누구에게나 주어진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말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작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유주의자처럼 구원의 계획을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부정되어 버렸으니 구원의 초청은 누구에게나 진지하게 되죠? 왜냐하면 거기에는 작정과 유기의 구분을 두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복음의 초청이 진지한 것으로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천 개가 있다 했을 때 어차피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다. 궁극적으로 그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정이 있고 유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정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복음의 초청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구원의 계획(작정)을 부정한다면 복음의 초청은 누구나 차별없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A라는 사람은 작정을 심각하게 받고,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보면, 겔 18장 23절을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33장11절 “나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작정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이것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복음의 초청을 누구에게나 다 주어진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복음이 진지하게 주어지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복음의 초청은 단지 진지함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복음의 초청은 작정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에스겔서 해석할 때에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래서 이 해석은 이 악인은 선택되고 작정된 악인 이렇게 해석된다. 이해되죠? 이것은 작정받은 악인으로 이해하는 것이지, 작정 밖의 보편적인 악인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작정의 교리와 복음의 초청사이에 아무런 대립이 없도록 무난히 흘러가도록 만드는데 어디를 깍아내리느냐면, 이 복음의 초청의 가르침을 해석하는데 악인은 작정된 악인이고 구원받기로 예정된 악인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A사람의 주장이다.

또 다른 해석의 선택은 성경에서 구원의 계획에 대한 가르침은 무엇이라고 보느냐면, 송영인 구원의 길을 찬송하리로다 우리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그것은 마치 기도할때 하나님을 높여 부르는 송영의 한 부분이지 사실에 대한, 이 구원의 계획이 사실에 대한 진술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것이다.
 
화원에 가면 꽃이 아름답잖아요. 그 화원의 꽃에 대한 시를 지을 때 "꽃들이 아름답게 춤춘다"라고 하는데 실제 꽃이 춤을 춥니까? 실제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 구원의 계획을 말할 때 성경에서 창세전에 우리를 작정하사 예정하사 라는 이 구절은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 영화로우심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높이고 찬송하기 위한 시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적 진술은 아니다 이 말이다.
 
여기에 관한 것들을 이 A의 복음의 초청을 나름대로 해석한다. 한 그룹은 작정에 복음의 초청을 맞추고, 하나의 그룹은 복음의 초청에 작정을 맞춘다. 만약에 복음의 초청에 맞추지 않는다하면 이 둘다 동시에 다 맞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두 그룹이 모두, 구원의 계획도 사실이고, 복음의 초청도 진지하게 할 수 없다는 이것니다. 둘다 사실로 확보하게 붙잡는다면 둘 다 내 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시적인 표현이다. 라고 해석하고 여기에(복음의 초청)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초청에 대한 관점에서 보고 구원의 계획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정이라는 영원한 관점에서 보고 복음의 초청을 요기에 맞도록 요것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두 가지 입장에 있어서 초 칼빈주의, 하이퍼, 그리고 이것은 알미니안 이러한 입장을 다시 초 칼빈주의로 가지 않고 알미니안으로 가지 않고 이것을 합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누구냐하면 알미노주의 우리나라 말로 이걸 아미노라는 사람의 이름이다.
 
이 사람은 이것을 주장하다 이단으로 몰려 죽는다. 아미노가 옳다고 지지하고 나선 사람이 누구냐 하면 독일의 몰트만이다. 제일 첫번째 참고 도서 목록이 몰트만의 박사학위 논문이 아주 수작이다. 이 논문의 절반은 라틴어로 절반은 독일어로 작성되었다. 이 원서를 구하기 힘들 것이다. 아주 잘 썼다. 이 말은 제가 여기에 동의한다는 말은 아니다. 학문적으로 잘 썼다는 소리이다.

어찌하든 신학적으로 지금 파가 나눠지잖아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이 복음의 초청을 안토니 후크마도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실제적으로 복음의 초청을 할 때 어떤 자세로 제가 침례신학교 강의를 하는데, 저와 신학이 다르잖아요. 대개가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오해가 무엇이냐 하면, 칼빈주의자들은 복음 전도할때 진심으로 사람 사랑하는 마음으로 꼭 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음전도를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오해이다. 교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전도하십니까? 라고 묻는다. 나는 지금까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전도했어~라고 말한다. 작정 안 받았거든 믿지마라 라는 마음으로 전도하면 내가 설교할 때 말이지, 우리 교회에 믿기로 작정하지 않고 출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 듣고 작정했으면 믿고, 작정 못 받았으면 영벌로 가거라 하는 마음을 한번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칼빈주의는 그렇지 못한 것인 양, 그 이유는 그들이 구원의 계획을 엄격하게 믿고 따르거든, 그러면 어찌되느냐 작정한 사람, 유기한 사람 이렇게 두 구별이 있는 것이다. 구원에 이를자, 영벌에 이를자 이렇게 두 레벨을 이마에 딱 붙여놓고 구분을 하면서 언제나 대한다고 혹은 신학이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같이 자유롭게 대할 수 없고 또 모든 사람이 다 믿도록 열렬하게 기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이나 회의는 칼빈주의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어찌하든 외적인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희생하든지, 이것을 희생하든지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가르치면 학생들이 권면한다. 몰랐던 문제를 깨닫는 것이다..작정을 믿으면 복음의 초청이 안되고, 복음의 초청을 믿으면 작정이 안되고...

이것을 예를 들어보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올라간다. 이삭은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안다. 양이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칼하고 불하고 나무는 준비했는데 잡을 양이 없는 것이다. 이삭이 당장 묻는다.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있고 칼도 있는데 잡을 양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을 때 아버지 대답이 "바로 너야!" 이렇게 안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준비하시리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너야!" 하면 도망갈까봐. 거짓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아들 앞에 거짓말 하는 겁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라고 진짜로 믿었다면 말이지, 페인팅 모순이다. 결국 자기 아들 죽지 않을 것 알면서 끝까지 나가보는 것이다. 하나님께 위선이다. 결국 하나님께 위선하든지, 아들에게 위선하든지 둘 중 하나다 이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아들이 죽을 지라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여러분! 이것은 예언이다. 진짜로 아브라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어떻게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다시 살리실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언이다.
 
