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ín Dvorák
Antonín Dvorák [1841∼1904]
드보르자크의 이름이 비평가의 주목을 끌게 된 최초의 작품은 민족적인 제재를 다룬 애국시 [백산(白山)의 후계자들]에 의한 합창찬가로서, 이것은 73년에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74년 성 아다르베르트교회의 오르간주자가 되었고, 단막 오페라 [완고한 자들]로 가설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생활은 여전히 궁핍하여 이 해부터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해마다 작품을 제출하였다.
그러던 중 77년 심사위원인 J. 브람스에게 높이 평가되어 베를린출판사에서 작품이 출판되고 그의 이름도 국내외로 퍼지게 되어 이 때부터 지휘활동도 시작하였다. 84년부터 9회에 걸친 영국 방문에서 대환영을 받았으며, 91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92년 뉴욕내셔널음악원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원 원장 및 작곡교수로 있었으며 이때 아메리카대륙에서 받은 강한 인상은 교향곡 제9번 [신세계]와 첼로협주곡 등의 걸작을 낳았다.
95년 귀국하여 프라하음악원 작곡교수가 되었으며, 그 뒤 교향시와 오페라 작곡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1901년 오스트리아 종신 상원의원으로 추대되었으며, 프라하음악원 원장에 취임하는 등 많은 영예를 얻었으나 1904년 5월 1일 신장병으로 사망하였다.
드보르자크는 슈베르트와 비견되는 다작(多作)의 천재로서 샘솟는 듯한 악상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작곡가였다. 그의 초기의 작품에서는 베토벤·슈베르트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바그너와 리스트에 열중했던 시기에는 민족적인 것을 상실한 듯한 경향을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 패배한 오스트리아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키자,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족운동에 대한 열망도 높아지게 되는데 따라서 드보르자크의 그 뒤의 작품에서도 일관적으로 흐르는 체코적인, 혹은 슬라브적인 면을 볼 수 있다.
그는 생애 후반기에 표제음악에 몰두하여 걸작을 남겼는데, 협주곡·교향곡·교향시·피아노곡·오라토리오·칸타타·합창곡·가곡 등 여러 분야에서 작품을 썼으며, 특히 시적인 [루살카]는 그의 오페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Antonín Dvorák (1841.9.8~1904.5.1)
드보르작의 작품세계
보헤미아 최대의 작곡가이면서 민족주의 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드보르작은 슈베르트처럼 음악적 천분을 타고난 개성이 강한 작곡가이다. 더욱이 아름답고 재능있으며 현명하기까지 한 부인을 만나 안락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훌륭한 작곡가로서 많은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라 하겠다. 그는 완성곡만도 206편에 이르는 바, 작곡의 모든 분야에 걸쳐 고르게 작품을 남겼다.
그의 오페라는 그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고픈 야심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모짜르트, 베르디, 푸치니 등의 오페라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는데 이것은 극적 구성력의 부족에서 온 것임을 후세의 평론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오페라 중 60세를 바라보며 완성한 [루살카]만은 오늘날까지도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와 더불어 체코를 대표하는 오페라로 자주 상연되고 있다.
드보르작은 절대음악 분야인 교향곡과 실내악 분야에서는 확실한 성공을 거둔 작곡가이다. 총 9곡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제8번 G장조, 제9번 e단조(신세계로부터)는 드보르작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편 5편의 교향시와 다악장 형식으로 된 현악 4중주곡을 비롯해 32곡의 실내악곡을 남긴 바 19세기 후반에 브람스에서 이어지는 실내악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관현악 작품만도 [슬라브 춤곡집. Slovansketance] 제1집 op.46과 제2집 op.72 등을 비롯해 20여편에 가까운 곡을 남기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는 피아노 협주곡 g단조 op.33, 바이올린협주곡 a단조 op.53, 그리고 미국에 있을 때 작곡한 유명한 첼로협주곡 b단조 op.104를 비롯해 모두 7편의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피아노 곡으로는 연탄곡 스코틀랜드춤곡집 op.41과 보헤미아의 숲에서 op.68과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8 Humoresky] op.101 을 비롯해 10여편의 곡을 남기고 있다.
성악곡 분야는 라틴어 전례문에 의해 작곡된 교회음악 [스타바트마테르] op.58, 미사곡 op.86, 레퀴엠 op.89, 테 데움 op.103 등이 있고 그의 출세작의 하나인 [빌라 호라의 후계자들]을 비롯해 많은 합창곡과 무반주 합창곡 등이 있으며 2중창곡인 [모라바 이중장] op.26을 비롯 많은 이중창곡을 남겼고, 유명한 [집시의 노래, Gypsy Melodies] op.55, [황혼의 노래, Evening Songs] op.3 등 수십 편의 예술성 높은 가곡을 남겼다.
