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egfried Idyll, WWV103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http://lwy.hyosung.daegu.kr/Siegfried-1.jpg)
독일 낭만파 작곡가 바그너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관현악곡 "지그프리트의 목가(牧歌) [Siegfried Idyll]" E장조 4/4박자 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곡은 대단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순수한 기악곡으로 걸작 중의 하나입니다. 이 곡을 끝까지 한 번 감상해 보시면, 제가 여러분께 자신있게 소개해 드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또하나의 명곡이라는 것을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조용하고 우아하게 현악기들의 하모니로 시작하여, 먼 산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같은 혼, 클라리넷, 오보에 등 관악기들의 조화에 시원한 바람을 타고 흐르는 들꽃들의 향기같은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푸른 평화와 새하얀 상쾌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꼭 음악애호가들이 아니라도 독일의 대표적 음악가 바그너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제목만으로도 유명한 그의 이 아름다운 음악을 소개드리기 위해서 사실 많은 고심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소개를 위해 벌써부터 계속해서 감상求?이 음악에 들을수록 매력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주저되던 것은 그가 독일인 반유태주의자였다는 세상의 평가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유태인 쪽에서 편향된 시각으로 바그너를 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어떤 이유로든 다른 민족을 폄하하거나 박해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물론, 나찌에 의해 유태인들의 집단학살이 자행되는 세계대전 시기는 바그너 사후 한참 뒤의 일입니다만 그런 잘못된 가치관과 사고를 가지고 반유태주의 운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음악사적인 위치와는 아주 상반되는 것이지요. 그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치관은 분명히 히틀러와 같은 바로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을테니까요. 지난해인가 이스라엘 국립교향악단 `리숀 레치온'이 바그너의 "지그프리트의 목가(牧歌)"를 연주하였다는데, 이는 이스라엘 재건국 이래 처음으로 반유태주의자의 곡을 공식 연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없이 망설이면서도 제가 이 곡 "지그프리트의 목가(牧歌)"에서 완전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것은 바그너의 이 음악이 가진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지금도 이 음악을 감상하고 있습니다만, 넓고 푸른 초원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목동들의 노래가 몇 달 동안의 저의 망설임을 기어코 잠재우고 만 것이랍니다. 바그너는 적극적이고 경쟁심이 강하고 공격적 경향으로 성급하면서도 격렬하고 돌발적인 말투를 가진 대신 책임감이 강하고 정력적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대신 바그너의 음악관이나 예술관은 항상 일관해 있다고 하는데, 그 주가 되는 테마는 사랑과 죽음의 신비, 헌신과 속죄의 신비이며 일관해서 인간적인 실존을 갖고 있는 원시적인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9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그너는 태어난지 6개월 후에 아버지를 잃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가수, 시인, 화가였던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런 이유로 바그너는 어린 시절 계부 가이어의 예술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바그너는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생존 중에 가이어와 통정해서 생긴 아이가 바로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젊은 생(生)에 있었던 또하나의 안타까운 일은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습니다. 바그너가 23세에 결혼한 최초의 아내인 여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는 신혼 7개월만에 애인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는데, 당시 그가 도망친 아내를 쫓아갔으나 허사였다고 합니다. 그 후 민나는 잘못을 뉘우치고 되돌아 왔지만 두 사람 사이에 깊은 틈이 벌어져 버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어릴때부터 청년시대의 사건들이 그의 성격이나 생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두 사람은 1839년 9월에 런던을 거쳐 파리로 향하는데, 이 때부터 1842년까지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바그너에게 정신적인 고통은 물론,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준 시기였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 문학적 그리고 음악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고 평가됩니다. 다시 말해서 바그너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리스트(Franz Liszt)와의 만남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음악적 삶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그너는 우선 미완성된 《리엔치》를 1840년에 파리에서 완성하고, 1841년에는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만들어진 낭만적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 Der fliegende Hollander》을 작곡합니다.
