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otr Il'ich Tchaikovskii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법률학교를 졸업한 뒤 법무부 공무원이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여, 61년 A. 루빈슈타인이 주재하는 러시아음악협회 음악교실(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으로 개편)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루빈슈타인과 N. 자렌바에게서 작곡을 배웠고 66년 1등으로 졸업하였다.
그 뒤 루빈슈타인의 동생 니콜라이가 교장으로 있는 모스크바음악원에 교수로 초빙되어, 음악이론과 작곡을 가르쳤고, 이 시기에 활발한 작곡활동을 하였다. <겨울날의 환상>이란 제목이 붙은 [교향곡 제 1 번 G단조(1866)]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1869)], 제 2 악장의 <안단테 칸타빌레>로 유명한 [현악 4중주곡 제 1 번(1871)], 소러시아 민요를 소재로 한 [교향곡 제 2 번 C단조(1872)], 웅대한 서주와 민요풍의 주제를 가진 [피아노협주곡 제 1 번(1874)], 피아노곡집 [사계(1875)] [슬라브행진곡(1876)], 환상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876)], 발레곡 [백조의 호수(1876)] 등의 걸작을 작곡하였으며, 특히 [백조의 호수]는 초연 때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후에 진가가 인정되어 발레의 고전으로 지금까지 널리 공연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비평가들로부터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애호가들과 청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77년 결혼에 실패하여 자살을 기도하였으며,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스위스에서 요양하던 중 알게 된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N. 폰 메크부인이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이로써 재정적 어려움 없이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메크부인에게 78년 작곡한 [교향곡 제4번 F단조]를 "우리들의 교향곡"이라 부르며 헌사하였다.
그 뒤 각지로 여행하면서 가극 [예브게니 오네긴(1877)], 깊은 정감과 러시아적 애수로 유명한 [바이올린협주곡(1878)], [이탈리아기상곡(奇想曲)(1879)], B.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묘사한 [1812년 서곡(1880)]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바이올린협주곡]으로 명성을 세계에 떨쳤다. 그러나 이 작품도 비평가들의 신랄한 비판을 받는 등 그의 독창적인 작품에 대한 일부의 비난은 매우 가혹하여 그는 많은 고민과 함께 더욱 고립적인 성격이 되어갔다. 85년 모스크바 교외에 주거를 정하고 창작에 몰두하였으며, 자신의 작품 지휘도 자주 맡았다.
이 시기에 작곡한 작품은 교향곡 [만프레드(1885)], [관현악모음곡 제 4 번(모차르티아나, 1887)], 환상서곡 [햄릿(1888)], [교향곡 제 5 번 E단조(1888)],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가극 [스페이드의 여왕(1890)],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1891)], <비창>이라는 부제로 널리 알려진 [교향곡 제 6 번 B단조(1893)] 등이며 특히 <비창>은 그 스스로가 최고 작품으로 인정하였는데, 곡이 가지는 절망적인 어두움은 자신의 삶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88년 이후 작곡활동과 함께 함부르크·베를린·프라하·파리·런던 등을 순회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였고, 91년 미국에서도 연주여행을 하였다.
