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공간/음악이 있는곳(팝송,클라식,째즈,가요, 동요...)

베토벤 / 독일 작곡가. 본 출생

힐링&바이블센터 2008. 2. 7. 11:33
Ludwig van Beethoven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Ludwig van Beethoven
독일 작곡가. 본 출생.

최성기의 고전파에서 초기낭만파에의 전환기에 56세의 생애를 보낸 베토벤은 고전파 음악양식을 최고 정상까지 높이는 동시에 19세기 음악가들의 우상적 존재가 되었으며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서곡 에그몬트 (Egmont Overture, Op.84)

생애

그의 조부 루트비히는 플랑드르에서 이주한 본의 궁정악장이었고, 아버지 요한은 본의 궁정가수였으며, 어머니 마크달레나는 궁정요리장의 딸이며 궁정의 심부름꾼으로 미망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1770년 베토벤이 태어났다. 그의 세례일은 70년 12월 17일로 되어 있으나 명확한 출생일은 알 수 없다.

플랑드르의 중후한 기질, 독일의 엄격한 논리, 라인지방의 희노애락이 심한 감정, 그리고 제2의 고향이 되는 빈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베토벤음악의 배경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피아노 기초를 배웠고 7세 때 연주회에서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여 풍부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소년시절 본에서 아버지를 비롯하여 몇 사람의 음악가로부터 개인교수를 받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10세 때부터 베토벤을 가르친 C.G. 네페였다.

제2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라고 그의 재능을 절찬한 네페는 J.S. 바흐와 C.P.E. 바흐의 작품을 가르쳤다. 11세 때 최초의 작품을 출판한 베토벤은 오르간과 피아노 연주가로서도 활동하였다. 16세 때 그는 모차르트를 동경하여 빈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어머니의 급병 소식을 듣고 본으로 되돌아왔다. 어머니의 죽음은 주벽이 심해진 아버지를 폐인으로 만들었고, 베토벤에게 집안 생계를 맡기는 결과가 되었다.

실의에 찬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은 브로이닝가(家)의 따뜻한 분위기였으며 그 집 딸 엘레오노라는 베토벤의 첫 애인이 된다. 그의 후원자가 되는 발트슈타인백작도 87년에 본으로 부임하여 물심양면으로 베토벤을 도와준다. 92년 본을 방문한 F.J. 하이든에게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은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자가 되려고 21세 때 빈으로 떠난다. 92년 빈에 도착하여 하이든·J. 센크·J.G. 알브레히츠베르거 밑에서 먼저 작곡기법을 배우는 동시에 피아노의 명수로서 귀족들 사이에서 점차 높은 평판을 얻게 된다.

빈 생활 3년째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자작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여 데뷔하였고, 작곡가로서는 [피아노 3중주곡집]을 출판하였다. 96년에는 보헤미아와 독일에 연주여행을 하는 등, 연주·작곡 양면에서 순조롭게 성장하여 1800년에는 그 자신의 연주회를 빈에서 열고 교향곡 제1번을 초연하였다. 이듬해에는 J. 구이차르디와 사랑에 빠져 피아노소나타 [월광]을 작곡하였고, 27세 무렵부터 느꼈던 난청이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귓병으로 악화되자, 1802년에는 자살까지 결심하였다. 그러나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계기로 교향곡 제3번 [영웅], 교향곡 제5번 [운명], 오페라 [피델리오] 등 수많은 걸작을 계속 작곡하게 되었다.

1808년에 베스트팔렌국왕이 카셀궁전에서 악장으로 초빙하자 좋은 경제적 조건 때문에 그는 카셀로 가려는 결심을 굳힌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사랑하고, 재능을 존경하는 루돌프대공을 비롯한 빈의 세 귀족들은 연금을 서로 출자하여 베토벤을 평생 오스트리아에 머물러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1809년부터 12년까지의 시기에는 피아노협주곡 제5번 [황제], 피아노 3중주곡 [대공],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등 다채로운 작품을 작곡하였다.