당시 아브라함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위선한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거짓말 한 것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답은 살려주시리라는 대한 "믿음" 이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죽일려고 마음 먹었으니까. 죽일 마음도 없이 그말을 하였다면, 하나님 앞에 거짓말 한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죽어도 살려 주실것이라 믿었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둘 다 성령의 진리로 보전하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칼빈주의는요 이것도 희생시키지 않고, 저것도 희생시키지 않는 성경의 진리를 알고 있다. 믿음으로 이 둘 다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간단하다. 둘다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뻔뻔한 것이다. 나는 뻔뻔해 하면서, 이게 둘 다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내적인 갈등을 깨끗이 포기해야 한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브라함도 자기 아들을 죽이는 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 이 둘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했냐하면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 까지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느 한편으로도 똑같은 것이다. 여러분 성경의 참된 신앙은 성경이 단순히 말할 때 단순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권면하지 않는 것은 우리도 권면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진지하게 다루는 것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사실 신학적으로 이 둘을 말이다. 어쨋든 모순적이지 않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처음에 의도했던 합리적인 설명에 도달하지 못하고 반드시 복음의 초청에 성사시키든지 작정에 성사시키든지 둘 중 하나로 가게 된다. 무슨말인가 하면, 알미노도 이 두가지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완전하고 확고한 해결책은 없었다. 가장 성경적인 대답은 무엇이냐. 이 둘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된 신학은 성경이 진지하게 말할 때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자기의 사람들을 작정하셨다. 작정도 있고 유기도 있다는 칼빈의 이중 예정교리인 끔직한 교리가 있다. 그러한 작정과 유기를 비밀스러운 경륜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주실 때 진심으로 누구든지 악인이 그 죄 가운데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위선이 아니냐?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작정이든 유기든 이것을 떠나서 죄 가운데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 있는 것처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하는 이 말씀을 멸망하는 멸망받을 악인이 아니라 구원받을 악인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죄악가운데서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유기든 작정이든 작정이든 유기든 이것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죄인이 죄 가운데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둘 가운데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된 비정의 운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생이 아니신고로 그의 비밀스러운 경륜가운데서 사람을 그의 기뻐하는 자를 작정하시고 유기하시고 하지만 동시에 그는 동시에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이것을 성경의 역설이라고 한다. 구원받는 신앙의 역설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신앙의 역설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역설은 성경에서 야고보에서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성령이 연합하시기 때문에 합리적인 설명을 택하든지 성령의 말씀을 받아들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이 복음의 초청을 신학의 역설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 복음의 초청을 사람들이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왜 생기는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있고 부르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초청 자체가 아무런 효력이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지요? 아까 똑같은 것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할 때 연합시키는자가 누구입니까? 성령이잖아요. 우리는 그냥 가만 있으면 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치지 아니하고 성령에 따라 순종하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두가지 일 밖에 없는 것이다. 합리주의적인 설명을 채택하든지,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든지, 언제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복음의 초청의 문제를 신앙의 역설을 통해서 해석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리고 이 복음의 초청을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복음의 초청이 진지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누구에게나 모두 복음의 초청이 다 주어진다. 그런데 이 복음의 초청을 사람들이 다 받아들이느냐? 하면, 그렇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그 복음의 초청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이런 차이가 왜 생기느냐? 그 이유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이 있고, 부르시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초청이 주어졌을때, 그 복음의 초청 가운데서 하나님이 부름의 초청을 주는 자가 있고 부르심의 초청을 주지 않는 자도 있다. 부름의 초청 자체가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하거나 말씀을 전할 때, 그 사역 자체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거나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끌어 들이거나 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한참 목회하다가 좌절감 속에서 배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 설교자의 설교가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못한다. 설교는, 사람의 언어에 불과합니다. 그 설교의 언어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힘이 없다. 설교를 한 두번 해선 잘 모른다. 설교를 업으로 삼고 일주일에 5번씩 한 10년만 해보라.
 
얼마나 설교를 많이 하나? 그렇게 가르쳐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안 변한다. 그렇게 많이 가르치면 좀 변하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안변한다. 때로는 설교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상담학이 사람고치는 줄 알죠? 가서 몇마디만 하면 문제를 다 고치는 무슨 상담에 파워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상담해보세요. 언제나 상담을 하면 상담자보다 피상담자가 더 강하다. 피상담자가 언제나 더 강한 것이다.
 
전도를 잘하는 사람이.. 그런 소리 많이 듣잖아요. 400명 500명 전도했다는 분이 이런 분이 전도 나갈때 의기 양양하고 그러면서 나갈 것 같죠? 안그렇다. 그분도 역시 벨 누르고 숨을 쉰다. 사람이 나올까봐. 단체로 전도 나가면 그러잖아요. 벨 누르면 속으로 빈집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다. 벨 누르고 인기척이 나면, 벨 누른 사람이 놀란다. 설교 20년 하면 청산유수처럼 설교가 자연스럽게 강당 올라가면 설교가 잘 나올 것 같죠? 안그렇다. 설교가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를 아무리 많이 해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인이 출생할 때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초청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누군가를 불러주신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르심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다. 내가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는 것이고 나는 성령의 어시스트이다.
여러분 복음의 초청을 진지하게 하죠. 믿으라. 하지만은 여러분 그 초청이 그 자체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전도하고 열매 없을 때, 자신을 지나치게 자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부르심을 주시느냐 주시지 안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극도의 놀라운 경험을 한다. 이렇게 집회를 가잖아요. 가면, 정말로 사람이 믿고 거듭나는 일이 있다. 나도 놀랜다.
 
내가 생각할 때에는 거듭날 것 같지 않았는데,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폐부를 찌르는 성령의 부르심을 듣고 거듭남을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쩔 때는 힘껏 하잖아요? 결과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초청에 부어지는 인간의 노력과 그 초청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다. 복음의 초청이 그 자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자연인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아담의 부패한 본성과 하나님의 심판을 가지고 받고 태어난다. 그래서 출생할 때는 영적으로 사망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복음의 초청이 그 전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특별히 엡2장1절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말씀하고 있다.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효과적으로 불러주시는 것이다. 효과적으로 누군가를 불러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무엇이라 하느냐?

이것이 부르심! 이라는 단어로..부르심을 주시는 것이다. “고전 1장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장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장24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무슨 말인고 하면, 부르심을 입은 자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가운데 듣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그래서 신학자들이 효과적인 부르심이라 한다. 효과적으로 불러주심 이렇게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자들은 유대인들은 그것을 꺼리있는 것이고 이방인들은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줄 알고 깨닫고 .. 바라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주신 자들에게는 복음의 진상이 빨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불러주시지 않는 자들은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고 듣고 고침을 받고 하나님과의 교제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불러주시는 자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부르심을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특별히 눅 14장24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청하다는 말은 복음의 초청이다. 이 말은 부른다, 부르심을 주신다. 할때 클레신(CLAO) 클레오라는뜻이 아니라고. 청하였다는 말은 잔치에 참여하고 말하자면 초청을 했는데, 그 초청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 잔치의 맛을 못보는 것이다. 왜 못보냐 불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롬 8장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니까 부르실때 그 부르심이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서부터 온다. 따라서 이 부르심은 성령이 자의로 순간 순간에 이사람 저사람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효과적인 부르심을 줄 사람은 이미 어디에서 결정했느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 뜻대로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작정하신 그 경륜에 따라서 불러주셨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부르심과 택함심을 하나의 정관사로 묶어놓고 다루는 구절이 있다. 이 택하심....

택자.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 원문에 보면택하심과 부르심을 각각의 서로 다른 정관사로 묶지 않고 하나의 정관사로 이 두가지를 딱 묶었다. 택하심과 부르심의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토록 정교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성령이 부르시는 그 순간에 효과적인 부르심 사람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불러주실 자를 부르시는 것이다. 구원받아야 될 자를 구원하게 하시고 들어야 할자를 듣게 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성령이 이렇게 역사하신다.

여러분! 아무때나 성령 받으라고 외치면 안된다. 부흥회때 아무 때나 성령 받으라고 외치면 안된다.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성령받으라고 이야기 하는 부흥사가 잘못된 것이다. 부르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으면요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되고, 십자가가 자기를 구원하는 능력임을 깨닫게 된다. 부르신 자가 누구냐? 성령이고 성령은 자기 뜻대로 부르는게 아니라 영원하신 아버지의 경륜에 따라 불러주시는데 따라서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요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받은 것이다.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성령을 또 받아!? 깎은 머리 또 깎으면 피난다.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한다면 섣불리 손들지 마세요. 누가 영적인 사람이예요? 내가 영적인 사람이다. 영적인 할때에 누가 영적인 사람인까? 환상보고, 꿈꾸고 예언하고 방언하는 사람이 영적인가? 영적인 사람이란 바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자들이다 성령받은 사람이 다 영적이다. 한국에서는 영적인 말이 대단히 왜곡되어 있다. 찬송가도 말이지 잘 부르면 영적이다. 영적인 찬송 따로 있고, 영적인 않은 찬송 따로 있냐? 그 목사님 참 영적이면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은 안 신령하나?
 