바그너에 관해서 빠뜨릴 수 없는 일은, 그의 스폰서가 되었던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와의 관계라고 합니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습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혁명'은 다음 해 독일 드레스덴에도 파급됩니다. 바그너는 왕정을 폐지하고자 하는 혁명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바그너는 지명수배되었고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게 됩니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한 그는 리스트(Franz Liszt)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가게 되는데 그의 작품《베젠동크 가곡집》과 악극(樂劇)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는 바로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 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담아 승화시킨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10세 때 바그너의 저작 오페라를 듣고 이미 바그너에 사로잡힌 바 있던 바이에른의 새국왕 루드비히 2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18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최초에 그가 한 일이 바로 유랑의 신세였던 바그너를 뮌헨으로 맞이하는 일이었고, 이후 바그너는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작곡에도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그너의 삶에 또하나의 큰 사건이 있게됩니다. 1857년, 당시 유명한 지휘자였던 뷜로우(Hans von Bulow)가 아름다운 부인 코지마(Cosima)와 함께 결혼 기념여행 중 바그너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코지마(Cosima)는 바로 리스트(Listz)의 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후에 그들은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그의 전처 민나는 1866에 이미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바그너와 코지마와의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나이 56세 때인 1869년 6월에 출생한 장남 지그프리트는 바로 이 아름다운 음악의 주인공이자 훗날 아버지의 음악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됩니다. 바그너의 관현악곡 "지그프리트의 목가(牧歌) [Siegfried Idyll]" 는 바로 아름다운 아내에게서 얻은 사랑스런 아들 지그프리트를 위해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1870년 작곡되어 같은해 아들을 낳은 뒤 뒤늦게 결혼한 아내 코지마에게 아들의 생일선물로 연주되었습니다. 총연주 시간이 20분도 채 안되는 소품이지만 목가적인 정서를 노래한 바그너의 걸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명(題名) 지그프리트는 아들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드레스덴 혁명'이니 '반유태주의'니 '나치즘'이니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목가(牧歌)를 창조한 아버지의 순수함을 찾으시면 푸르른 들판에 흐르는 목가적 전원풍경도 여러분의 눈 앞에 환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이 곡의 총연주시간이 18분 36초 정도이니 가볍게 들으시기에는 결코 짧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도 한 잔 준비하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바그너의 이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합니다.
글출처: 이원영수채화갤러리 / 음원출처: 향기로운 삶의쉼터
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
![](http://lwy.hyosung.daegu.kr/Siegfried-1.jpg)
독일 낭만파 작곡가 바그너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관현악곡 "지그프리트의 목가(牧歌) [Siegfried Idyll]" E장조 4/4박자 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곡은 대단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순수한 기악곡으로 걸작 중의 하나입니다. 이 곡을 끝까지 한 번 감상해 보시면, 제가 여러분께 자신있게 소개해 드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또하나의 명곡이라는 것을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조용하고 우아하게 현악기들의 하모니로 시작하여, 먼 산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같은 혼, 클라리넷, 오보에 등 관악기들의 조화에 시원한 바람을 타고 흐르는 들꽃들의 향기같은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푸른 평화와 새하얀 상쾌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물론, 나찌에 의해 유태인들의 집단학살이 자행되는 세계대전 시기는 바그너 사후 한참 뒤의 일입니다만 그런 잘못된 가치관과 사고를 가지고 반유태주의 운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음악사적인 위치와는 아주 상반되는 것이지요. 그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치관은 분명히 히틀러와 같은 바로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을테니까요. 지난해인가 이스라엘 국립교향악단 `리숀 레치온'이 바그너의 "지그프리트의 목가(牧歌)"를 연주하였다는데, 이는 이스라엘 재건국 이래 처음으로 반유태주의자의 곡을 공식 연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없이 망설이면서도 제가 이 곡 "지그프리트의 목가(牧歌)"에서 완전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것은 바그너의 이 음악이 가진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지금도 이 음악을 감상하고 있습니다만, 넓고 푸른 초원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목동들의 노래가 몇 달 동안의 저의 망설임을 기어코 잠재우고 만 것이랍니다. 