13년부터 16년까지는 사랑편지 [내 불멸의 애인이여]의 상대방인 브렌타노부인과의 비극적인 사랑 때문에 그의 자주적 작곡활동은 침체하였으나, 17년에는 [전쟁교향곡]과 오페라 [피델리오]의 상연이 빈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8년부터 청각을 거의 잃은 그는 필담(筆談)에 의해 생활해 가면서도 피아노 소나타 [하머클라비어]를 비롯해 후기의 걸작군을 창작해 갔다. 베토벤음악의 총결산인 교향곡 제9번 [합창]은 24년 5월 7일 빈의 쾰른트나투르극장에서 8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 4명의 독창자, 약 100명의 합창에 의해 초연되었다. 26년 12월부터 간경변 때문에 수술을 되풀이했으나, 27년 3월 23일에는 죽음을 깨닫고 유서를 썼다. 3월 26일 그는 56세의 나이로 생애를 끝마쳤다.

음악
그의 작품은 양식변천에 따라 다음 4기로 구분한다. 그 자신이 작품번호를 붙인 빈 시절의 양식변천은 9곡의 교향곡, 32곡의 피아노소나타, 16곡의 현악 4 중주곡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교향곡에서는 홀수번호와 짝수번호의 작품이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것처럼, 독일적 음악과 오스트리아적 음악이 혼재해 있는 것도 그의 음악의 특징이다. 그리고 WO라는 번호는 G.L. 킨스키와 A. 할름이 1955년에 [베토벤작품목록]을 편찬할 때 베토벤 자신의 작품번호가 붙어 있지 않은 곡에 붙인 번호이다.

(1) 본 시절(1782∼92)
본에서 접촉하고 배운 여러 가지 양식을 짙게 반영한 학습시절이다. 건반악기를 위한 3개의 선제후(選帝侯)소나타(W O47, 1783)는 C.P.E. 바흐와 만하임악파의 영향과 함께 그의 독자성도 나타나 있다. 모차르트에 대한 그의 찬미는 3개의 클라비어 4 중주곡(W O36, 1785)에 나타나 있다.

(2) 빈 초기(1793∼1802)
개인교수에 의한 대위법 학습으로 시작되는 이 시기는 고전파 기악양식을 습득·발전·실험함으로써 그의 독자적 양식이 차츰 선명하게 나타난 시절이다. [피아노 3 중주곡집(작품1, 1794∼95)]과 [피아노 소나타집(작품2, 1793∼95)]에서 4악장 구성, 소나타형식의 확대, 스케르초 사용 등, 베토벤의 새로운 면이 나타나 있다. [현악4중주곡집(작품18, 1798∼1800)]에서는 대위법적 수법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있다. 그 밖에 교향곡 제 1 번과 제 2 번, 피아노소나타 [비창], 피아노협주곡 제1번과 제2번이 이 시기에 속한다.

(3) 빈 중기(1803∼12)
그가 쌓아올린 극히 논리적 형식 속에서 감정의 흐름을 극적으로 전개하는 새로운 양식에 의하여 이 시기에 걸작이 속출되었다. 교향곡 제3번 [영웅]부터 제6번 [전원]에 이르는 4곡의 교향곡, [코리올란서곡], 피아노협주곡 제 4 번, 바이올린협주곡, [라주모프스키현악 4 중주곡집], 오페라 [피델리오] 등이 1808년까지 탄생되었다. 1809년 이후, 구축적인 주제의 전개를 중심으로 한 양식에서, 피아노 3 중주곡 [대공(작품97, 1810∼11)]에서 보여준 것처럼 선율적 주제에 의한 서정적 양식으로 변해갔다. 한편 교향곡 제 7 번(작품92, 1811∼12)과 제 8 번(작품93, 1812)에서는 리듬이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4) 빈 후기(1813∼26)
작품의 침체기가 되는 1813년부터 16년까지의 시기는 가곡집 [멀리있는 애인에게(작품98, 1815∼16)]를 비롯하여 기악작품에서도 낭만파적 색채가 강해지는데, 17년에 착수한 피아노소나타 [하머클라비어(작품106, 1818년 완성)]를 출발점으로 다시 거대한 형식으로 되돌아가 후기양식의 정상으로 올라선다.