도대체 영적인 기준이 뭐야? 자기 마음을 터치하면 영적이야? 터치 못하면 사도바울처럼 가르쳐도 영적이지 못해.. 어쨋든 사이비라도 자기 마음을 터치하면 그 사람이 영적이야. 돈 바치고 시간바치고 나중에는 몸까지 바치고...생략...신령한 사람이 될려면 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이상한 소리 내야 되야 하는가? 절대 아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신령한 사람이 될려면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엽합된 사랍이다. 그러니까? 성령받고 싶은 사람 손을 들라고 했을 때에는 절대 손들면 안된다. 원래 찬송가는 영적이라 이러지 말고 오늘 찬송 참 잘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오늘 찬송이 영적이다. 라고 하지 마라. 이런 일탈된 신자들은 자기 신학이 자기의 신앙이 얼마나 자의적인가를 드러내는 말이다.

행 16장14절에서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마음을 연다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효력있게 불러들이신다는 말이다. (에피카스텔 복카레) 효과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불러들이는 것이다. 효과적이란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에게 역사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성령께서 듣는 그 사람에게 역사 하신다. 여러분! 정말로 복 받은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그 목회자와 함께 하셔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마다 그 자리에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시는 자가 그 사람의 능력있는 일꾼이다. 다른 어떤 누구도 아니다. 무디가 무슨 학위가 좋아서 복음 전하나? 절대아니예요. 빌리 선데이는 설교할때 아주 대단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설교할떄 목사님이 점잖케 하는 것이 아니고 거의 광란이다.
 
몸을 얼마나 흔들어 대는지, 빌리 선데이 이름 자체는 거룩한데, 근데 필름을 보면 완전 딴판이다. 설교할 때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엎드렸다가 윗몸 굽히기 이것도 하고, 뛰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빌리선데이가 설교할때 문장이 제대로 되는 문장이 없다. 앞뒤 맞춤법 틀리고 그런데 그 앞에 앉은 회중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온다. 그래서 신문기자가 빌리 선데이 집회 갔다가 그는 목사 자격이 없다. 라고 기사를 썼다. 왜냐하면 말도 안맞고 논리도 없고, 소리나 꽥꽥 지르고 그런데 그 신문기자에 대해서 반박했냐? 그 사람이 .. "그래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능력자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할것인가? 앞으로 사역하면서 이거 잊지 마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그 사람의 사역이 열매를 맺는 것이다. 사람이 노력하고 준비해야지 지식도 갖추어야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기도 또한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컨디션이다. 조건일 뿐이다. 자율적으로 요구되는 순종인 것이다. 진짜로 그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은혜롭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함께하심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신학적으로는 일반적인 부르심, 즉 “Genaral Call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외부적인 부르심’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부르심의 성경적인 근거는 렘7장13절, 사65장12절, 마22장14절, 특히 렘7장13절을 보면, 부르시고 그들을 모으시지만 그들은 응답하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실효적인 부르심인데, 언약적 관계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들어가는 열매를 맺는 것은 효과적인 부르심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부르심은 일반적인 부르심이라 한다. 이것을 기독교강요 24장 8절 “제너럴 콜링”화란의 조직신학자 바빙크가 일반적인 계시를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이해하였다. 일반계시는 일반적으로 자연 만물속에 심어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연 만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중에 탁월한 우리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우리의 영혼과 양심에 심어있는 일반적인 지식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시고 구원으로 돌아오기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을 일반적 부르심 이라고 바빙크는 이해한다. 그러나, 전도 행위 복음의 초청도 일반적 부르심이라 볼수 있는 것도 큰 무리가 없다.

행 17장 17절에서 헤르만 바빙크는 예를 들면서 일반적 부르심이 신약에 나타난 것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알리지만 사람들은 알지를 못한다. 그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라고 말한다. 자기를 알리는 것이다.
 
그러면, 효과적인 부르심은 어떤 것인가? 부르심이 그 사람의 내면, 영혼, 양심, 의지, 생각,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미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 사람이 마음 깊은 중심에 까지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의지를 움직이고 생각을 지배하고 그 사람의 감정을 다스려서 결국에는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주님을 자기의 주로 영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효과적인 부르심(Efective Calling)은 두 가지의 즉각적인 결과를 낳는다.

첫째, 중생이다. 둘째는 믿음과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시면, 사람이 중생하게 되고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된다. 만약에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심은 단순히 복음이 사실이라고 동의하는 것에 복음이 사실이다 라고 동의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부르심은 그 사람이 중생하고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된다. 그것이 바로 효과적인 부르심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결과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31문에서 무엇이 효과적인 부르심인가? 그 질문의 답이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으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죄로 말미암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고(회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우리에 마음을 밝히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를 붙들게 하고 믿게 하는 성령의 사역이시다 라고 답한다. 너무 잘 기록된 것이다. 그리고 매우 탁월한 신학적인 글이다.
 
성령의 사역은 무엇인가 라고 하였을 때,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회개인데, 제일 먼저 성령이 우리를 효과적인 부르심을 하시면, 제일 먼저 우리의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다. 그 전에는 내가 죄 인줄 모르고 죄 가운데 살았지만, 내가 얼마나 영적 비참한 영적 가운데 살아지만, 그 사람이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날 정말로 그 마음에 덮어진 수건이 벗거져서 영적인 어두움이 벗어지고 자신의 영적 실체를 보는 것이다. 정말로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처절히 깨닫는 것이다. 이 깨닫는 것은 유다의 후회와는 다른 것이다. 가룟 유다는 이런 성령으로 말미암은 죄와 비참함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냥 후회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죄와 비참함을 깨닫는 것는 철저한 회개이다. 드디어 그 영적인 어둠이 벗겨지고 이제는 자신의 영적 실체를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조명(inrighting)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이 회복된다. 중생하기 전에 이성은 왜곡된 이성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작동하지 않는 비뚤어진 이성이다. 하나님과 떼어놓기 위한 반 기독교적 이성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효과적으로 불러주시면, 우리의 이성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가운데서 조명되고 회복되고 고쳐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성이 과거에는 하나님을 멀리 하고 떠나는 것으로 작동하던 반기독교적 원리가 없어지고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모하게 되고, 그 지식가운데 기뻐하게 되고 그 지식 가운데 우리의 이성이 교정되고 고쳐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믿는 사람이 이성을 사용하면 그 이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위해 각각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예수믿고 구원받은 중생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우리의 의지가 새롭게 된다. 리뉴이(renewing) 되는 것이데, 그전의 우리의 의지는 죄에 종된 의지이었다. 곧, 루터가 말하는 노예의지다. 노예의지가 말하는 것은 죄로부터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도 못하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냥 가두어 있는 것이다. 죄가운데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옳다고 잘한다고 생각한다. 에피쿠르스 학파가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쾌락이라 한다. 의지가 죄가운데 묶여 있어서 죄가운데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자기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죄짓는 것을 잘한다고 칭찬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한번 더 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전도사가 된다. 복음의 전도사 아니라 죄를 짓고 전하는 전도사가 된다. 누구에게나 죄 짓기를 권하는 것이다. 여러분! 신문을 잘 살펴보시면, 신문을 쓰는 모든 기자들 가운데 대부분 불신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기사를 쓸 때에는 이들은 나쁜 것을 나쁜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선한 것을 선하다고 하지 아니 하는 것이다. 나쁜 것을 착하다고 말하고 나쁜 것을 더욱 더 전념하고 결연한 의지로 나쁜 일을 하도록 권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여러분 조심하기 바란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조심하기 바란다.
 
