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정태기 교수(본원 원장, 한신대 신과대학장)
1.현대목회의 방향전환
오늘 우리는 산업과학의 발달로 옛날엔 상상할 수 없었던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인간생활은 어제보다 더 풍부해지고 더 편리해지고 있다. 그런데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이 윤택해지는 반면 인간의 마음은 더욱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물질문명과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국민이 스웨덴 국민인데 자살율이 세계 최고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질 문명의 혜택 가운데서 인간의 정신과 영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고 있고 상상하기 힘든 상처로 시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2천년 전에는 양을 푸른 초장과 마실 물이 있는 시냇가로 인도하고 야수로부터 보호만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양치는 방법은 첨단 과학적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그래서 양들이 병들어 죽지 않고 건강해서 생산량도 2천년 전에 비해 몇 배나 더 많다. 현대목회는 현대인의 영과 마음을 진단하고 병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2. 죄책감과 용서
여기 한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여인은 한때 남편과 두 아이를 버리고 가출해서 춤바람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수개월 후에 다시 가정에 돌아와 남편의 권유에 따라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첫날 목사님의 설교에 충격을 받는다. 설교 요지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여인의 마음은 세상에 자기 같은 큰 죄인이 없을 것 같은 생각으로 고통을 겪기 시작한다. 그 다음 예배에서도 목사님은 죄짓지 말라는 강경한 표현에 이 여인이 더욱 갈등을 느끼게 된다.
이 여인은 어느 날 자기가 어쩌다가 이런 큰 죄인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다가 자기를 타락으로 몰고 간 남자의 유혹적인 말 한마디가 생각났다. 그 남자의 유혹이 자기 자신의 미끈하게 잘 생긴 다리 칭찬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다리를 저주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집에서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부모로부터 벌을 받은 후에야 안심하듯이 인간이 죄책감을 느낄 때도 거기에 상응한 벌을 받고자 하는 이상한 심리가 인간의 마음 속에 숨어 있다.
이 여인이 자신을 엄청난 죄악의 소굴로 빠뜨린 첫 원인을 자신의 다리가 제공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다리에게 전가하는 듯한 미숙한 분노가 다리에게 쏟아진다.
그런데 자신의 다리를 저주하면서 두들기기를 십여일 동안 했을 때, 어느 날 새벽 이 여인은 하반신이 마비가 되어 있었다. 그 날부터 이 여인은 병원과 한의원 치료를 두 달 이상 계속 받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이 여인이 하는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치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어느 목사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다리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심한 죄책감으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가 왔다고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데 그것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용서함을 받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목사님은 먼저 이 여인에게 사랑의 하나님과 용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인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죄책감을 다 털어놓고 고백하며 회개하게 했고, 목사님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용서와 사죄의 기도를 한다. 물론 이 치유작업은 3주일 동안 연속으로 행해진 일이었다. 목사님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여인의 삶에서 흐트러진 모든 관계를 정리하도록 도와주었다. 놀라웁게도 3주일이 지난 어느 날부터 여인의 다리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걷게 되어 지금은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3. 인간 삶의 전체를 통찰하는 안목
여기에서 이 여인의 병의 뿌리는 죄책감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진다. 병의 근원이 죄라고 할 때, 이 죄를 용서함 받도록 중재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특별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목회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경우의 환자가 극소수일 것이라고 단정할지 모른다.