후기양식의 뚜렷한 특색은 푸가로 대표되는 대위법적 수법 및 변주기법을 중요시한 것이며, 시대를 초월한 다채로운 울림의 세계를 창조해갔다. 성악과 기악이 일체화된 [장엄미사곡]과 교향곡 제 9 번, 피아노소나타(작품106, 109, 110, 111) 4곡과 [디아벨리변주곡], 현악 4 중주곡(작품127, 130, 131, 132, 135)의 5곡과 대(大)푸가는 바로크시대부터 최성기 고전파에 이르는 음악을 베토벤이 총결산한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연표
AD 1770 본에서 출생
1776 아버지 요한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함
1778 쾰른, 피아니스트로 공개연주회에 첫출연
1781 C.G. 네페가 본의 궁정오르가니스트에 취임. 네페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움
1782 이 무렵부터 네페 부재시에 대리오르가니스트를 맡음. 최초의 피아노 작품 《드레슬러의 행진곡에 의한 9개의 변주곡》을 만하임에서 출판
1783 《클라비어를 위한 3개의 선제후 소나타》출판.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함
1784 본의 궁정 오르가니스트 조수에 취임
1787 제 1 회 빈여행. 빈에서 W.A. 모차르트를 방문하고 즉흥연주를 함. 어머니 위독 소식을 듣고 본으로 돌아감. 어머니 마리아 죽음
1788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 됨. 브로이닝 집안의 딸 엘레오노라와의 첫사랑
1789 본대학 입학. J.C.F. 실러·J.W. 괴테의 사상에 관심을 가짐
1792 F.J. 하이든이 본을 방문, 하이든의 제자가 됨. 빈에서 하이든에게 작곡을 배움. 아버지 요한 죽음
1793 J. 센크에게 작곡을 배움
1794 J.G. 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 작곡을 배움
1795 빈에서 자작 피아노협주곡 제 2 번을 연주
1798 이 무렵부터 난청 징조가 나타남
1799 피아노소나타《비창》출판
1800 자신 주최의 첫 연주회를 열고 피아노협주곡 제 1 번, 7중주곡, 교향곡 제 1 번 등을 연주지도함
1801 J. 구이차르디에게 피아노소나타《월광》헌정
1802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1804 교향곡 제 3 번《영웅》. 다임백작 미망인 요제피네와 사랑에 빠짐
1805 빈에서 오페라 《피델리오》 초연. 피아노소나타 《열정》
1806 클레멘토 주최의 음악회(빈)에서 바이올린협주곡 초연
1808 카셀궁정의 베스트팔렌국왕으로부터 악장으로 초빙되어 궁정행을 결심. 빈에서 교향곡 제 5 번《운명》, 교향곡 제 6 번《전원》,《합창환상곡》 초연
1809 카셀행 승낙 회답을 썼으나, 빈의 귀족들로부터 연금을 받게 되어 빈에 머무름. 피아노협주곡 제 5 번《황제》
1810 애인 T. 마르파티를 위하여《엘리제를 위하여》작곡
1811 피아노 3중주곡《대공(大公)
1812 《내 불멸의 애인이여》를 A. 브렌타노부인 앞으로 씀. 이 무렵, 전후 4번에 걸쳐 괴테와 만남
1815 동생 카를 죽음. 이후 그의 아들 카를의 후견문제로 고민함
1818 청각을 거의 잃고 회화(會話)도 자유롭지 못하게 됨. 피아노소나타《하머 클라비어》
1824 페테르스부르크에서《장엄미사곡》초연. 빈의 쾰른트나투르극장에서《장엄미사곡(1부)》과 교향곡 제 9 번《합창》초연
1825 빈 악우협회(樂友協會)의 명예회원이 됨
1826 현악 4중주곡(작품 130) 초연. 병상악화
1827 3월 26일 죽음. 벨링묘지에 안장됨
1888 빈 중앙묘지로 이장됨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본에서 태어나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고전주의 음악의 최후의 그리고 고금을 통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베토벤'의 음악이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인류의 정신 문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음악사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에서도 '베토벤'은 드물게 보는 역사의 창조자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위대한 업적을 우리 인류문화에 남겨준 음악가라고 하겠다.