여러분 원래 깊이 흐르는 물은 소리가 없다. 얕게 흐르는 물이 소리가 요란스럽다. 우리가 보기에는 죄가 다 죽은 것 같지만 우리를 그렇게 괴롭히는 그 죄의 정열의 불길이 모두 꺼진 것 같지만, 단지 숨어있는 것이다. 깊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언제가는 그것이 강하게 노리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약한 틈을 보이면 그것이 불같이 나타나서 어디서 이것이 나타났냐고 당황하면서 나의 인생을 혼란가운데 빠뜨린다. 그런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내가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만지는 것을 통해서 언제나 일어난다. 죄는 죽은 것이 아니고 언제나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숨어 있다가 그리고 약해질때 유혹 받을때 그 죄가 힘을 다해서 일어난다.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난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의지가 새로워진다. 바르게 살려고 하는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충성하려고 하는 복음에 헌신하려고 하는 의지가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한다. 여러분!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우리의 의지는 이미 죽은 의지다. 이런 의지가 날마다 생기십니까? 날마다 새로워 져야 합니다. 이런 죽은 의지는 이미 죽은 의지이기 때문에 믿지 말기 바란다. 어젯밤에 기도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겠노라고 결심했습니까? 그 기도시간으로 끝난 것입니다.
 
마치 새 옷을 입은 후로 입는 순간부터 색깔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빨수록 입을수록 색깔이 바래지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의지도 그와 마찬가지다. 어제의 의지는 이미 죽은 의지이다. 새롭게 되는가? 주님앞에 이렇게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시간뿐이다. 옷을 사면 빨수록 색깔이 바래지고 모양이 비뚤어지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제의 의지는 죽은 의지다. 어제 받는 만나가 썩었기 때문이다.
 
오늘 새 만나를 받아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변화는 우리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의 지성이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조명되고 우리의 의지가 새롭게 되고 이렇게 3가지 사역을 통하여 결국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기쁜 마음으로 나를 의롭게 하는 주님을 끌어안는 일까지 우리을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 끌어안는 자리까지 나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에 까지 가지 못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의를 새롭게 하고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며,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을 아는 지성가운데 새롭게 하는 성령이 나의 의로 나의 의로움으로 새롭게 하시는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죄를 이기는 것으로 끝나면 않되고 이제는 죄를 이기는 것으로 극복하고 그 극복한 상태에서 주님 나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주님을 끌어 앉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새롭게 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고 기뻐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러한 것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주는 나의 의로움이시오, 나를 의롭게 하는 자시오, 나의 구주이십니다. 라고 날마다 반복해야 한다. 이것은 날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딤후 1장 8~9절까지 보시면, 특별히 9절말씀에서, 이 부르심이 영원한 때 주시기로 작정하였던 그 은혜를 주실 자에게 베푸시기 위해서 불러주시는 것이다. 그런니까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구나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내게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한 이유가 없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의로움은 낯선 의로움이라고 했다. 이것은 내 안에 없던 것이다. 이것은 내 안에 있던 것도 아닌 전혀 낯선 의로움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주어졌는가?
 
영원전에 은혜를 베푸시기로 했던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불러주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은혜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따라 받는 것이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자아의식을 최고로 안다.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자아의식이 가장 고상하다. 우리는 영원전에 언약의 은혜를 받기로 작정된 자라 생각한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경륜을 따라 오늘 나를 그 성령에 따라 부르시고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시고 자기의 자녀를 삼으시고, 영원한 영광에 이끌어 들어갈 자로 자기를 이해한다. 이 보다 더 높게 사람을 이해하는 자 없다.
 
내가 위대한 사람이다. 나의 위대함은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돈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돈만을 위대하게 본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은혜를 베루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만큼 위대하다.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는 한 우리도 영원하다.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우리의 작정도 영원에서부터 온다 우리가 얼마나 높아질수 있는가? 하나님이 높아질수 있을 만큼 높아진다. 그 높아짐은 천사도 흠모할 만큼 높아진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진 바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받아 누릴 모든 영광이 우리가 받아 누릴 영광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하고 생가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못하고 일에 실현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때, 여기에 중요한 실천적 요청이 있다. 제가 이 강의를 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할 때도 실천적 순종적 요청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실천적 요청이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시지만, 그러나 우리 편에 반드시 해야 되는 것, 즉 하기를 요청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학의 역설이다 라고 하였다. 은혜지만 순종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르심이 전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요구가 있다.

첫째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부르심에 가치있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엡4장 1절,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이것을 못하면, 성경공부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그냥 한시간 반동안 헛된 시간을 개거품 물고 끝나는 것과 같다. 아 그렇구나! 좋네! 그냥 알고 끝나는 식으로 하면, 성경공부 거꾸로 하는 것이다. 잘못된 공부이다. 그래서 명령이 중요하다, 그 다음 우리가 들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심히 고민하고 그 명령에 따른 실천에 요구되는 순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우리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엡4장1절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신 것은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반드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령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배반하고 살면 정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은혜안에는 일정한 원리가 있다.
 
은혜는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고 그것을 기쁘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이것이 은혜의 작동 원리이다. 따라서 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불러주신 성령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내적의지의 원리가 생긴다.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이 믿음에 따른 내적 순종력이라고 하는 것인데, 생기지 않는다면 은혜를 잘못 받은 것이다. 이 것은 성경에서 나온 바와 같이 은혜를 잘못 받은 것이다.

둘째로는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우리를 화평케 하는 삶에 종사하도록 부르신 것이다. 화편하게 하는 삶, 히12장14절 모든 사람과 화평을 구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닌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은 화목하게 하는 자로 어디를 가든지 화평케 하는 자로 불러 주신 것이다. 실천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 있어서 반드시 화평케 하는 자로 자기를 전적으로 종사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영적 자유로움으로 부르신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우리의 자유롭게 하신 것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무슨말인가하면, 우리의 이 자유를 죄를 짓는 일에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받지는 못한다. 이제는 율법이 은혜안에서 완성됐다. 율법이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거나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 아래 끌어 들어가지 못한다. 율법을 죄를 짓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된다. 은혜를 죄짓는 기회로 삼지 말 것이다.

넷째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기 위해서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하기 위해서 이다. 말하자면, 특별히 고전 1장 2절에서 보면, 그의 고난 가운데서 부르신 것이다.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셨다. 이것이 부르심 받은 자의 자세다. 교회의 어려움이 생기면, 자신이 제일 먼저 교회의 어려움에 들어가야는데, 제일 먼저 십자가를 피해 교회를 옮기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러한 잘못을 범해서는 않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믿는 자의 도리이다.

다섯째로는 우리를 불러주신 것은 복음의 목적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복음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생의 소망을 성취하는 일을 위해서 불러주셨다. 우리가 영생에 이루도록 하기 위해 불러주셨다.(살후2장 14절)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중생케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우리를 견인하시고 성화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우리를 불러주시는 자는 누구인가? 할 때, 부르심을 주시는 자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이 부르심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 부르심을 효과적으로 실제로 불러 주시는 자가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자는 성령이시다. 영원 전부터 우리를 불러주신 자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성령은 사실은 그 부르심을 실현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르심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제일 맞는 말이다.
 