이미 1890년에 메크부인의 지원은 끊어졌지만 세계적인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93년 5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 [교향곡 제 6 번]을 완성하였고, 그 초연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으나 그곳에서 콜레라로 급사하였다. 서유럽 낭만파음악의 정신과 기교를 도입하여 러시아민요의 표현 방법을 조화시켜, 넘치는 열정과 비장하며 극적인 내용, 감미롭고 우아한 서정성, 명쾌한 구성 및 교묘한 악기 용법의 많은 명곡을 남겼다. 가극 11, 발레곡 3, 연극용 5, 관현악곡 38, 현악곡 2, 협주곡 12, 실내악 17, 바이올린곡 5, 피아노곡 110, 합창곡 23, 이중창곡 6, 독창곡 106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연표
Pyotr Il'ich Tchaikovskii (1840∼1893)
낭트칙령이 폐지된 뒤에 프랑스인의 자손 알렉산드라 다시에 Alexandra d'Assier와 결혼한 광산기사의 차남인 그는 사법관이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음악을 지향하고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1862)한 것은 법률공부를 마치고 법무성에 들어가 서기의 지위를 얻은 후였다. 그는 음악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루빈스타인(오케스트레이션)과 자렘바 Zaremba(음악이론) 등의 강의에 출석했고, 피아노 이외에 플루트와 오르간을 배웠으며 모짜르트, 베토벤, 글린카, 마이어베어, 베버, 슈만, 그리고 리스트에게 경도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원장으로 있던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에 임명(1866~77)됨으로써 그의 재정적 문제는 해소되었다. 그리고 교수가 된 그에게는 1867년에 두 번째의 러시아 여행을 하고 있었던 베를리오즈를 공적으로 영접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1868년에 〈5인조〉 그룹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가 가령 발라키레프에게 공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대한 어떤 불신감과 또 그와는 성격이 달랐던 무소르그스키에 대한 솔직한 적의적 감정은 단 한 차례도 버린 적이 없었다.
이 시기에 그의 최초의 작품이 여러 곡 작곡되었다(특히 3곡의 교향곡,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한 피아노협주곡 제1번, 오페라지방장관, 옹딘, 오플리치니크, 대장간의 바쿨라, 백조의 호수). 때로는 통속적인 주제가 그의 작품을 풍요롭게 하고 있는데(cf. 교향곡 제2번의 특히 최종악장, 또는 눈 아가씨), 차이코프스키는 그것들을 보다 서구적인 기법으로 다루었다.
더욱이 그의 눈 아가씨에서의 차용은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동명의 작품에서 한 옮김보다는 더 존중될 만한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차이코프스키는 〈5인조〉와의 관련에 의해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서구를 향해서 눈을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친구들에게는 러시아적 주제를 부여하고 있으면서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서구적 주제를 부과한 스타소프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템페스트, 교향곡 "만프레드" 등의 작품은 스타소프가 그에게 매우 세밀한 초고에서조차 시사를 준 것이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칸틸레나와 선율에서조차 어떤 우울성과 결부된 매우 근원적인 러시아적 특징을 길러나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는 러시아인이다. 뼛속까지도 러시아인이다라고 그는 어느 날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1875년 이후 그는 음악상 교제관계의 발을 넓히게 되었다. 생상과 우정을 맺었고 리스트, 그를 열광시킨 카르멘의 작곡자인 비제, 그리고 마스네와도 교제했다. 그는 바이로이트로 가는 여행길에 바그너와 만나기를 시도했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876년은 중요한 이른바 열쇠가 되는 해였다. 왜냐하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덕택으로 부호 폰 메크 von Meck 부인(1879년에는 외동딸을 위해서 피아노 교사로 드뷔시를 고용했다)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은 없었으나(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조언자인 동시에 후원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교제가 계속된 14년간 계속된 그들의 열렬한 편지의 왕래는 우리에게 기묘한 〈목가적 순애〉의 흔적을 하나씩 더듬을 수 있게 해준다. 그녀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을 정기적으로 보내준 덕택으로 그는 모든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그때 가르친다는 의무에서 벗어났고, 실패로 끝난 결혼(1877) 후에는 여행과 사교생활(클라렌스, 파리,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 산레모)에 대한 어떤 취미를 찾아냈다. 이 시기는 그의 위대한 창작의 시기였다.
그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처음으로 데뷔했던 때는 1886년이었던 것 같으며, 1888년에는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떠났고 그 후에 대서양을 건넜다. 그의 작품은 미국에서 매우 열광적인 영접을 받았고 1891년 5월 5일에는 카네기 홀의 신축기념으로 연주되었다. 1893년 6월 케임브리지 대학의 명예박사학위(막스 블로흐, 생상, 그리그 등과 동시에)를 받았으나 그 해 10월 28일 성적 스캔들 때문에 명예를 위해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 음악적 유서인 교향곡 비창의 초연 직후의 일이었다.