드보르작의 초기 작품에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향이, 그리고 차츰 바그너와 스메타나의 영향이 보이나 끝까지 그에게 영향을 끼친 작곡가는 바그너라 할 수 있겠다. 브람스로부터는 음악 전체의 구성과 주제 전개법을, 바그너로부터는 참신한 화성법을 영향 받았으며, 그 위에 체코 특유의 민속음악 어법을 가미하여 보헤미아 음악이 국제무대로 진출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더욱이 미국에서 체득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소박한 민요의 선율과 보헤미아적인 어법의 복합사용으로 이국적이고도 변화감이 풍부한 곡을 썼으며 이로써 국민주의적 음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민요의 쓰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다. “작곡가들이 자기가 속한 민족의 민요정신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것은 그들의 임무다. 그러나 민요의 선율을 그대로 통째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을 곡에 반영하는 것이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Antonín Dvorák [1841∼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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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과 푸줏간을 경영하는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1857년부터 오르간학교에서 2년 동안 공부하였는데, 극장이나 음악회를 찾아다니며 베를리오즈·리스트·바그너의 음악을 들을 기회도 가졌다. 졸업 후 레스토랑 등에서 비올라연주자로서 생활하다가 60년대 초 체코슬로바키아 가설극장 관현악단에 입단, 62년부터 10년 동안 비올라연주를 담당했다. 이때에 그는 많은 오페라작품을 접할 수 있었으며, 또한 66년 그곳의 지휘자로 부임한 스메타나의 영향을 받아 당시 고조되던 체코 민족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
드보르자크의 이름이 비평가의 주목을 끌게 된 최초의 작품은 민족적인 제재를 다룬 애국시 [백산(白山)의 후계자들]에 의한 합창찬가로서, 이것은 73년에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74년 성 아다르베르트교회의 오르간주자가 되었고, 단막 오페라 [완고한 자들]로 가설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생활은 여전히 궁핍하여 이 해부터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해마다 작품을 제출하였다.
그러던 중 77년 심사위원인 J. 브람스에게 높이 평가되어 베를린출판사에서 작품이 출판되고 그의 이름도 국내외로 퍼지게 되어 이 때부터 지휘활동도 시작하였다. 84년부터 9회에 걸친 영국 방문에서 대환영을 받았으며, 91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92년 뉴욕내셔널음악원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원 원장 및 작곡교수로 있었으며 이때 아메리카대륙에서 받은 강한 인상은 교향곡 제9번 [신세계]와 첼로협주곡 등의 걸작을 낳았다.
95년 귀국하여 프라하음악원 작곡교수가 되었으며, 그 뒤 교향시와 오페라 작곡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1901년 오스트리아 종신 상원의원으로 추대되었으며, 프라하음악원 원장에 취임하는 등 많은 영예를 얻었으나 1904년 5월 1일 신장병으로 사망하였다.
드보르자크는 슈베르트와 비견되는 다작(多作)의 천재로서 샘솟는 듯한 악상으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작곡가였다. 그의 초기의 작품에서는 베토벤·슈베르트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바그너와 리스트에 열중했던 시기에는 민족적인 것을 상실한 듯한 경향을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에 패배한 오스트리아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키자,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족운동에 대한 열망도 높아지게 되는데 따라서 드보르자크의 그 뒤의 작품에서도 일관적으로 흐르는 체코적인, 혹은 슬라브적인 면을 볼 수 있다.
그는 생애 후반기에 표제음악에 몰두하여 걸작을 남겼는데, 협주곡·교향곡·교향시·피아노곡·오라토리오·칸타타·합창곡·가곡 등 여러 분야에서 작품을 썼으며, 특히 시적인 [루살카]는 그의 오페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Antonín Dvorák (1841.9.8~1904.5.1)
드보르작의 작품세계
그의 오페라는 그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고픈 야심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모짜르트, 베르디, 푸치니 등의 오페라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는데 이것은 극적 구성력의 부족에서 온 것임을 후세의 평론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오페라 중 60세를 바라보며 완성한 [루살카]만은 오늘날까지도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와 더불어 체코를 대표하는 오페라로 자주 상연되고 있다.
드보르작은 절대음악 분야인 교향곡과 실내악 분야에서는 확실한 성공을 거둔 작곡가이다. 총 9곡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제8번 G장조, 제9번 e단조(신세계로부터)는 드보르작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편 5편의 교향시와 다악장 형식으로 된 현악 4중주곡을 비롯해 32곡의 실내악곡을 남긴 바 19세기 후반에 브람스에서 이어지는 실내악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관현악 작품만도 [슬라브 춤곡집. Slovansketance] 제1집 op.46과 제2집 op.72 등을 비롯해 20여편에 가까운 곡을 남기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는 피아노 협주곡 g단조 op.33, 바이올린협주곡 a단조 op.53, 그리고 미국에 있을 때 작곡한 유명한 첼로협주곡 b단조 op.104를 비롯해 모두 7편의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피아노 곡으로는 연탄곡 스코틀랜드춤곡집 op.41과 보헤미아의 숲에서 op.68과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8 Humoresky] op.101 을 비롯해 10여편의 곡을 남기고 있다.
성악곡 분야는 라틴어 전례문에 의해 작곡된 교회음악 [스타바트마테르] op.58, 미사곡 op.86, 레퀴엠 op.89, 테 데움 op.103 등이 있고 그의 출세작의 하나인 [빌라 호라의 후계자들]을 비롯해 많은 합창곡과 무반주 합창곡 등이 있으며 2중창곡인 [모라바 이중장] op.26을 비롯 많은 이중창곡을 남겼고, 유명한 [집시의 노래, Gypsy Melodies] op.55, [황혼의 노래, Evening Songs] op.3 등 수십 편의 예술성 높은 가곡을 남겼다.
드보르작의 초기 작품에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향이, 그리고 차츰 바그너와 스메타나의 영향이 보이나 끝까지 그에게 영향을 끼친 작곡가는 바그너라 할 수 있겠다. 브람스로부터는 음악 전체의 구성과 주제 전개법을, 바그너로부터는 참신한 화성법을 영향 받았으며, 그 위에 체코 특유의 민속음악 어법을 가미하여 보헤미아 음악이 국제무대로 진출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더욱이 미국에서 체득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소박한 민요의 선율과 보헤미아적인 어법의 복합사용으로 이국적이고도 변화감이 풍부한 곡을 썼으며 이로써 국민주의적 음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민요의 쓰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다. “작곡가들이 자기가 속한 민족의 민요정신을 작품 속에 반영하는 것은 그들의 임무다. 그러나 민요의 선율을 그대로 통째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을 곡에 반영하는 것이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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