정리하면 부르심을 주시는 자는 아버지요, 그 부르심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자는 성령이다. 우리를 정죄하실때도 우리에게 은혜 베푸실 것을 잊지 않으신다. 그래서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우리의 죄 때문에 진노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화를 돌이키시고 우리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영원전부터 우리를 불러주신 자는, 즉 작정해 주신 자는 하나님 아버지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화를 내시고 진노하실 때에도 그가 우리에게 인자함을 베푸시기를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성경에 보며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사랑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정죄하실 때에도 우리에게 은혜 베푸실 것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적의에 찬 태도로 바꾸신 것도 아니고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어 보내심을 실현시키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시고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는 이가 성부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축도 할때, 꼭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성령의 교통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

<5강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의 이름을 찬송, 또 찬송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주님, 우리의 의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케 하시고 그분의 의로심 속에서 그 의로움을 덧 입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불러 주심을 받아 여기 구원의 자리에 이르렀사오니 주님 항상 기뻐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그 감격으로 복음을 위한 일생을 살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9. 부르심과 중생

스콜라 주의 학자들이 부르심을 4가지로 구분해서 나누었다. ① 보카티오 .... ② 보카티오 .... ③ 보카티오 그레아티 ④ 보카티오 .... 이것은 부르심을 주시는 자가 아버지 한분이시고 집행하는 자가 성령 한분이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도 하나라는 것을 왜곡 할 위험이 있다. 첫 번째 보카티오 웨알리스 라는 것은 자연만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소위 말하자면, 자연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데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하나님의 관한 사실을 알게 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일반 계시를 통해서 사람들이 접합다는 것이다. 둘째, 보카티오 제널라리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설교를 듣는 중에 사람들이 그 마음에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 보키티오 크레이티오는 중생과 같은 것인데 사람이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이다. 넷째는 베르발리스 인테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효과적 부르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기의 뜻을 알리시고 그 뜻을 순종하도록 역사하시는 효과적인 사역이다. 그것을 복카티오 베르바리스 인테리나이다.

이를 네가지로 나누었는데 문제는 네가지로 세분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단 한가지 효력이 있는 부르심이라고 하는 가르침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 하나님이 효과적인 부르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부르심은 네가지로 부르심을 나누는 것은 곤란하다. 네가지의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들면 네가지 양상으로 주어진다고 하면, 모르겠지만, 이와 같이 네가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시는 부르심은 하나이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르시는 구원의 실효적인 실현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다는 사실은 이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는 것의 한 진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는 구원행위의 한 중요한 요소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부르심을 통하지 않고는 어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양자의 영광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 부르심이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부르심은 언제나 중생과 동시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는 자가 중생한다. 굳히 논리적인 순서를 따지자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요, 그 다음이 중생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서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부르심과 중생은 동시적 사건이다. 그러나 부르심이 중생이 아니고 중생을 부르심으로 대체할 수가 없다. 이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신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는 신적활동에 관한 것을 부르심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 부르심이 우리들안에 나타날 때는 믿음과 회개와 중생으로 나타나므로 중생과 부르심을 동일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경험중에 한부분이다. 부르심도 한 부분이고 중생도 한 부분이다.
 
그러나 부르심과 중생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동일 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은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안에 일어나는 새로운 본성의 변화를 “중생”이라 한다. 그러나 신적 효과적인 부르심은 우리 안에 그러한 본질적인 신생의 변화를 일으키는 신적활동에 관한 주권적 활동 사역을 “부르심”이라 한다.

성경에 보면 우리를 부르신 이가 성령의 하나요 부르심도 하나다 라고 말한다. 부르심이 하나라는 것은 중생의 경험은 하나라고 말할 것이 없다 중생의 경험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중생할 때, 중생의 변화가 즉각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상당시간 경과를 하면서 중생의 변화가 서서히 나타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을 일으키시는 원인자로서는 성령이 한분이시지만 중생의 경험은 다양하고 또 중생에 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도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중생을 일으키는 부르심은 하나이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한몸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통일되고 한몸을 이루어야 되는 신학적 근거는 중생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따라서 성경이 우리가 서로 하나 라고 말할 때 언제나 불러주시는 성령 한분과 부르심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하나의 부르심이 우리 각자의 인생에는 다양한 신앙의 경험으로 구원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중생은 우리안에 일어나는 부르심의 결과이다. 

 

10. 중생

중생이란 본질적으로 두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본질적인 측면, 성품, 우리의 마음 등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중생은 회개하도록 만들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새 생명의 시작이다. 이것을 현상으로 보면, 중생은 오관의 영역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우리의 관찰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현상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러한 새 생명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노출되어서 사람들이 명백하게 볼 수 있는 어떤 변화된 삶의 증거를 중생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는 반드시 우리 삶의 주변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반드시 일어나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이 우리 삶의 특징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본질적인 변화이기는 하지만 중생의 변화를 현상학적으로 관찰해서 그 증거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신비적인 것이지만, 가시적으로 눈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현상적인 중생의 증거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중생이란 의미가 통일된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지는 것은 아니다. 중생이 의미하고 있는 그 범위를 두고 학자들 간의 의견이 약간씩 다르다. 예를들면, 존 칼빈은 중생을 회심하고 돌이키고 성화까지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신학적 이유가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중생을 새롭게 되는 삶의 전부라고 하였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는 중생이라는 의미를 약간 좁게 해석하였는데,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것이다. 물론 현상학적으로 죤 칼빈은 성화까지를 중생의 측면을 접근하려고 하였다. 중생을 이해하는 가능한 것은 이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생이 어떤 변화를 수반한다고 했는데 그 변화가 단순히 어떤 부분에 멈추는 것이 아니하고 성화에 까지 변화가 나타난다면 그 변화를 중생이라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중생의 증거가 굉장히 다양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넓게 이해했다는 것은 중생을 단순히 본질적인 측면에서 신비로운 길로 성령의 하시는 우리가 볼수 없는 길로만 남겨놓지 않고 그것을 관찰 가능한 증거를 수반하는 경험으로 중생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넓게 이해되는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에서는 중생을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를 말한다. 그 이유는 그 중생이 그렇게 새롭게 된 삶에 중요한 변화들을 수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중생이다. 중생을 현상학적으로 보면 예수를 믿을 때 한 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보통 중생을 우리 일생에 단 한번 예수 믿을 때 일어나는 신생이다 라고 생각하는 데 이것은 본질적인 이해이다.
 
이 본질적인 신생이 우리 삶의 인격이나 말이나 생각이나 의지나 인간관계나 죄에 대한 관계나 하나님에 대한 관계나 교회에 대한 관계나 이 모든 것을 변화로 이끌어 갈 때 그 나타나는 변화되는 중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을 중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신학자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넓게 본 것이다. 중생이 단 한번 일어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상학적으로 볼때 우리 일생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상학적으로 보는 것을 지지한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단 한번의 인생에 한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적으로 본다면 우리의 생애의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그 중생의 내적인 변화가 외적인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내적인 변화가 국한된 시간이나 국한된 국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의 삶, 전 생애 동안에 중생이 어떤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정도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에 있어서 중생이 우리의 어떠한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에는 성화와 중생을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성화를 가르치면서 중생을 같이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는 중생을 현상학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수반하는 사건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에 성화를 이야기 할때 그 성화는 우리의 삶에 성숙이고 개성이고 변화이다.
 
그러한 성화론적 변화는 중생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성화를 중생과 떼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믿을때 한 번 중생하고 믿으면서 거듭 거듭나는 것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성화라는 것을 중생으로 말하자면 성화는 반복된 중생이고 중생은 성화를 위한 중생(거듭남)이다.
 