표현상의 진실에 대한 배려, 즉 단순한 동시에 성실하다는 배려가 차이코프스키에게 있어서는 그의 교향곡과 오페라 작품이 가지는 근원적인-유일하다고 해도 좋을-주제와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인간의 운명, 인간이 그 운명을 지배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야기되는 투쟁과 그 좌절이 주제이다. 사실상 교향적 환상곡 운명(1868), 그의 최후의 교향곡 3곡, 그리고 비창의 최종악장을 구성하고 운명을 앞에 놓고 인간의 패배에 바쳐진 저 장송미사 등을 어찌 달리 해석할 수 있겠는가? 또 렌스키, 헤르만, 잔다르크와 같은 인물들도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속에는 비극적인 것과 거의 병적인 관대성, 그리고 기만성을 수반한 인간의 여러 가지 정념을 표현하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은 거기에 속지 않았다(나는 얼마나 늙은 울보인가!). 그러나 음악 속에서 유일하고 가치있는 위로를 찾아냈던 것은 확실하며, 이 과도적인 낭만주의적 경향 속에서 폰 메크 부인은 그의 여러 가지의 실망과 열망에 대한 반응을 찾지 못했는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가곡이 〈영혼의 상태 état d'ame〉를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그에게 있어서 교향곡이란 〈영혼의 음악적 고백〉, 즉 그의 심정의 토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단순하게 목적이 없는 음의 장난에 불과한 음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식의 틀이 큰 쪽이 그에게는 적합했던 것이다. 틀이 클수록 그의 특징이 되는 긴 멜로디와 장대하고 장식적인 주선율을 충분히 전개시킬 수 있을 것이고 또 지극히 자연스러운 대규모적인 전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현악기를 추구했고 결코 음량을 올리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의 교향곡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것보다 화려하다고 할 수 없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분명히 착상을 얻었을 것으로 보이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적 흐름의 계열인 표제가 붙은 낭만주의적 교향곡의 전형이기조차 한 만프레드에서처럼 매우 풍성할 수 있었다. 그의 교향곡은 멘델스존 이후의 독일 낭만파적 서법을 다시 격화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모든 새로움은 그에게는 무지의 표명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분명히 그의 세대에서는 가장 우수한 러시아인 교향곡 작곡가였다.
10곡의 오페라는 그 테마가 역사적인 것(오를레앙의 소녀)에서 심리극(에프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오페라에 대한 그의 공헌을 명시하고 있다. 무소르그스키의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바그너적 개념까지도 거절한 차이코프스키는 글린카식의 생각에 더 가까운 형식개념레치타티보에 의해서 맺어진 아리아와 앙상블의 연결을 선택했으나 그것은 시적이고 싶은 분위기 속에서였다. 레치타티보는 실제로 오페라의 중요한 몇 가지의 시간을 맺어주는 요소에 불과할 것이다.
(선율적 레치타티보라는 형태 위에 구축된 오페라는 음악이 없는 오페라이다).
한편, 스페이드의 여왕에는 카르멘의, 즉 음악이 이른바 끊임없이 대기하고 있는 작품의 영향의 흔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약간의 서정성이야말로 그가 얻은 성공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것은 지나가버린 향수, 즉 1850년대부터 1860년대에 걸친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 직후에 그의 오페라가 소시민적인 심성을 가졌다고 비난받았다는 사실은 뜻이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도 그의 발레음악에 관해서는 그런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백조의 호수[1875~76],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8~89], 호두까기인형[1891~92]).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가 레오 들리브에 이어서 발레음악 부흥을 위해서 힘을 쏟았고 디아길레프에 의해서 전위음악이 생기기 이전에 발레음악을 독립된 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이 된다.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러시아 작곡가. 보토킨스키 출생. 광산기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프랑스계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으며 피아노도 배웠다.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였고 52년 어머니를 잃은 뒤 독일 작곡가 R. 큔딩거에게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다. |
법률학교를 졸업한 뒤 법무부 공무원이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여, 61년 A. 루빈슈타인이 주재하는 러시아음악협회 음악교실(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으로 개편)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루빈슈타인과 N. 자렌바에게서 작곡을 배웠고 66년 1등으로 졸업하였다.