미국 의학 연구팀의 연구 보고에 따르면 신체적인 문제로 의사를 찾는 환자들 가운데 50-75%가 신체적 문제와 함께 영적 이상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팀의 한 의사는 자기를 찾아온 환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의사의 도움보다는 목사의 도움을 훨씬 더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서 환자들이 말하는 신체증상을 자세히 들어보면 환자 자신의 삶 전체를 도와 줄 수 있는 어떤 사람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심리학자이자 치료자이기도 했던 C.G.Jung이 죽기 2년 전 영국 BBC방송국에 나가 고백한 바에 의하면, 비록 그가 치료한 환자들이 중년층 이상의 사람들이었거나 정신적인 환자였다고 해도 Jung 자신이 치료한 환자들치고 영적인 장애가 병의 근원이 아닌 환자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환자의 영적인 장애를 바르게 도와 줄 때 회복 안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인간의 영적인 차원과 정신적 신체적 차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목회자는 인간의 병과 치유에 대해서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치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치유는 거의 모든 교회에서 경시되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 인간은 병에 시달리게 되는가? 어떤 환경에서 병은 활기를 띄게 되는 것인가? 인간의 삶이 상처를 입고 인간의 삶이 파괴될 때 병은 뿌리를 내리게 되고, 싹 트게 된다. 그래서 한 사람이 병을 앓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체적 조건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병들 수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병들 수 있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활력이 없어지면 병들게 된다. 인간은 그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병들 수가 있는데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이다. 가족도, 교회도, 도시도, 국가도 모두가 병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의 병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 제도가 병들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할 증상일 수가 있는가 하면, 한 나라의 병은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환경이 오염될 때 파생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모든 창조세계는 치유받고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병이란 깨어지고, 상처받고, 분열되어진 상태를 나타내는 언어이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창조질서의 기능에 이상이 왔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도 혈관 파열, 골절, 장 파열 같은 상호유대 관계의 파열을 병으로 보고 있고 인격 분열도 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병적 현상은 사회 유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두동강난 조국, 분열된 사회, 인종분규, 지방싸움은 모두가 깨어지고 분열된 상태의 병명이다.
성서에는 언제나 죄를 설명하는데 분열의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떠나는 것,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는 것, 또 세상이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것등이 좋은 예이다.
다시 말해서 병이란 어디에서 일어나든지 상처와 분열과 유대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체에 나타나는 위와 같은 현상을 질병이라 하는데, 다만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분열과 파괴라는 현상이라면 치유하는 데 있어서도 서로를 함께 묶어주는 전인치유의 처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나타나는 질병 자체가 나 자신의 부조화를 일깨워 주는 신호로 작용할 때 나의 질병은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가 있다. 여러 가지 요소가 연합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지되어지는 내가 생명체계 어느 한 요소 이상으로 질병이 나타나고 있음을 자각한다면 이것은 치유의 중요한 핵심점일 수 있다.
치유의 목표는 전인건강이요, 전인건강이 추구하는 목표는 구원이다. 그래서 건강과 구원은 하나님에게 치유의 뿌리를 두고 있는 전인건강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치유는 대부분 육신의 치유였지만 이런 육신적 치유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표현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치유와 구원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치유가 하나님의 구원행위로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복음서는 예수의 치유행위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말씀선포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치유행위 자체가 구원행위임을 의미하고 있다.
위와 같은 구원의 절정이자 치유의 극치를 나타내는 행위가 바로 십자가상의 예수였다. 십자가는 파괴와 죽음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던 사탄의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십자가 상의 예수의 죽음은 이 세계를 치유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이 역사적 치유는 바로 이 세계를 구속시키는 구원의 행위였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치유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십자가 상의 치유는 승리와 영과의 신호가 아니라 겸손과 고통의 신호였는데, 이것은 우리의 고통과 질병과 사람 가운데서 온전한 승리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치유였다.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이 죽음의 상황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전인치유- 전인건강- 전인 구원의 상징이다. 부활은 패배- 병을 넘어서는 승리의 사건이다. 여기에서 십자가 상의 수난을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이 사망의 마지막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하나님의 품 안에서 전인적인 삶을 서서히 살아가면서 성장해 가는 삶이다.
치유목회란 한 인간의 육신적인 질병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질병은 그 사람의 삶 전체의 균형이 어디에선가 파괴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가 있다면 그는 그의 삶을 여러가지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지해가고 있다. 그의 육신 자체도 수천 가지 요소들이 서로 밀접한 유대관계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대외적인 삶 자체도 가족, 동료, 사회, 국가, 자연과의 여러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목회자가 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한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인데, 이것은 바로 인간 구원행위 그 자체이다. 이런 치유이자 구원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환자를 관찰하기 보다는 그가 살고 있는 그리고 관계를 맺고 있는 삶 전체를 통찰할 수 있을 때 전인구원- 전인건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폴 투르니에는 인간에게는 영적인 세계와 육신적 세계가 있는데, 의학은 육신적 세계만 치유한다고 보고 이런 치유는 부분적인 치유라고 단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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