성화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반복된 중생이다. 그래서 어제 나는 죽고 오늘 나는 새로운 사람이다 라는 말이 성립된다. 다시 오늘의 나는 죽고 내일의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중생은 무엇인가하면, 성화를 위한 거듭남이다. 그냥 목적없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성화의 목적을 앞두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와 중생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면에서 성화론을 다룰때, 성화와 중생을 같이 이해하는 신학자는 상당히 성경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대표자 신학자가 누구인가하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수인 닥터 데이비스가 있다. 이분은 주로 성화론을 다룰 때 중생과 같이 이해하였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부터는 중생을 우리 일생에서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일어나는 신비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도 옳지만, 중생이란? 본질론적인 좁은 의미에서 정리하면,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엡2장 1~2절)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새 생명 가운데서 출생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중생이란? 거듭나고 회심과 믿음과 의롭게 되는 성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본질론적으로 중생이란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넓게 말하자면 중생은 단순히 우리의 구원의 경험에 제일 먼저오는 한번있는 사건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서 회심하고 믿고 거룩하게 되는 전 과정의 문제라고 이해해야 한다.

중생이란 말은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성경에서는 딱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마태복음 19장28장에 나타나는 중생은 한 개인의 신생을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온 우주가 새롭게 될 것을 중생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신생에 관해 말하는 것은 오직 디도서 3장 5절에만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진실로 거듭남의 중생한다고 말한다.
 
마19장28절의 종말론적 우주론적 변화에 중생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만물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현재 이 땅에 있는 것을 새롭게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데 이것은 있던 땅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은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마19장28절 중생이라고 말하는데 이 중생은 본질적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 있는 것을 고치는 것은 개선이 아니다.
 
새로운 것의 유익이다. 그전의 어떠한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그전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어떠한 것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완전의 새로운 것으로 재 창조를 의미한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중생을 언약적으로 볼 때 사람이 태어나면서 죄인이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담의 행위언약에서 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적으로 죄인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은 죄를 더욱 죄 되게 만들고 죄를 생각나게 만들고 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삼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율법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율법에는 구원을 상징하거나 구원을 암시하거나 구원의 가능성이 일체 그안에 없다.
 
그런데 행위언약에서 태어나는 자는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결국에는 언약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 언약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아담의 행위언약안에서 태어남으로써 죄인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안에서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적으로 볼때 중생은 필연적이다. 중생이 없이는 언약에 들어갈 수 가 없다.
 
따라서 중생은 새 언약의 들어갈 수 있는 절대 조건이다. 중생은 우리가 새 언약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시에 새 언약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말하면, 중생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백성이 누리게 될 은혜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아담 언약안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모든 죄의 전가와 죄의 결과를 모두 우리에게 전적으로 다 물려받게 되고 그 저주와 심판 아래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담의 언약가운데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이 중생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약속된 그 모든 은혜를 언약안에서 누리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그러하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 다는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지식을 깨닫는 것도 아니고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깨달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안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일평생 세가지 중요한 사건은 태어나고 결혼해야 하고 죽는 것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집행하신다. 태어날 시간과 장소와 부모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하므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언제 어떻게 부르실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 한번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결혼이다. 결혼생활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선택적 생활에 맡겨진 것이다. 이 세가지 중대한 사건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결혼에는 권리가 있고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잘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의와 진리로 태어나는 사건이다. 태어남으로서 구원받는다. 기독교의 이 진리를 잊지마길 바란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남으로써 자녀로 살고 태어남으로써 자녀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아무런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행을 믿어 하지 않고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그 선행으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오직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중생하길 바랍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회개하라고 말할 수 있고, 다만 믿어라 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중생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 그 청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단지 외치기만 할 뿐이고 그 외침을 통해서 중생케 할 일은 성령이다. 그래서 성령이 외치는 자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외침이 무익하고 변명일 뿐이다. 특별히 강단에서 서는 목사들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설교문을 잘 준비하고 아무리 성경본문을 철저히 잘 준비하더라도 아무리 뛰어난 수사적 표현을 동원하여 증거한다 할찌라도 성령이 불러주지 아니하고 성령이 중생케 하지 아니하면, 그 전하는 외치는 자의 수고가 무익되고 전혀 헛된 것이다. 이 말은 목회의 성공도 하나님의 뜻이고 목회의 실패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인간이 목회에서는 적어도 성공했다, 실패했다 라고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만 가르칠 뿐이다. 이것이 충성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 훌륭하고 업적을 이룬 사람 이라고 말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상 받는 사람은 크게 이룬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충성이라는 말은 주어잔 조건하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에 바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를 찾지 않고 그 자세로 우리를 찾는 것이다.
 
어떠한 자세로써 말이다. 그 자리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 왔는가 그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인 것이다. 따라서 충성된 종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너무 큰 것을 이룰려고 하지 말고 너무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말라! 언제나 오늘 내게 그 주어진 작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이 충성된 종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에 따라 그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이다.
 
여러분 삶의 자리를 바꾸려고 하는 시도자체 어려운 것이고 불순종의 모습이다. 바꾸려는 하는 과정에서 많은 마찰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너희의 부르심 행하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의 수용성이 요구된다. 주시는 대로 잘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 쳐다보지 말고 여기 이 자리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여기 이 자리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할 때 열매 맺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최선이고 지혜이다.

중생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성을 살펴보면,(요3장 3~5절) 기독교 신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중생이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한 것은 중생이다. 중생은 완전히 본성이 변화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이나 고행이나 깨달음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이방종교의 특징은 한 개인의 노력을 요구한다. 중생을 통해 받는 구원은 세상사람들이 어떤 것으로 이룰 수 없는 존재인 것으로 우리가 받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지도 구하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전적인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다. 우리의 주어진 구원은 특별한 구원이다.
 
유대인의 지도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성령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출생하므로 (본질의 변화를 가지므로)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니고데모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적어도 행위에 따른 순종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이루는 것이나 종교적인 규례나 규정을 따라서 충실하게 살 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이해를 완전히 거부하신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것이냐 가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구원의 방법에 관한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 전환을 요구하신 것이다.
 
구원은 니고데모가 생각해 왔던 그런 종류가 아니다. 사람으로부터 태어난 사람 혈육을 입고 태어난 사람들이 거기에 더해질수 있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근본적으로 지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데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사과와 오렌지가 다르듯이 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오렌지가 사과 되고, 사과가 오렌지 되듯이 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새로운 종으로의 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이다 변화가 와야 하는 것이다.

아마 니고데모는 그날 밤에 절망을 느꼈을 것이며, 이것은 그기 평생을 유대인의 규정에 따라서 말씀을 지킨다고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지만 그러한 자기의 노력이 이룰 수 없는 곳에 구원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해볼 수 있는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 말씀하시는데 성령은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이 동에서 서로 불고 부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성령이 신비롭게 역사해서 역사하는 사람만이 거듭나고, 거듭나는 사람만이 곧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구원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율법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사망 선고이었다.
 
니고데모에게 그날 밤에 절망감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특별히 결정적으로 절망감을 안겨 준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어로 “게네 아우트”로써 부정시제 수동형으로 위로부터 중생되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 갔을 때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어 루디아가 그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한 지라 라고 했을 때, 루디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바로 그 때가 시제가 없는데,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없는 부정시제인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그 시간이 언제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중의 그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갑자기 열어주신 것이다. 그 어떤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열다 라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힘의 작용이 아니라 자기 밖에서부터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힘에 의해 열려지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있던 중에 그 여자의 마음이 열려진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을때 그 말씀을 깨닫아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소원이 생긴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닌까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를 규정할 수 없고 부정시제로서“위로부터”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 그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는 때,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 이 말씀앞에 절망과 무력감 ,박탈감을 가진 것이다. 그는 그날 더 나은 종교적인 의무감 대문에 예수님을 찾아 오신 것인데, 즉 종교적인 모든 의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가르침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거듭나야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네가 거듭나야 한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요한 복음 3장에서는 위로부터 태어나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은혜로서 거듭남으로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중생이 필요한가? 인간의 육체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사도요한과 사도바울 사이의 육체에 대한 이해가 조금 다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는 인간의 타락성이나 우리 인간을 죄로 이끌어 가는 죄의 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우리 몸속에 죄의 원리를 담고 있는 그릇과 같아서 그 몸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은 죄를 완전히 벗어 버릴수 없다 말한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강한 윤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말하는 육체는 단순히 육체의 원리 죄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대조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나라이므로 성령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자연인들은 성령과 관계가 없는 죄에 종된 사람이다.
 