그 뒤 루빈슈타인의 동생 니콜라이가 교장으로 있는 모스크바음악원에 교수로 초빙되어, 음악이론과 작곡을 가르쳤고, 이 시기에 활발한 작곡활동을 하였다. <겨울날의 환상>이란 제목이 붙은 [교향곡 제 1 번 G단조(1866)]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1869)], 제 2 악장의 <안단테 칸타빌레>로 유명한 [현악 4중주곡 제 1 번(1871)], 소러시아 민요를 소재로 한 [교향곡 제 2 번 C단조(1872)], 웅대한 서주와 민요풍의 주제를 가진 [피아노협주곡 제 1 번(1874)], 피아노곡집 [사계(1875)] [슬라브행진곡(1876)], 환상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876)], 발레곡 [백조의 호수(1876)] 등의 걸작을 작곡하였으며, 특히 [백조의 호수]는 초연 때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후에 진가가 인정되어 발레의 고전으로 지금까지 널리 공연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비평가들로부터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애호가들과 청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77년 결혼에 실패하여 자살을 기도하였으며,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스위스에서 요양하던 중 알게 된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N. 폰 메크부인이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이로써 재정적 어려움 없이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메크부인에게 78년 작곡한 [교향곡 제4번 F단조]를 "우리들의 교향곡"이라 부르며 헌사하였다.
그 뒤 각지로 여행하면서 가극 [예브게니 오네긴(1877)], 깊은 정감과 러시아적 애수로 유명한 [바이올린협주곡(1878)], [이탈리아기상곡(奇想曲)(1879)], B.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묘사한 [1812년 서곡(1880)]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바이올린협주곡]으로 명성을 세계에 떨쳤다. 그러나 이 작품도 비평가들의 신랄한 비판을 받는 등 그의 독창적인 작품에 대한 일부의 비난은 매우 가혹하여 그는 많은 고민과 함께 더욱 고립적인 성격이 되어갔다. 85년 모스크바 교외에 주거를 정하고 창작에 몰두하였으며, 자신의 작품 지휘도 자주 맡았다.
이 시기에 작곡한 작품은 교향곡 [만프레드(1885)], [관현악모음곡 제 4 번(모차르티아나, 1887)], 환상서곡 [햄릿(1888)], [교향곡 제 5 번 E단조(1888)],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가극 [스페이드의 여왕(1890)],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1891)], <비창>이라는 부제로 널리 알려진 [교향곡 제 6 번 B단조(1893)] 등이며 특히 <비창>은 그 스스로가 최고 작품으로 인정하였는데, 곡이 가지는 절망적인 어두움은 자신의 삶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88년 이후 작곡활동과 함께 함부르크·베를린·프라하·파리·런던 등을 순회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였고, 91년 미국에서도 연주여행을 하였다.