오늘날 온 인류가 '베토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정신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악성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우리 인류의 공통된 철할 세계를 추구하고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곧 그의 사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생활의 반영이다. 따라서 그 의 전 작품은 '베토벤'의 전 생애를 장식한 그의 역사인 동시에 그의 인간과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베토벤'의 생애를 불행한 일생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상 '베토벤'처럼 고르지 못한 환경에서 일생을 보낸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가난했다거나 귀머거리가 되었다거나,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거나 하는 것으로만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생이 오직 인간의 공통된 운명과 대결하고 그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끝냈다는 심각한 정신 환경이 더욱 불행했을지 모른다. '베토벤'은 서부 독일의 본 시에서 태어나 그가 22세 때 비 인으로 가기까지 어린 시절을 여기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선제후 예배당의 가수로 있었으나 성질이 난폭하고 대단한 술꾼이여서 가정이 평온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족환경에서 자라난 베토벤은 서너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 이론을 아버지의 가혹한 지도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그는 궁정 오르간주자인 에덴을 비롯 파이퍼 그리고 네에페에게 지도를 받아 일곱 살 때 공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었고, 열살 때에는 벌써 작곡을 하기 시작하여 천재적인 재능과 역량을 일찍부터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여러곳으로 순회연주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였고 자신의 기술도 닦아서 더욱 천분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술에 빠진 아버지가 나태한 탓으로 집안 신구들은 어린 '베토벤'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 뒤 17살 때에는 선량한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9세때에는 아버지가 실직하는 바람에 가족은 더욱 어려워지고, 베토벤이 동생들을 데리고 생활을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경에서도 그는 꾸준히 연구와 작곡에 정진하였다. 7세때에는 비인을 방문하여 모차르트를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22살때에 아버지마 저 여의게 되어 온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도 지게 되었다. 그 후 비인으로 옮겨 귀족사회에도 출입하면서 피아노 연주가로 활약하였다.

1796년경 즉, 26살 때부터는 작곡도 인정을 받아 음악계에 확고한 지위를 잡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에게는 치명적인 운명이 닥쳐왔다. 그가 28살 때 귓병을 앓아 청각을 점차 잃게 되었다. 32살때에는 절망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베토벤'은 자결을 결심하고 비인 교외인 하이리겐시타트에서 유서를 쓰게 되나, 다시 생각을 돌리고 "나에게 신으로부터 내린 모든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죽어서는 안된다." 하고 결심한 그는 그 가혹한 운명과 싸우면서 작곡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와같이 베토벤은 가족적으로나 일신상으로나 불행이 겹친 데다가 빈곤과 고난과 번민속에 살아 나왔고, 한편 이를 극복하고 그의 예술을 창조한 것이다. '베토벤'은 남달리 인간애가 풍부하였고 고독과 절망에서도 항시 환희와 희열로써 곤경을 극복해 갔다. '베토벤'은 또한 풍부한 감수성과 자유분방한 개성, 섬세한 감정과 생활의식 등을 내재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자기 사생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언제나 현대적이고 역사적인 인류개혁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귓병과 빈곤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현대를 의식하고 전 인류적인 인생관과 사고를 음악적 창작에 결부시켰다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창작활동의 이념은 개인적인 감각이나 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통하는 고민과 희열이 그것이다. 그의 예술의 특징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환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보편성에 있다고 본 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본다면 선배인 하이든, 모차르트의 뒤를 이어 고전음악의 주요소인 형식을 한층 확장 완성 시켰고, 연주양식의 개척과 작곡 수법이나 관현악법에 있어서도 결정 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가장 특징인 자주성과 개성의 확립을 꾀하였고, 진취적이고 과감한 태도로써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세에 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