그래서 사고 요한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중생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요한은 말하고 있다. 중생은 한마디로 영적 존재의 출생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방언해야 하고 신유해야하고 기적해야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중생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곧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가지 사실은 분명한데, 영적이다 라고 말할 때, 그 영적인 사람은 곧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중생한 사람이 다 영적인 사람이고 이렇게 되는 사람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후 그가 설교할 때, 유월절 지내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설교할 때 “너희가 회개할 때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말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곧 회개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중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계통에서 성령세례를 말하는데 성령세례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믿을 때 받는 성령과는 다른 성령 체험이라고 말한다. 예수 믿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중생도 성령의 능력이고 믿음과 회개도 성령의 능력이고 의롭게 되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난후에 성령의 세례는 무엇을 가져오는가? 방언을 수반한다.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은 오순절 계통에서는 교리적으로 그것이 방언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방언받다는 것이다. 그러닌까 오순절에서는 성령체험이란 중생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게 하는 성령의 체험이다.
 
그런식으로 성령세례를 가르치는데, 이 성령세례가 신학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라는 것은 사실, 성령께서 우리 구원의 경험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을 가르치는 것이지 이미 성령을 받고 중생한 자가 다시 두 번째 축복인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축복은 성령이 우리에게 중생을 일으키게 하고 회심하게 하고 믿음 갖게 하고 두 번째 축복은 방언하게 하는 성령세례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그렇게 매번씩 일정한 구분을 가지고 체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험의 대상이 아니다. 성령체험이란 말 자체가 온당치 않다. 성령의 체험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인격적 하나님의 신이시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중생할 때 그들이 다 영적인 사람이 되고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고 세상 끝날 때 까지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필요성의 첫 번째 필요성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에 따라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질이다. 자질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선한 사람이 되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도덕군자를 만들어서 안되고 교회안에서 착한 사람을 양성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되고, 사실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곳이다.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다.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착하게 사는 이유는 착하게 살아서 성령 체험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착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서 중생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자연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인은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구스인의 피부와 표범의 비유에서와 같이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선행을 하고 공적을 쌓아서 구원에 이를수 있다는 것은 큰일 날일이다. “선을 행할수 있으리라”는 말은 악과 선을 대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선을 행하여 구원받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표범은 그 반증을 변할 수 없고 사람은 그 타락한 성품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인데 그러나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 선이 완전한 선도 아니고 누구든지 선을 통해서 구원받도록 하나님이 섭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중생한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괜찮다.

롬8장 7~8절에서 보듯이 영적으로 라야 분별하는 것이다.“영적이란”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이다. 성령에 성령에 의해서 조명되어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우리가 비록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의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있는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는 요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믿어야 중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을수 있다고 사람을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성경에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아주 부정적이다.
 
성경이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진지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탓에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알미니안 주의는 주장한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이 갖고 있는 인간이해의 제일 큰 문제는 성경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토록 부정적이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인간의 타락성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이해를 고상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믿음은 자유적인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 믿는 것이다.

중생의 두 번째 필연성, 중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변화들의 가시적 변화와 부가시적 변화가 있다. 가시적인 변화에 대한 주의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특히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영적변화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기원 시작 중생의 수요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일은 본질적으로 신비적이다.(요3장 7~8절) 그런데, 성령의 사역을 바람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에스겔서 37장에서 온 것이다. 뼈들의 관한 환상에서 뼈들이 사람으로 육체를 입고 일어설 때에 바람같이 하나님이 성령이 역사할 때에 그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뼈들이 다시 결합하고 살이 덮이고 사람이 되어 큰 군대가 되었다. 그때에 성령의 사역이 바람과 같이 역사했다고 에스겔 37장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서 언제나 바람과 같이 사역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과 같이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은 그 강조점이 성령의 사역이 신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령이 어떤 양식으로 어느 때에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우리 인간이 직접적으로 분석할 수 없고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 거듭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소위 구원파에서 중생은 시간과 날짜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중생의 사역은 신비롭기 때문에 누구도 명확하게 언제라고 말할 수 없다. 방금전 부정시제라고 말하한 것과 같다. 어거스틴 이 말하기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수는 있으나 성령의 사역의 깊이를 알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성령의 역사를 알 수가 있는데 언제 어떻게 역사하는지 사람이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 바람과 같이 신비롭게 사역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아니하시고 동의를 구하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깨서 주권적으로 한사람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본성을 하나님의 자기의 본성으로 바꾸어 버리신다. 새로운 생명을 덧입게 하신다. 우리자신의 구원을 인간의 노력으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다. 주권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구원에 위안과 확신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사도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었지만, 성령에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 할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식하든 못하든간에 그들의 성경기록 모든 사역에 하나님이 감독자로 관여하셨다. 어떻게 어느 부분까지 어떤 양식으로 그 제자들과 성령이 역사하셨는지 본인도 모른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다. 계시가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는 중생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변화) 중생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중생의 역사가 시작되면 중생이 광범위한 변화를 동반한다. 혁신적인 변화다. 이 중생은 우리의 마음(존재의 중심)에 이다. 우리 이성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이 원하는 것만 이해하고 마음이 가르키는 것만 보고 마음이 원하는 것만 듣고 마음이 가르키는 것만 보고 듣고 강조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이 곧 감정으로 나타나고 이 마음이 의지하는 곳에 내 인생과 운명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제물도 있다. 이 마음이 존재의 중심이다. 가장 깊은 곳, 자기 인생의 중추가 어디 있는가는 마음에 있다. 중추가 바뀌지 않으면 그 주변의 것들을 아무리 개선해도 그 개선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수가 없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그런데 이 중생은 우리 마음에 일어난다. 첫 번째는 신비롭게 사역하고 둘째는 우리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

렘31장 33절을 보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을 속에 그 마음에...” 단순히 우리의 기억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호나 선호도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 정결한 소원은 자연인에게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소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없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의 부르심, 성령의 감동, 거기 믿음에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생기는 소원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날마다 말씀을 들을 때 이러한 소원이 생겨나길 사모해야 한다. 중생은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가져 오므로써 어디까지 그 변화를 미치는가 하면 그 변화가 우리의 머리에 있는 과학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중에는 중생의 변화가 그냥 내 마음의 관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내 생각의 길까지 바꾼다. 결국에는 사고하는 방식을 바꾼다. 또 의지를 바꾼다. 우리의 정신(지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가운데 바르게 온전하게 작동한다. 이렇게 하므로써 중생은 예레미야 31장 33절에 있는 말씀을 정말 아름답게 성취한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이 중생하게 되면 근본적으로 마음에 변화가 오고 생각의 변화가 오고 지성과 이성의 변화가 오고 의지의 변화가 오고 그 의지가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면 그 사람의 말도 변화시키고 행동도 변화시키고 외모도 변화시킨다. 얼굴이 박색이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 마음에 신앙이 있으면 그 신앙이 얼굴로 아름다운 빛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겉모습 보다 그 겉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
 