이미 1890년에 메크부인의 지원은 끊어졌지만 세계적인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93년 5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 [교향곡 제 6 번]을 완성하였고, 그 초연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으나 그곳에서 콜레라로 급사하였다. 서유럽 낭만파음악의 정신과 기교를 도입하여 러시아민요의 표현 방법을 조화시켜, 넘치는 열정과 비장하며 극적인 내용, 감미롭고 우아한 서정성, 명쾌한 구성 및 교묘한 악기 용법의 많은 명곡을 남겼다. 가극 11, 발레곡 3, 연극용 5, 관현악곡 38, 현악곡 2, 협주곡 12, 실내악 17, 바이올린곡 5, 피아노곡 110, 합창곡 23, 이중창곡 6, 독창곡 106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연표
AD | 1840 | 보토킨스키에서 출생 | ||||
1854 | 어머니 A. 안드레에브나 죽음. 이 무렵부터 음악에 전념함 | |||||
1859 | 페테르부르크법률학교 졸업. 법무성 9등문관이 됨 | |||||
1862 |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입학 | |||||
1863 | 법무성 사직 | |||||
1866 |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졸업. 교향곡 제 1 번 《겨울날의 환상》.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됨 | |||||
1868 | 비평활동 시작. M.A. 발라키레프가 이끄는 작곡가집단 <힘찬 한 무리>와 교우 시작 | |||||
1869 | 오페라 <운디네>, 환상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 |||||
1871 | 현악 4중주곡 제 1 번 | |||||
1873 | 극음악 《눈아가씨》, 환상서곡 《템페스트》 | |||||
1875 | 피아노협주곡 제 1 번, 교향곡 제 3 번 | |||||
1876 | 발레곡 《백조의 호수》. N. 폰 메크부인과 서신왕래 시작 | |||||
1877 | 제자 안토니나와 결혼. 교향곡 제 4 번,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 |||||
1878 | 바이올린협주곡, 가곡집(작품 38), 모스크바음악원 사퇴 | |||||
1879 | 오페라 《오를레앙의 소녀》 | |||||
1880 | 《1812년 서곡》 | |||||
1882 | N. 루빈슈타인의 죽음에 즈음하여 피아노 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작곡 | |||||
1883 | 대관식칸타타 《모스크바》, 오페라 《마제파》 | |||||
1884 | 성 우라지미르훈장 받음 | |||||
1885 | 오페라 《체레비치키》, 교향곡 《만프레드》 | |||||
1887 | 오페라 《마녀》, 관현악 모음곡 제 4 번 《모차르티아나》. 지휘자로 유럽연주여행 | |||||
1888 | 교향곡 제 5 번 | |||||
1889 | 제 2 회 유럽연주여행.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 | |||||
1890 |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 | |||||
1891 | 카네기홀 개관공연에 출연. 오페라 《이오란타》,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 | |||||
1893 |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음악명예박사학위 받음. 교향곡 제 6 번 《비창》. 페테르부르크에서 《비창》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 | |||||
11월 6일 페테르부르크에서 53세로 죽음 | ||||||
Pyotr Il'ich Tchaikovskii (1840∼1893)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원장으로 있던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에 임명(1866~77)됨으로써 그의 재정적 문제는 해소되었다. 그리고 교수가 된 그에게는 1867년에 두 번째의 러시아 여행을 하고 있었던 베를리오즈를 공적으로 영접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1868년에 〈5인조〉 그룹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가 가령 발라키레프에게 공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대한 어떤 불신감과 또 그와는 성격이 달랐던 무소르그스키에 대한 솔직한 적의적 감정은 단 한 차례도 버린 적이 없었다.
더욱이 그의 눈 아가씨에서의 차용은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동명의 작품에서 한 옮김보다는 더 존중될 만한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차이코프스키는 〈5인조〉와의 관련에 의해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서구를 향해서 눈을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친구들에게는 러시아적 주제를 부여하고 있으면서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서구적 주제를 부과한 스타소프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템페스트, 교향곡 "만프레드" 등의 작품은 스타소프가 그에게 매우 세밀한 초고에서조차 시사를 준 것이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칸틸레나와 선율에서조차 어떤 우울성과 결부된 매우 근원적인 러시아적 특징을 길러나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는 러시아인이다. 뼛속까지도 러시아인이다라고 그는 어느 날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1875년 이후 그는 음악상 교제관계의 발을 넓히게 되었다. 생상과 우정을 맺었고 리스트, 그를 열광시킨 카르멘의 작곡자인 비제, 그리고 마스네와도 교제했다. 그는 바이로이트로 가는 여행길에 바그너와 만나기를 시도했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876년은 중요한 이른바 열쇠가 되는 해였다. 왜냐하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덕택으로 부호 폰 메크 von Meck 부인(1879년에는 외동딸을 위해서 피아노 교사로 드뷔시를 고용했다)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은 없었으나(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조언자인 동시에 후원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교제가 계속된 14년간 계속된 그들의 열렬한 편지의 왕래는 우리에게 기묘한 〈목가적 순애〉의 흔적을 하나씩 더듬을 수 있게 해준다. 그녀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을 정기적으로 보내준 덕택으로 그는 모든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그때 가르친다는 의무에서 벗어났고, 실패로 끝난 결혼(1877) 후에는 여행과 사교생활(클라렌스, 파리,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 산레모)에 대한 어떤 취미를 찾아냈다. 이 시기는 그의 위대한 창작의 시기였다.