바그너는 적극적이고 경쟁심이 강하고 공격적 경향으로 성급하면서도 격렬하고 돌발적인 말투를 가진 대신 책임감이 강하고 정력적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대신 바그너의 음악관이나 예술관은 항상 일관해 있다고 하는데, 그 주가 되는 테마는 사랑과 죽음의 신비, 헌신과 속죄의 신비이며 일관해서 인간적인 실존을 갖고 있는 원시적인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9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그너는 태어난지 6개월 후에 아버지를 잃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가수, 시인, 화가였던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런 이유로 바그너는 어린 시절 계부 가이어의 예술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바그너는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생존 중에 가이어와 통정해서 생긴 아이가 바로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젊은 생(生)에 있었던 또하나의 안타까운 일은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습니다. 바그너가 23세에 결혼한 최초의 아내인 여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는 신혼 7개월만에 애인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는데, 당시 그가 도망친 아내를 쫓아갔으나 허사였다고 합니다. 그 후 민나는 잘못을 뉘우치고 되돌아 왔지만 두 사람 사이에 깊은 틈이 벌어져 버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어릴때부터 청년시대의 사건들이 그의 성격이나 생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두 사람은 1839년 9월에 런던을 거쳐 파리로 향하는데, 이 때부터 1842년까지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바그너에게 정신적인 고통은 물론,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준 시기였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 문학적 그리고 음악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고 평가됩니다. 다시 말해서 바그너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리스트(Franz Liszt)와의 만남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음악적 삶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그너는 우선 미완성된 《리엔치》를 1840년에 파리에서 완성하고, 1841년에는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만들어진 낭만적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 Der fliegende Hollander》을 작곡합니다.
바그너에 관해서 빠뜨릴 수 없는 일은, 그의 스폰서가 되었던 바이에른 국왕 루드비히 2세와의 관계라고 합니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습니다. 184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혁명'은 다음 해 독일 드레스덴에도 파급됩니다. 바그너는 왕정을 폐지하고자 하는 혁명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바그너는 지명수배되었고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게 됩니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한 그는 리스트(Franz Liszt)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가게 되는데 그의 작품《베젠동크 가곡집》과 악극(樂劇)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는 바로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 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담아 승화시킨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10세 때 바그너의 저작 오페라를 듣고 이미 바그너에 사로잡힌 바 있던 바이에른의 새국왕 루드비히 2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18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최초에 그가 한 일이 바로 유랑의 신세였던 바그너를 뮌헨으로 맞이하는 일이었고, 이후 바그너는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작곡에도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그너의 삶에 또하나의 큰 사건이 있게됩니다. 1857년, 당시 유명한 지휘자였던 뷜로우(Hans von Bulow)가 아름다운 부인 코지마(Cosima)와 함께 결혼 기념여행 중 바그너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코지마(Cosima)는 바로 리스트(Listz)의 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후에 그들은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그의 전처 민나는 1866에 이미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바그너와 코지마와의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나이 56세 때인 1869년 6월에 출생한 장남 지그프리트는 바로 이 아름다운 음악의 주인공이자 훗날 아버지의 음악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됩니다. 바그너의 관현악곡 "지그프리트의 목가(牧歌) [Siegfried Idyll]" 는 바로 아름다운 아내에게서 얻은 사랑스런 아들 지그프리트를 위해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순수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1870년 작곡되어 같은해 아들을 낳은 뒤 뒤늦게 결혼한 아내 코지마에게 아들의 생일선물로 연주되었습니다. 총연주 시간이 20분도 채 안되는 소품이지만 목가적인 정서를 노래한 바그너의 걸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명(題名) 지그프리트는 아들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드레스덴 혁명'이니 '반유태주의'니 '나치즘'이니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목가(牧歌)를 창조한 아버지의 순수함을 찾으시면 푸르른 들판에 흐르는 목가적 전원풍경도 여러분의 눈 앞에 환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이 곡의 총연주시간이 18분 36초 정도이니 가볍게 들으시기에는 결코 짧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도 한 잔 준비하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바그너의 이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합니다.
글출처: 이원영수채화갤러리 / 음원출처: 향기로운 삶의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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