그런 사람은 함께 살면 살수록 더 사랑스럽고 더 다정스럽고 같이 있는 사람이 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얼굴은 너무 예쁜데 성격은 완전히 괴팍하다. 그러면 그 잘생긴 것이 때로는 괴롭고 가증스럽다. 사람이 중생하면 우리의 전부를 바꾼다. 비록 새마을 운동을 가진 얼굴도 큰 위안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야말로 마음이 비단결 같은 중생된 사람의 증거이다. 중생을 하고 나면, 죄악이 끊어진다. 그러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반드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 중생했는가? 오순절 성령강림때 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했다. 신비적이기 때문에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중생을 일으키시는 자(원 보혜사)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성령이 오순절 성령강림때 오셨지만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례받는 그 때 성령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공생애 기간중에 어떤 때에 이미 중생은 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한 출발이다. 그래서 이 성령세례가 반드시 중생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도 너무 제한적이다. 성령에서 세례는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례는 성령이 임하는 양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이 어떻게 임하는가? 그들에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충만하게 임했다. 그래서 성령이 이끄시는데로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사역했다.
 
그런데 세례라고 쓴 것은 그 세례식에서 물이 부어지는 양상을 통해서 세례가 어떤 모양으로 그들에게 임할것인가를 보여주는 형용사적으로 사용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세례은 물을 완전히 뒤집어 쓴 세례이었다. 그러나 개혁파의 세례는 물을 의식행위로 뿌리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라는 말은 마치 무리 우리에게 적시듯이 임함을 표현한 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의 삶의 광범위한 외형적인 변화로 반드시 나타난다. 그래서 온 우주가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변화를 보고 내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중생은 못 속인다. 중생받은 사람은 오랫동안 중생의 증거를 숨기지 못하고 잘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했으면 중생에 합당한 열매들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외면적 행위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7절에서 “사람이 태어날 때 모두 죄의 종”이다. 따라서 중생은 마음과 지성을 새롭게 하고 의지를 교정하고 이제는 우리의 의지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아, 그리고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깨끗하게 된다.(요3장 5절의 물은 청결함의 모티브이다) 말하자면, 물이 강조하는 것은 청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각종 더러운 것 악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던 그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중생할 때 그 마음의 생각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일체의 더럽거나 추하거나 악한 것을 사모하거나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악한 것을 느끼는 것은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만 가질수 있는 경지다.
 
우리 주위에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자도 없고 선한 것을 참으로 선하다고 말 할수 있는 사람도 없다. 백가지의 악을 깨닫는 것보다 한가지의 선을 깨닫는 것이 더 어렵다. 마음이 청결해 지면 선한 것을 선하다고 말할수 있고 무엇이 비로소 무엇이 선 한줄을 안다. 마음의 생각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에서 물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모든 우상들이 다 씻겨져 가는 것을 상징한다.
 
성령은 새로운 어펙션(affection) 어펙트란 열정, 뜨거움을 말하는데 훨씬 더 감정적인 것에 호소하는 말이다. 의지는 죄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펙트(열정)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내 마음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강한 반응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열정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 믿고 선교하고 남을 돕고 헌신하고 남을 섬기는 것을 왜 기뻐하는가? 이것이 중생의 결과이다. 영적인 기호가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 좋아하던 것이 바뀌고 이제는 새로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열심이 생기는 것이다.

중생하게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생기는데 그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한 뜨거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헌신에 열심히 생긴다. 중생이 새로운 열정을 마음에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도한 쪽으로 가도록 마음을 변화시키고 이성을 교정하고 의지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열심을 줘서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이 영원 전에 우리를 향해서 그 영광의 성취를 향해서 나도 모르게 그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작은 변화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향으로 내 삶이 갈수 있도록 이끌어 가신다.
 
그것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매 순간 나의 삶을 정교하게 이끌어 가신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하셨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갖고 오고 이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의지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정열을 주셔서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길을 걷도록 이끌어가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의 능력이다.

불가항력적 은혜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 원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인데, 칼빈주의자들이 사용한 것은 강제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비롭고 교묘하게 사람들의 의지로 가도록 역사하신다. 왜 이것을 불가항력적 이라고 하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목적의 사람이 반드시 이루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이지, 그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는지 그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를 설명할 때 하나님이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데 그 가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원하고 의지하는 바에 거슬려서 데려간다고 생각하는 데 그것이 아니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란 그것에 결과에 관한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자리에 우리들이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 이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역사하느냐 물으면 그 역사는 마치 중생과 같아서 신비롭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막상 그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자기 의지로 자신의 생각으로 한다고 충분히 느낄만큼 자유롭다. 그러나 충분히 자유로운 그 상황에서 이미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이끌어 가시는 그 역사가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이다. 본인은 모르지만 나중에 이루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거기에 도달하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알게 된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우리를 이끄시는 결과를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신비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를 변화 시키시고 이성을 새롭게 하게 함으로 정말 그 마음이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플랭팅거 신학자는“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는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고 신비롭고 따뜻해서 그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마치 자신이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가는 길이 자기가 정한 길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유롭게 역사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필연성을 말했다. 중생도 결국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중생이 강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중생은 외적인 증거가 꼭 드러난다.

중생의 증거는? 첫째는 죄에 대한 변화이다. 죄에 대해 달라진 태도이다.(요일서 2장29절,요일서 3장9절)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난자(중생된)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일단은 죄에 대해서 달라진 자세(태도)로 중생의 증거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죄를 짓는 것은 자연(nature)이지만 중생하고 나면 죄를 짓는 것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죄짓고 사는 것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로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지는 것이 일상생활이 될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죄를 짓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지는 것이다. 죄짓는 사람은 죄의 영감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로 난자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생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기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안다.
 
죽은 고기는 흐르는 물에 그냥 떠내려가지만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그 악한 세월에 묻혀갈 수 없는 것이며 노력하고 거슬리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것이 중생의 증거다. 죄짓지 못한다는 이 말은 죄를 짓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다르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죄인들처럼 짓지 않는다.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수 없지만 죄를 범할 때 즉시 회개한다. 요일서 3장 5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한다. 아무도 죄가운데 살지 않는다. 죄가 그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규정하는 특징적인 원리가 되지 않는다.

싱클레 퍼거슨 이라는 분이 성령론이란 책을 썼는데, 나의 멘토인데, 요일서 3장 5절 중생한 자가 죄에 대해 죽었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 이것은 현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예수 믿고 중생하고 이 사람들이 영광에 들어가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라는 관점에서 사도요한이 말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뜻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이들은 장차 완전히 죄를 짓지 못하는 자들이 될 것이고 그러한 자들로서 오늘 죄와 다툰다 라고 설명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죄를 짓지 못하는 불가능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지금은 그 죄와 계속해서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와 다투면서 죄와 이기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생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고 의지가 자유롭게 되고 우리 속에 새로운 열정이 찾아왔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할 때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는 자유도 있고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고 성령의 감동도 있으므로 죄와 다투기를 힘써야 한다. 죄와 다투기를 힘쓸 때,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자들이다. 이러므로 중생을 드러내는 자들이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감사,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주님을 떠나 있을 그 때에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중생케 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게 하시고 천국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고 새로운 것을 심게 하시고 나라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놀라운 은사를 부어 주시니 주여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이 글래스에 참석한 모든 종들에게 오늘 이 성령의 과목을 가르치니 관념의 지식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정말 새로운 용기와 도전과 힘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다음 주에 그 동안 우리가 배운 것을 한번 확인하고자 합니다. 주님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다 기쁨으로 이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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