표현상의 진실에 대한 배려, 즉 단순한 동시에 성실하다는 배려가 차이코프스키에게 있어서는 그의 교향곡과 오페라 작품이 가지는 근원적인-유일하다고 해도 좋을-주제와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인간의 운명, 인간이 그 운명을 지배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야기되는 투쟁과 그 좌절이 주제이다. 사실상 교향적 환상곡 운명(1868), 그의 최후의 교향곡 3곡, 그리고 비창의 최종악장을 구성하고 운명을 앞에 놓고 인간의 패배에 바쳐진 저 장송미사 등을 어찌 달리 해석할 수 있겠는가? 또 렌스키, 헤르만, 잔다르크와 같은 인물들도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속에는 비극적인 것과 거의 병적인 관대성, 그리고 기만성을 수반한 인간의 여러 가지 정념을 표현하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은 거기에 속지 않았다(나는 얼마나 늙은 울보인가!). 그러나 음악 속에서 유일하고 가치있는 위로를 찾아냈던 것은 확실하며, 이 과도적인 낭만주의적 경향 속에서 폰 메크 부인은 그의 여러 가지의 실망과 열망에 대한 반응을 찾지 못했는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가곡이 〈영혼의 상태 état d'ame〉를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그에게 있어서 교향곡이란 〈영혼의 음악적 고백〉, 즉 그의 심정의 토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단순하게 목적이 없는 음의 장난에 불과한 음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식의 틀이 큰 쪽이 그에게는 적합했던 것이다. 틀이 클수록 그의 특징이 되는 긴 멜로디와 장대하고 장식적인 주선율을 충분히 전개시킬 수 있을 것이고 또 지극히 자연스러운 대규모적인 전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현악기를 추구했고 결코 음량을 올리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의 교향곡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것보다 화려하다고 할 수 없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분명히 착상을 얻었을 것으로 보이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적 흐름의 계열인 표제가 붙은 낭만주의적 교향곡의 전형이기조차 한 만프레드에서처럼 매우 풍성할 수 있었다. 그의 교향곡은 멘델스존 이후의 독일 낭만파적 서법을 다시 격화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모든 새로움은 그에게는 무지의 표명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분명히 그의 세대에서는 가장 우수한 러시아인 교향곡 작곡가였다.
10곡의 오페라는 그 테마가 역사적인 것(오를레앙의 소녀)에서 심리극(에프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오페라에 대한 그의 공헌을 명시하고 있다. 무소르그스키의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바그너적 개념까지도 거절한 차이코프스키는 글린카식의 생각에 더 가까운 형식개념레치타티보에 의해서 맺어진 아리아와 앙상블의 연결을 선택했으나 그것은 시적이고 싶은 분위기 속에서였다. 레치타티보는 실제로 오페라의 중요한 몇 가지의 시간을 맺어주는 요소에 불과할 것이다.
(선율적 레치타티보라는 형태 위에 구축된 오페라는 음악이 없는 오페라이다).
한편, 스페이드의 여왕에는 카르멘의, 즉 음악이 이른바 끊임없이 대기하고 있는 작품의 영향의 흔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약간의 서정성이야말로 그가 얻은 성공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것은 지나가버린 향수, 즉 1850년대부터 1860년대에 걸친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 직후에 그의 오페라가 소시민적인 심성을 가졌다고 비난받았다는 사실은 뜻이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도 그의 발레음악에 관해서는 그런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백조의 호수[1875~76],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8~89], 호두까기인형[1891~92]).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가 레오 들리브에 이어서 발레음악 부흥을 위해서 힘을 쏟았고 디아길레프에 의해서 전위음악이 생기기 이전에 발레음악을 독립된 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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